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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인간이 하는 일: 정영목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박여선

1245질문의 전환, 옳은 번역에서 좋은 번역으로

 

외국문학 연구자에게 번역은 연구활동의 일상이다. 당장 외국어로 된 글을 읽으면서 글이 구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알아먹는 것부터가 기본적으로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번역활동이다. 그다음에 우리말로 글을 쓰는 과정에서 외국어로 된 인용문을 실제로 번역하는 것은 기본이고, 다루는 텍스트가 제시하는 핵심적인 개념이나 텍스트가 쌓아 올리는 의미의 망을 분석하고 우리말로 다시 표현해서 논평할 때 번역은 이 모든 활동의 근간을 이루는 기초적 행위가 된다. 이렇게 연구활동의 근간으로서 번역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으니 외국문학 연구자가 번역 문제에 예민해지는 것은 당연할진대 나는 부끄럽게도 박사논문을 쓰면서 본격적으로 번역 문제를 다루게 되면서야 비로소 번역이라는 행위가 정말로 무엇을 하는 일인지를 제대로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전공 작가였던 D. H. 로런스(Lawrence)가 이태리 작가인 지오반니 베르가(Giovanni Verga)의 소설을 영어로 번역한 것을 다른 이들의 번역과 비교대조 하고 있었는데, 서로 다른 버전들을 비교하면서 번역평가의 핵심이 단순히 오역 여부를 가리거나 도착언어가 얼마나 자연스럽고 매끄러운지 판단하는 문제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것을 확연히 깨달았다. 같은 작품이 번역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었다. 번역이니 역자가 옮긴 것은 언어였으나 분명 옮겨진 것은 언어 이상의 무엇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정영목의 에세이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문학동네 2018)는 번역에 대한 우리의 깊은 이해를 유도하는 책이다. 저자가 번역 문제에서 무게중심을 “옳은 것을 따지는 일에서 좋은 것을 가려내는 일”로 옮겨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번역이 무엇을 하는 일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에서 나온 정확한 판단이라 생각된다. 두가지 작업이 구분이 필요할 만큼 다른 일이냐는 물음이 나올 법도 한데, 실상 큰 차이가 있다. 후자에는 전자도 포함되지만 전자에는 후자가 포함되지 않는다. 옳은 것을 따지는 일은 번역을 기본적으로 원본에서 나온 파생물로 대하는 것이요, 좋은 것을 가려내는 일은 번역 자체의 가치를 가늠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논문을 쓰며 대면했던 번역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들, 그때 접했던 번역 관련 책들을 연속적으로 마주하게 되니 당장 반가운 마음이 들었고, 더불어 쨍쨍하게 맑은 가을하늘처럼, 선명하고 날카로운 가을햇살처럼 꿰뚫어 찢는 글쓴이의 문체가 건조한 유머감각 뒤의 서늘한 솔직함과 어울려 글 읽는 맛 자체도 아주 그만이었다.

 

