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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라는 이름의 판결 앞에서

조해진
조해진

조해진

70년대 중반에 태어난 내게 북한은 하나의 번듯한 국가라기보다 이미지에 가까웠다.
유년시절에는 늑대와 돼지에게 억압받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의 나라로 북한을 묘사한 만화가 유행했고,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북한은 적이고 원수이니 무조건 반대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다. 대학에 들어가니 북한이야말로 주체적인 국가라거나 한국이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면 북한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과 선배들이 있었다. 때로는 수긍했지만 때로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리고 1997년쯤의 어느날, 방학을 앞둔 고요한 캠퍼스를 거닐다가 ‘고난의 행군’을 맞은 북한의 실상을 보여주는 대자보 앞에 서서 거기에 적힌 문장들을 오래오래 읽었다. 그날 그 대자보를 읽지 않았다면 훗날 『로기완을 만났다』(2011)라는 작품은 쓰지 못했을 거라고, 나는 지금도 확신한다.

 

폐허와도 같았던 지난 역사

 

언제부터인가 북한은 질문을 통해 환기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와 권력세습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고 동구권이 중국을 뒤따라 개방을 감행했을 때, 어째서 북한만은 빗장을 걸어 잠갔던가. ‘고난의 행군’ 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아사한 것이 맞는다면, 내 아이나 부모가 가장 비참하고 처절한 방식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어떻게 정권을 전복하려는 대대적인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던 것일까. 질문은 더 먼 곳까지 거슬러가기도 했다. 전쟁은 왜 일으켰나. 전쟁 직후 몰아친 미국 공군의 무차별적인 폭격에 패전을 감지했으면서도(김태우 『폭격』 참조) 바로 항복을 선언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북한의 공식적인 발표나 논평을 우리는 들은 적이 없다.

 

그리고 지난 두 정권에서 북한은 그 어느때보다 위험하고 제멋대로인 국가의 이미지로 소비됐다. 두 전직 대통령은 너무도 쉽게 전쟁을 입에 올렸고 천안함의 침몰 원인을 많은 사람들이 수긍할 수 없는 원인으로 규정하는가 하면, 국민과의 논의 없이 개성공단을 폐쇄했다. 북한 역시 핵실험과 미사일과 로켓으로 끊임없이 논란을 만들어냈으며 미국과는 자극적인 말싸움을 이어갔다. 그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상기하며 피로한 공포를 느껴야 했다. 나는 종종 억울했다. 전쟁은 내가 사는 곳과 아끼는 사람들을 파괴할 것이 분명한데 전쟁을 반대하는 작은 목소리 하나 얹을 수 없다는 것이 답답할 만큼 억울했다. 미국과 구소련, 중국의 개입으로 장기화된 한국전쟁이라는 역사가 제2의 한국전쟁으로 반복된다면, 그 전쟁이 지나간 폐허 위에는 누가 남아 있을 것인가. 생명도 희망도 없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그 폐허……

 

이 모든 시간을 기억할 의무

 

그리고 시간은 흘러, 2018년 4월 27일이 왔다.
나 역시 수많은 사람들처럼 휴대폰과 노트북 화면으로 남북 정상이 만나는 과정을 지켜봤다. 그토록 오랜 세월 여러 가변적인 이미지 속에 숨어 있던 북한이 실체가 되어 눈앞에 나타났는데, 그 이미지는 놀랍게도 다정하고 편안했다. 북한의 국무위원장이 흔쾌히 판문점의 남북경계선을 넘어와 남한의 대통령과 손을 잡고 농담을 하고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현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오랫동안 공을 들여 편집까지 마친 영화 속 장면을 보는 것만 같아 한동안 두 눈만 끔벅이고 있어야 했다. 만찬 음식인 옥류관 평양냉면의 맛을 상상해봤고, 문재인 대통령 앞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보여준 의외의 공손한 태도는 정치적인 예의인지 유교의 영향인지, 아니면 그저 그의 성품인지 궁금해하기도 했다. 핵과 전쟁에 대한 공포 없이, 억울하거나 답답한 것도 없이, 그저 흐뭇하게 웃으며 이토록 사소한 것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한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조급하게 통일을 진행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북한의 노동시장과 풍부한 자원으로 ‘우리’ 경제의 활성화와 인구감소 문제의 해결을 말하는 사람보다는 북한이라는 한 국가가 역사의 전환점마다 선택한 것들을 궁금해하고 해답을 알려 하는 사람이 더 많아질 때, 적어도 그때에야 통일시대를 맞을 자격이 있는 것 아닐지……

 

요사이 나는 역사가 머리 위의 구름처럼 흘러간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우리는 분명 그 역사의 한가운데에 있지만 그 실감이나 감각을 되새기거나 음미할 새도 없이 한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역사의 한 막(幕)은 끝났고 시대는 이미 바뀌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름은 다시 구름이 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발의 가결과 촛불집회와 파면, 그리고 그뒤 이어진 새로운 정부의 탄생과 그 정부가 1년 만에 이룬 남북정상회담은 순식간에 지나간 듯하지만 현재는 가늠도 할 수 없는 먼 미래에까지 사다리처럼 견고히 이어질 것이다. 비록 그 과정이 생각보다 험난하고 예측하지 못한 고난이 오더라도, 한가지는 확실하다. 흘러가는 역사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모두 증인이 되었다는 것…… 우리에게는 이 시간을 기억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우리가 증인인 이상, 평화라는 이름의 이 판결은 항소가 불가능하다.

 

조해진 / 소설가

2018.5.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