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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1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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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형민의 어머니는 운동회에서 늘 계주의 마지막 주자를 담당했다. 역전의 명수. 이십일년 만에 중학교 동창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대부분의 친구들이 그 별명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이 이명수여서 자연스럽게 그런 별명이 생겼다. 중학교를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동창들과 다시 연락이 되는 게 반갑지만은 않았다. 형민이 드라마에 출연하게 된 걸 계기로 국민학교 시절 내내 같이 붙어 다니던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그 친구는 남편의 장례식장에 와준 유일한 친구였고 우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어리둥절해하던 어린 아이의 얼굴을 잊지 않고 있었다. 다른 동창들에게도 전화를 걸어 그 소식을 알렸고, 그러다 이참에 다 같이 얼굴이나 보자는 제의를 했다. 스무명이 넘는 친구들이 가게로 찾아왔다. 몇몇은 진구가 정치인의 숨겨진 자식이라는 소문을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에 오기도 했다.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들은 옛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잊고 있던 기억들이, 혹은 잊고 싶은 기억들이, 가게 안을 가득 메웠다. 누군가 사회선생님을 식당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혼자 선짓국에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는 거였다. 얼굴이 아주 안됐더라고. 내가 밥값을 계산했어. 친구의 말에 다른 친구가 넌 참 속도 좋다, 하고 말했다. 나 같으면 복수를 했을 거야. 누군가 말했다. 그 대화를 시작으로 한동안 그녀와 동창들은 복수하고 싶은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했다. 보고 싶은 선생님의 이야기도 했다. 밤 아홉시가 지나서 한 친구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 그녀는 손님으로 착각을 하고는 오늘 영업 안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친구가 말했다. 나야, 나. 모르겠어? 그녀는 친구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모르겠다고 말하자 친구가 중학교 일학년 때 운동회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니가 마지막 주자였잖아. 1학년 2반. 내가 1반의 마지막 주자였고. 그 말을 듣자 그녀는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름까지. 강희자였다. 니가 그때 그 아이라고? 못 알아보겠다. 그 말에 강희자가 화통하게 웃었다. 하하. 좀 고쳤거든. 어린 시절 강희자의 별명은 쌕쌕이였다. 제트기처럼 빨리 달린다고 해서 쌕쌕이. 그녀도 반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아이였지만, 쌕쌕이는 학교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아이였다. 국민학교 시절 그녀는 강희자와 같은 반을 한 적이 없었고 그래서 언제나 계주에서 2등을 했다. 단 한번을 빼고. 중학교 일학년 때, 그녀는 1학년 2반의 계주 주자가 되었다. 첫번째 주자가 뛰었다. 2반이 1등. 1반이 2등. 3반이 3등이었다. 두번째 주자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1반 아이가 역전을 했다. 3반 아이가 2반 아이의 팔을 잡아당기는 반칙을 했고 그 바람에 3등으로 밀렸다. 몇몇 아이들이 3반의 두번째 주자 이름을 부르며 야유를 퍼부었다. 그녀 차례가 되었다. 바통을 전해 받는 과정에서 3반이 실수를 했고 그녀는 2등으로 출발했다. 저 앞에 쌕쌕이가 있었다. 그녀는 달리면서 생각했다. 니가 제트기면 나는 구름이다. 나는 구름. 나는 구름. 그녀는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그러자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발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뛰었다. 쌕쌕이의 뒤통수가 점점 가까워졌다. 결승선을 몇 미터 앞에 두고 그녀의 어깨가 쌕쌕이의 어깨를 지나쳤다. 2반 아이들이 모두 자리에 일어나 환호를 했다. 그녀가 역전의 명수라고 불리게 된 것은 그날 이후였다. 그런데 그때 말이야, 뭔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달릴 수가 있었던 거지? 이제는 걷기만 해도 숨이 찰 정도로 뚱뚱해진 쌕쌕이가 그녀에게 물었다. 방학 내내 고추장을 먹었거든. 그래서 독해진 거야. 그녀가 대답했다.

