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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 다다른 원초의 순간: 신나미 교스케 『소와 흙』

김곰치

소와흙 1206년 전 봄. 그러니까 일본 후꾸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일어나고 이듬해 봄 어느 아침. 나는 신문에서 기사 하나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기사를 스크랩해뒀으므로 지금도 찾아 읽을 수 있다. 제목 일부는 이렇다. “원전 20km 내 주민은 소 키우는 농장장 단 1명”. 기사에 이런 구절들이 보인다.

 

“주민들이 황급하게 피난을 떠났다. (…) 요시자와씨는 자기까지 농장을 떠나면 소들이 모두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회사 측의 철수 명령도 거부하고 농장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한동안 외부 피난소에서 생활하며 매일 출퇴근했고, 작년 12월부터는 아예 목장에서 잠까지 자고 있다. 그는 현재 목장에서 소 300마리를 키우고 있고, 주변 농장에서 방치한 소까지 돌보고 있다. 주민이 피난 간 축산농가의 소는 겨울이 되면서 대부분 아사(餓死)했다. 소를 포기하려 했던 회사(‘M목장’)도 요시자와씨의 열정에 감복, 방치된 소를 살리자는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목장은 한때 20마이크로시버트까지 방사선 농도가 치솟았고 지금은 많이 낮아졌다고 해도 6~7마이크로시버트 정도로, 일반 지역에 비해 100배가량 높다.”(조선일보 2012.2.27.)

 

『소와 흙: 후쿠시마, 죽음의 땅에서 살아가다』(우상규 옮김, 글항아리 2018)는 일본 코오단샤(講談社) 논픽션상을 수상한 장편 르뽀르따주인데, 바로 요시자와씨가 책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선생님, 반갑습니다. 살아 계셨군요.

 

일단 그의 생사 확인은 했는데, 그의 대담한 행위에 무작정 감동했던 6년 전과 달리 이제는 이런저런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방사능 오염지역의 소들은 시장 출하가 금지돼 있다. 젖소는 우유를 내다 팔 수 없고 육우도 도축 자체를 하지 못한다. 그런데 한두해도 아니고 상품으로서 끝이 난 소들을 계속 살려나가려 한다면 사료값부터 어찌 감당하냔 말이다. 원자력발전소 사고에 책임을 져야 하는 토오꾜오전력이나 당국에서 소값은 일괄적으로 보상했을 테지만, 상당한 자금을 지속적으로 지출해야 하는 어리석은 짓이 된다. 책에서도 요시자와씨가 ‘계속 살려나가는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고 다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인간 본연의 감정에 따른 행동이 먼저였고, 행동의 사회적 의미의 발굴은 이후의 일이다. 『소와 흙』은 바로 그걸 탐구해간다.

 

책과 요시자와가 찾아낸 의미는 대충 세가지다. 첫째, 소들의 존재는 방사능에 오염된 먹이를 먹고 계속 생존해갈 때의 생체변화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것이다. 둘째, 언젠가는 사람들이 고향 마을로 돌아와 거주해야 하는데, 소를 봄여름에 방목함으로써 인근의 논을 계속 논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소가 풀을 뜯어 먹으면서 논이 밭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가옥과 들의 경우와 달리 숲의 제염(除染)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데, 소들을 풀어헤쳐 키우면서 그 배설물만 수거해도 상당한 제염 효과를 볼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제시된, 소를 계속 살려가야 하는 세가지 의미랄까 이유는 안락사를 재촉하는 농정 당국을 설득하고 또 사회여론에 폭넓게 호소하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피폭 위험은 본인 책임’이라고 각서까지 써서 당국에 제출했으니 요시자와씨는 소들을 살리기 위해 제 목숨을 바칠 각오까지 했다고 봐야 한다. 나름의 절실한 존재적 깨달음이 있었을 것이다. 과연 앞서 제시한 세가지 의미나 이유를 가지고 하나뿐인 목숨을 걸 수 있을까 싶다.

 

그렇다고 그가 종교랄까 어떤 구도적 행위를 한다고 할 수도 없다. 수십년 건실한 소 사육자로서 농장생활을 하면서 그는 수많은 육우를 도축장으로 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생명이 있는 것은 늦든 이르든 모두 죽게 돼 있다. 어떤 죽음이 그 생물에게 행복한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해보면, 역시 소에게는 도축장에서 고기가 돼 본래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도축장으로 가는 소를 불쌍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어미 소에게서 태어난 송아지가 자라 어엿하게 제 몫을 하게 된다면, 보통 육우라면 30개월의 목숨을 다하게 된다. 이야, 너희가 무사히 소의 일생을 다할 수 있어 행복하네,라고 생각하면서 보내주고 있다. 도축장에서의 죽음은 한순간이다. 나는, 생물 중에서 인간이 가장 괴로운 죽음을 맞는다고 생각한다.”(66~67면)

 

요시자와의 상사라고 할 수 있는 M목장주의 고백인데, 경제적 가치를 잃은 소들을 같이 합심해서 살려가기로 했으므로 요시자와의 생사관과 대동소이하지 않을까 싶다. 하여튼 그들은 구도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소 곁으로 달려간 최초의 행동으로 그 일단이 드러났던 그의 진짜 본심은 어쩌면 그 자신도 알지 못할지 모른다.

 

책을 지은 이는 출판인이자 프리랜서 기자인데, 후꾸시마 일대에 방치된 개와 고양이를 살펴보러 갔다가 소를 돌보는 농부들의 모습에 홀렸다. 이 외부자의 눈에 소를 계속 살려가는 이유와 의미를 넘어선 농부의 진짜 본심이 포착되었다고 할까, 그들과 어울리는 나날 속에서 우연히 바라본 한 풍경에 그것이 오롯이 담겼다는 생각이다.

 

“상록수의 녹색에 지지 않고 싹을 틔워올리는 어린 나뭇잎의 숲을 배경으로 푸르디푸른 목장의 파노라마. 녹색 일색이 아니라 각각 색조가 달라 자연이 만들어내는 패치워크 같다.”(255~56면) 소들의 안락사를 거부한 또다른 한 목장을 건너편 산에서 바라보는 장면인데, 지은이는 마침내 소를 발견한다.

 

“쌀알 정도의 검은 덩어리가 곳곳에서 움직이고 있다. 소다. 풀을 뜯고 있다. 달리는 녀석도 있다. 논도 젖은 듯한 연두색의 싹을 틔워, 소 혀에 쓰다듬어지길 기다리고 있다. 도로를 따라 장난감 같은 집이 몇채 있다. 저 집에 사람이 사는 날이 다시 오리라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정말 상상하기 어렵다. 사람이 한명도 없는 별천지에 소들은 살아 있다. 목장은 목장인 채로, 소는 소인 채로. 아름다운 국토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더이상 말하지 말라.”(256면)

 

최고의 장면으로 꼽는다. 그런데 나는 바로 절망스럽다. 제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방사능에 오염된 풀이고 논이고 또 소며 땅이 아닌가. 언어와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인간은 낄 자리가 없다. 책은 그 원초의 순간에 아슬아슬 다다랐다. 요시자와의 행동에 감동하는 우리 모두의 내면 저 깊숙이에 있는 본심은 언어 이전 또는 이후의 일이다. 우리는 이후를 지향해야 한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에 수록되었습니다.

 

김곰치 / 소설가

2018.7.18.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