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 정치적 행동이 필요하다

백영경
백영경

백영경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이제야 정신이 들었나보다. 그동안 봐야지 벼르던 전시를 막 내리기 직전에 보았다. 「Dear Amazon: 인류세 2019」(일민미술관 2019.5.31~8.25)는 비서구권 중 인류세 논의가 가장 활발하다는 브라질에서 활동하는 젊은 예술가들의 작업을 중심으로 꾸려졌고 한국의 예술가와 환경운동가들도 참여했다. 세계의 허파로 불리는 아마존, 그 이름만 들어도 떠올리게 되는 생태 위기를 직접 묘사한 작품도 있지만 전시의 의도가 단순한 고발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그보다는 인간의 반복된 행동이 환경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세계 속에서 인간이라는 동물의 위치는 어디인지, 다양한 비인간 종들과 어떻게 공존하고 살아가야 하는지 등을 생각해보라고 주문한다.

 

인류세라는 주제에 압도되어 전시장에 들어섰지만, 찬찬히 볼수록 소소한 재미도 있다. 브라질 하면 흔히 떠올리는 풍부한 천연자원, 즉 광물을 주인공으로 한 영상 「기이한 광물이야기」는 광물의 발견과 채굴, 이용의 역사뿐만 아니라 광석이라는 물질 자체가 다양한 매체 속에서 어떻게 상상되고 재현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크립토나이트라는 광석에 가까이 가면 힘이 빠지는 슈퍼맨의 고향 크립톤 행성은 자원개발로 황폐화되었다고 하면서도, 지구별 인간들은 20세기 중반부터 우주를 개발하려는 노력을 지치지 않고 이어오는 중이다. 한편 강에서 갓 낚아 올린 물고기를 가만히 안고 다독거리며 예의를 다하는 원주민들을 담은 작품도 있었다. 생존을 위해 다른 생명에 빚지고 살 수밖에 없으되 그 희생을 기억하고자 하는 그들의 품위도 인상적이었지만, 사실 더 눈에 띈 것은 그 큰 물고기를 펄떡거리지 못하게 제어하고 있는 팔뚝의 힘이었다. 이 물고기를 꼭 잡아야 내가 산다는 비장함도, 잡힌 물고기를 대하는 고요한 의례의 시간도 TV 속 ‘도시어부’에게는 없는 것이다.

 

사실 전시의 개별 작품보다 흥미로운 건 한국사회에서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용어가 확산되어가는 방식과 속도일지 모른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상승하는 것보다 인류세 담론 관련 행사가 증가하는 속도가 훨씬 더 빠른 것 같다고 말한 학자도 있었지만, 한국사회에서도 여러 매체가 연이어 다루면서 인류세라는 용어가 더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다. 인류세는 “지구의 역사에서 인간이 자연환경에 미친 영향력과 자취가 그 어느 때보다 커진 지질시대”를 가리키는 용어로, 2000년 네덜란드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Paul Crutzen)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약 1만년 전쯤 빙하기가 끝나면서 시작된 홀로세(Holocene)가 끝나고, 현생인류의 활동의 결과로 인류세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 지구에 남긴 흔적들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인간은 농업이나 건설을 통해 엄청난 퇴적층을 유실시켰는데 이는 바다, 바람, 강 등 자연이 가진 침식력의 10배 이상이었다. 온실가스에 의한 지구온난화로 야기된 기후변화는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종(種)의 멸종을 가속화한다. 또한 전반적인 기온 상승으로 전염병과 산불이 증가하고, 북극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올라가는 중이다. 해양의 산성화로 해양 생태계가 붕괴되는 한편 강물을 포함한 담수가 부족해지고 있다. 무엇 하나 긍정적으로 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인류세라는 용어 자체는 현생 인류의 활동이 지구 상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시대라는 뜻이지만, 그것이 종말론적인 의미로 들리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올여름 더위가 작년보다는 견딜 만했다고 하지만, 사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연근해에서 잡히는 어종부터 내륙에서 재배되는 작물에 이르기까지 이미 한반도에서도 기후 변화의 영향이 심각하다. 그뿐만 아니라 미세먼지와 방사능, 녹조로 가득 찬 강물, 미세플라스틱과 쓰레기 문제까지 우리의 삶이 지속가능할 수 없음을 알리는 신호는 이미 차고 넘친다. 처음 등장했을 때는 ‘4차산업혁명 시대’처럼 자의적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유행어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인류세’가 대중적으로 확산되고 학계에서도 점차 영향력을 키워가는 데는 이렇듯 먹고 입고 버리고 싸는 인간 일상의 모든 행위가 지구적 재앙에 기여한다는 실감에 힘입은 것일 터이다.

 

그런데 인류세 담론이 현 문명의 위기에 경종을 울리는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점도 있다. 일단 인류세라는 위기의 시대를 만든 책임의 정도가 모든 인류에게 똑같지 않다는 사실을 잘 지적하지 않는다. 자연을 자원 취급하면서 파헤쳐 이용하고 화석연료를 엄청난 규모로 소비하는 행위는 여전히 문명이라고 일컬어지며, 더 많은 석유와 천연가스를 이용하고 광물을 채취하기 위한 개발행위에 저항하는 세계 곳곳의 원주민들은 아직도 미발전 상태의 삶을 사는 사람으로 무시된다. 1조그루의 나무를 심으면 기후 변화를 막을 수 있다는 연구가 있었다지만, 브라질 정부는 지금도 아마존 우림 지역에 새로운 개발 허가를 내주고 있고, 바로 지난 7월에는 원주민 지도자가 금광을 개발하려는 광부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세계경제가 불안해서 세계 금 가격이 치솟는 중이라니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저항을 누르고 개발을 강행하려는 움직임은 거세지면 더 거세졌지 약화될 것 같지 않다.

 

북미 대륙에서도 동남아에서도 자원 채굴이나 개발을 강행하려는 세력들과 거기에 대한 저항 소식이 들려오긴 하지만, 사실 그렇게 멀리까지 갈 것도 없다. 제주, 밀양, 성주 소성리, 4대강 사업으로 농사짓다가 쫓겨난 사람들까지, 한국 안에서도 주민을 밀어내고 상전벽해를 만들어내는 바람은 여전히 드세니까 말이다. 사실 막연하게 인류세를 성찰한다고 하면 근사하게 들리지만 내 집 앞, 내 고장의 개발 문제가 되면 이해관계가 얽혀서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런 구체적인 상황 인식과 정치적인 해결책 모색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인류세 담론은 결국 한때 그럴듯했던 논의에 그치고 말 것이다. 사실 파고 들어가면 한반도 평화와 노동문제까지 안 걸리는 것이 없는 게 바로 환경 문제이기도 하다. 제주 강정을 들락거리는 핵잠수함의 문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계속 확장되고 있는 군사시설의 문제를 보면 한반도에서 인류세의 문제는 평화의 문제이기도 하니 말이다.

 

백영경 /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인류학

2019.8.21.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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