국민학교 졸업을 앞둔 그해 겨울 그녀의 아버지가 쓰러졌다. 마을회관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발을 헛디뎌 냇물에 빠졌다. 술에 취하면 마을회관에서 종종 잠을 자기도 했기 때문에 가족들은 아버지를 기다리지 않았고 그래서 새벽이 되어서야 발견되었다. 그녀는 잠결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그녀를 중학교에 보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상의하고 있었다. 내년이면 명석이도 대학에 보내야 하지 않겠냐. 할아버지가 말했다. 명희도 중학교까지만 보내고. 그녀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숨죽여 들으면서 울었다. 눈물이 베개를 적셨다. 등 뒤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언니도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모른 척했다. 그녀는 오빠만 예뻐하는 할아버지가 미웠고, 똥오줌을 받아내야 하는 아버지가 미웠고, 한숨만 쉬는 어머니가 미웠다. 그래서 아침밥을 먹으면 밖으로 나가 하루 종일 동네를 돌아다녔다. 그녀가 자주 가던 곳은 국민학교 운동장이었다. 그녀는 거기서 매일 달리기를 했다. 숨이 차도록 뛰었다. 오후 늦게 집으로 돌아오면 할머니가 이년아 어디 갔다 와, 하고 구박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식은 밥을 퍼서 고추장에 밥을 비벼 먹었다. 그러면서 결심했다. 중학교를 보내주지 않으면 집을 나가겠다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반대를 했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중학교에 보내주었다. 언니가 쓰던 낡은 가방을 들고 그녀는 학교에 갔다.

그녀가 열여섯살이었을 때 자리보전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영어 수업시간에 교감선생님이 그녀를 복도로 부르더니 말했다. 가방 싸서 나오너라, 하고. 그녀는 단박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돌아가셨어요? 하고 물으니 교감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뒷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가방을 쌌다. 가방을 싸면서 다시는 교실로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예감에 사로잡혔고, 그래서 그녀는 짝에게 아끼던 연필을 주었다. 학교 정문을 나서자마자 그녀는 뛰었다. 읍내 종묘상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까지 뛰었다. 버스 시간을 보니 한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뛰었다. 숨이 가팠고, 그녀는 심장이 아픈 게 슬픈 것보다 낫다는 생각을 했다. 미용실 간판에 새로 페인트칠을 하는 사람이 보였다. 그녀는 달리면서 페인트칠을 하는 남자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뛰지 않으면 진짜로 사다리를 발로 찰 것 같아 그녀는 더 빨리 뛰었다. 읍내를 통과하고, 작은아버지네가 사는 윗마을을 통과하고, 윗마을과 아랫마을 사이에 있는 저수지의 제방 위를 통과했다. 언덕길에서 한 아주머니가 냉이를 캐고 있었다. 명희 어디 가니? 아주머니가 그녀에게 물었다. 평소 같으면 저는 명수예요, 하고 쏘아붙였겠지만 그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 뛰었다. 아버지가 떨어진 다리를 지나가면서 침을 뱉었다. 술 취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낫을 휘둘렀던 집을 지나면서 그녀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도 뛸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길이어서 그녀는 눈을 감고 뛰었다. 그러다 발을 헛디뎌 논두렁 쪽으로 넘어졌다. 발목이 시큰거렸다. 장례식 내내 그녀는 쩔뚝거리며 걸었고, 그후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그녀는 뛰지 않았다. 십여년이 지난 뒤, 남편의 사고 소식을 듣고 응급실로 달려갈 때까지.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형민은 어머니가 뛰어갔던 그 길을 뛰었다. 자기가 지나간 길이 아버지가 사고를 당한 장소라는 것을 모른 채. 어머니가 슬리퍼가 벗겨진 줄도 모르고 맨발로 달렸던 길이라는 것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