제3의 영역,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저자는 우리말이 매끄럽고 평탄하여 읽기 좋은 번역, 즉 ‘번역 같지 않은 번역’이 잘된 번역이라는 흔한 통념적 역설을 비판한다. 이는 오히려 언어의 통속성을 강화하는 기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할을 위해 자기정체성을 지워야 하는 배우처럼 번역은 자신이 번역임을 드러내는 흔적들을 남기면 안 되는 기구한 운명이라 ‘번역투’라도 냈다간 난타당하기 십상이다. 저자는 계속해서 번역더러 번역이 아닌 척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정당한가 반문한다. 번역임을 인정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차이를 보듬는 윤리적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나아가 낯선 것이 낯선 것으로서의 자리를 제대로 차지하고 들어와 차이의 숨구멍을 열어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한다면 이제 우리말은 매끄러운 번역을 통해 동일성을 확인하며 정체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신선한 활력과 새로운 생명력을 담보하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왜 번역이 번역 같으면 안 되느냐는 저자의 반복되는 질문은 너무나 새삼스러운 사실이라 오히려 놀라운데, 이런 단순하고 명확한 진실을 우리가 굳이 외면해온 이유가 번역에 대한 통속적 관념들을 별생각 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대학교에서 영어로 된 문학 텍스트를 가르치면서 나는 종종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영어로 된 최고의 문학을 썼다고 평가받고 있고 20세기 초반 영(英)소설의 대표적인 작가라 일컬어지는 폴란드 출신의 영국 소설가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에 대해 언급하곤 한다. 그가 스물한살이란 늦은 나이에 처음 영어를 배웠음에도 자신의 모국어인 폴란드어, 어린 시절부터 능숙하게 사용해온 불어가 아니라 제3의 언어인 영어로 글을 써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는 사실에 학생들은 고무되곤 하는데, 내가 그를 자주 언급하는 이유는 영국의 한 평자가 콘래드의 영어 스타일을 칭송하면서 그의 책을 다 읽고 나면 아주 훌륭한 번역서를 읽은 느낌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많은 영문학자들은 콘래드가 영어에 들여온 낯선 에너지가 영어라는 언어 자체의 가능성을 확대하고 그 외연을 넓혔다고 평가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원어민의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영어가 그들의 목표가 되어야만 한다는 이상이나 당위는 비현실적이기도 하지만 당면한 사태에 대한 정확한 판단도 아니라고 말하곤 한다. 요는, 정영목이 주장하는 것처럼 두 언어가 오고 가는 번역 상황에서 언어적 실천은 기본적으로 다항적 관계에서, 닫힌 체계가 아니라 열린 체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이는 언어의 속성이 기본적으로 불완전하다는 데에 기인한다. 저자가 언급한 벤야민의 말처럼 작품은 (다른 시공간 및 다른 언어로의) ‘번역’을 통해 그 생을 미래로 연장해간다. 불완전한 언어는 그런 번역 과정에서 제2의 언어와 만나 더 완전한 제3의 언어로 나아가는 것이다.

 

번역, 인간이 하는 일

 

인공지능이 발달하면서 기계번역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희망적 기대들이 쌓이고 있지만 이런 기대를 현실화하는 과정에는 저자가 이 책에서 암시하는 언어의 기본적으로 불완전한 속성, 열린 체계로서의 언어 혹은 텍스트에 대한 사유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틀리지 않은 번역이 아니라 (이것은 필요조건으로 놓고) 좋은 번역이 번역의 가치평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은 그래서 정확할 뿐만 아니라 아주 근본적이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에게 읽기의 행위는 그 자체가 상상을 동원한 해석 행위인데, 한 대상에 대해 완전하게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해석’이 불가능하듯 해석 행위에 기초한 번역이 완전하게 중립적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번역에는 불가피하게 번역가의 해석이 개입”되고 따라서 번역은 기본적으로 번역가가 한 인간으로서 깊은 수준에서 “타자를 상대하는 행위라는 것”은 번역이 단순히 의미를 중립적으로 전달하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탐구의 영역으로서, 즉 인문학의 영역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가 이 책에서 제기하는 ‘번역이 인문학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 역시 정확하고 깊다. 일상에서든 아니면 지적, 예술적 활동에서든 우리가 소통하고 표현하기 위해 구축하는 언어는 언제나 지극히 통속적인 표현과 독특하고 창조적인 구축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 일상에서 우리는 통속과 창조 사이를 가로지르며 타인의 말귀를 알아먹고 자신의 해석을 표현하고 소통한다(혹은 소통한다고 믿는다). 한편으론 부정확하고 다른 한편으론 풍요로운 의미의 원천이 되는 언어의 이런 속성(저자가 책에서 ‘성기다’고 표현한)은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를 깊은 수준으로 공부할 때 더 쉽게 터득되는 통찰이다. 그런 면에서 외국어 공부의 의미를 실용의 차원에서가 아닌 인간탐구의 차원에서 찾고 공부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 역시 새삼 정확하고 깊다. 본격적으로 번역을 인문학적으로 접근한다면 저자가 책에서 지적하는 우리의 부실한 번역사, 그리고 번역과 근대가 긴밀한 길항관계를 유지해온 동아시아사 내 우리의 위치 정리 등 번역과 정치의 문제도 더 본격적으로 연구될 것이다. 전에 발표된 글들이지만 이렇게 모여 책으로 출간되어 대중과 소통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 여정은 이미 벌써 시작된 듯하다.

 

박여선 / 서울대 기초교육원 교수

2018.7.11.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