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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동원 배상판결과 ‘기문이망’

김영환
김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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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문이망(倚門而望). 아들이 집에 돌아오는 때에 어머니가 문에 기대어 아들을 기다린다.

 

양승태 사법부가 저지른 사법농단 사태의 핵심인물 가운데 한명인 박병대 전 대법관이 구속 전 피의자 심문 과정에서 언급하여 최근에 유명해진 말이다.

 

그는 93세의 노모가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구속을 피하게 해달라고 호소했고, 결국 그의 절절한 읍소에 응답하듯 임민성 영장전담판사는 그를 어머니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려보냈다. 게다가 임판사는 친절하게도 영장 기각 사유에 ‘가족관계’를 포함했다. 영장 기각 사유에 가족관계가 포함된 것이 ‘이례적’이라는 말 한마디로 정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일본제철(현재 ‘신일철주금 주식회사’)에 동원되어 강제노동을 당한 원고 4명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들의 강제동원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을 인정하여 피고 신일철주금이 강제동원 피해자인 원고들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원고들이 어린 나이에 가족과 이별하여 열악한 환경 아래에서 위험한 노동을 강요당했고 임금도 강제로 저금해야 했으며, 이마저도 제대로 돌려받지 못하는 등의 강제노동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러한 강제동원이 일본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 지배 및 침략전쟁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임을 명확히 했으며, 이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수십년간 일본 법정에서 싸워왔으나 번번이 한일협정의 장벽에 부딪혀 좌절해야만 했던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비로소 그 장벽을 넘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떠나버린 이들의 무덤에 올리는 배상판결

 

이날 법정에서 역사적인 판결을 직접 지켜본 94세의 원고 이춘식씨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판결에 대한 기쁨의 소회를 묻는 기자들 앞에서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다른 세 명의 원고를 떠올리며 회한의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이춘식씨가 지난 11월 30일,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의 신일철주금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상고심 판결에 참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뉴시스

이춘식씨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의 신일철주금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상고심 판결에 참석하기 위해 대법원으로 향하고 있다. ⓒ뉴시스

 

1943년 열아홉의 청년 이춘식은 일본제철 카마이시(釜石) 제철소로 동원되어 1945년 1월까지 강제노동을 당했고, 1945년 1월부터는 현지에서 징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가 코오베(神戸)에서 해방을 맞았다. 조선인 동료들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그는 받지 못한 월급을 받으러 카마이시 제철소를 찾아갔다. 그러나 공장은 파괴되었고 월급은 받을 수 없었다. 그는 이듬해 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본제철 오오사까 공장에서 강제노동을 강요당한 여운택, 신천수 두 피해자가 오오사까 지방재판소에 일본제철을 상대로 처음 소송을 제기한 것이 1997년 12월. 2003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최종 패소한 두 원고는 같은 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김규수와 함께 2005년 2월 한국 법정의 문을 두드렸다. 일본에서의 소송을 포함하면 21년, 한국에서의 소송만으로도 13년의 투쟁 끝에 원고들이 마침내 승소판결을 받아낸 것이다. 그러나 20여년의 재판투쟁 끝에 마침내 승리한 기쁨을 누려야 할 원고 3명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20여년간 일본에서 소송을 지원해온 ‘일본제철 징용공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의 일본 시민들은 돌아가신 원고들의 묘소를 찾아 눈물로 승소의 기쁨을 전할 것이다.

 

거세지는 일본의 한국 때리기

 

대법원 판결이 내려지자 일본사회는 전시총동원체제를 연상시킬 만큼 ‘한국 때리기’에 몰두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국제법 위반’을 운운하며 노골적으로 판결에 대한 비난을 퍼부었고, 코오노 외무상은 ‘한일관계의 근간을 뒤흔드는 행위’라며 주일 한국대사를 불러 강력히 항의했다. 또한 일본정부는 신일철주금에 판결에 불복하라는 압력을 공공연하게 가하고 있다. 언론도 이러한 움직임에 가세해 연일 한국 때리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2002년 9월 17일,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가 밝혀진 이후 일본에서 일어난 ‘북한 때리기’가 재현된 듯한 인상마저 준다.

 

그러나 ‘3권 분립’의 민주주의 기본원리를 생각할 때, 한국의 사법부가 내린 판결에 대해 일본정부가 한국정부를 비판하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 소송은 민사소송이기 때문에 소송 당사자가 아닌 일본정부가 신일철주금에 압력을 가해서도 안 된다. 또한 일본정부는 이 판결이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하지만, 국제법을 위반하고 있는 당사자는 일본정부 자신이다. 1999년부터 국제노동기구(ILO)는 일본정부가 침략전쟁 시기에 저지른 산업강제노동이 강제노동금지조약을 위반한 것이므로 피해자들을 구제할 것을 일본정부에게 계속 촉구해왔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이를 철저하게 무시해왔다.

 

납치문제와 핵개발을 빌미로 한 ‘북한 때리기’를 통해 장기집권하고 있는 아베정권은 개헌 시도의 분수령이 될 내년 참의원선거를 앞두고 한국과의 갈등을 국내 정치에 이용하고 있다. 지난 11월 5일 대법원 판결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한 일본 변호사들은 강제동원 문제의 본질이 인권문제이며, 이번 판결이 피해자 개인의 구제를 중시하는 국제인권법의 발전에 부합하는 판결이라고 평가하면서 양국 정부가 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한국정부는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한다는 원칙을 명확히 하고, 일본정부의 도를 넘는 대응에는 분명하게 할 말을 하면서 강제동원 문제의 포괄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또한 시민사회는 국제사회에 강제동원의 실상을 더욱 적극적으로 알려나가면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해온 일본 시민사회와의 연대를 더욱 강화해나가야 할 것이다.

 

사법농단 책임자를 처벌해야 하는 이유

 

한편 이 소송을 둘러싼 재판거래 의혹이 하나둘씩 사실로 밝혀지면서, 앞에서는 ‘국익’을 말하지만 뒤에서는 철저하게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에만 몰두하는 우리 사회 권력집단의 추악한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목숨을 댓가로 판결을 고의로 지연시킨 양승태 사법부, 박근혜 청와대와 외교부, 그리고 김앤장의 재판거래 과정을 보면, 과연 그들이 누구의 이익에 복무해온 권력집단이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법농단의 진상을 철저히 밝히고, 반드시 책임자를 처벌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들은 ‘국익’을 말할 자격조차 없다.

 

박병대 전 대법관이 ‘기문이망’을 언급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내게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어머니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일제강점기에 전쟁터로 혹은 강제노동의 지옥으로 끌려간 자식이 오늘은 돌아올까 낮이나 밤이나 대문을 열어놓고 자식을 기다린 어머니들. 끝내 돌아오지 않는 자식을 하염없이 기다리다 화병으로 세상을 떠난 수많은 어머니들이 있다. 강제동원 소송의 판결에 직접 개입한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그는 자식을 기다리던 그 어머니들의 절절한 마음을 상상이나 해봤을까. 이제라도 70년 넘게 자신들의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외롭게 싸워온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김영환 /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2018.12.12. ⓒ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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