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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2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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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일에는 출근해서 종일 보도자료를 썼다. 보도자료는 새로운 책이 세상으로 나갈 때 혼자서 외롭지 않도록 힘을 실어주는 추천서와 같았다. 세상의 다른 많은 책들과 구별되는 이 책만의 특성을 독자들이 정확히 알 수 있도록 핵심을 콕콕 집어 설명해주어야 했다.

   나는 선배들이 쓴 보도자료를 참고하면서 위에서부터 서식을 채워나갔다. 지난 목요일의 만남이 남긴 인상 때문에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더 멋진 홍보 글귀를 만들어내는 데 열중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다 쓰고 나서 읽어보니, 보도자료 속 황인수 선생의 책은 굉장히 흥미롭고 중대한 내용을 다룬, 읽는 이의 인생을 바꿀 만한 책처럼 보였다. 문득 취직하기 전 뒤표지의 카피를 보고 산 책이 기대와 다를 때, 다시 한번 뒤표지의 호들갑스러운 찬탄의 말을 읽으며 진심인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하고 눈살을 찌푸렸던 일이 머리를 스쳤다. 이 책을 구입해서 막 읽기 시작한 누군가의 찌푸린 미간이 눈앞에 떠오르는 것 같았다.

   누가 죽거나 다치는 일은 아니다. 나는 애써 하나 언니의 말을 떠올렸다. 하지만 가슴께에 먹구름이 가득 몰려든 것처럼 마음이 자꾸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크리스마스 전날, 인쇄소에서 책이 배달되었다. 그리고 몇몇 일간지의 신간 소개 코너에 작게 기사가 실렸다. 기사 속에는 내가 쓴 보도자료 속 문장들이 인쇄되어 있었다.

 

 

 

2장

 

 

   새해는 시작부터 아슬아슬했다. 3일 월요일 아침, 나는 시무식 직전에 회사에 도착했다. 어찌 된 일인지 마을버스가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마침내 나타난 버스에 사람들이 올라타며 한마디씩 항의하자, 기사는 매 정거장 이 일을 겪고 있는 듯 “예, 제가 욕을 많이 먹어서 아침부터 아주 배가 부릅니다”라고 느긋하게 말했다.

   계단을 뛰어올라가 회의실로 들어갔다. 물류센터의 서고 관리 직원들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 편집부 선배들 사이에 앉은 모르는 얼굴의 여성이 눈에 띄었다.

   시무식이 끝나고 편집실로 들어가자, 선배들이 정수기 옆 공간에서 그 사람을 둘러싸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보고는 다가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김영인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네요.”

   “아, 영인 선배!”

   그녀는 바로 출산휴가 삼개월과 육아휴직 삼개월을 마치고 복직한 영인 선배였다. 인사를 나누는데, 흰머리가 드문드문 섞인 정수리에 눈길이 갔다. 손질하지 않은 검은색 머리였는데, 턱선 언저리부터 아래는 밝은 갈색이었다. 출산하고 아직 염색을 못했나보구나, 나는 생각했다.

   선배들은 그녀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정어머니가 서울에 올라와 당분간 함께 생활하시기로 했고, 아기를 어린이집에 맡길지 씨터를 고용할지 고민 중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곧바로 편집부 전체 회의가 있었다. 부장님은 새해 아침에 걸맞지 않게 초조해 보였다. 연말에 갑자기 끼어든 총서가 문젯거리였다. 한 대학의 인문한국사업단이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하는 사업의 결과물인데, 일단 올해 상반기에 두권의 책이 나와야 하는 모양이었다. 말하자면 사업단에서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야 출판사를 수소문한 것인데, 그곳에 속한 교수 중 여러명이 회사의 저자, 그것도 중요한 저자였다. 결국 부장님과 실장님이 각각 한권씩 책임을 맡고, 실무 역할을 할 사람이 한명씩 배정되었다. 나는 부장님을 도와 총서의 1권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이거.”

   부장님이 말했다.

   “대표님 통해서 새로 들어온 원고인데, 지향씨가 한번 볼래? 대표님이 훑어보셨는데 아주 좋다고 기대가 크시던데.”

   그가 노란색 집게로 물린 두툼한 원고를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 첫 장의 가운데에 ‘말과 민주주의’라는 가제가, 그 아래 방명원이라는 저자의 이름이 작게 쓰여 있었다.

   “끝에 한 챕터만 빠져 있는데 그것도 며칠 안으로 준다고 하시거든. 그동안 먼저 읽고 검토서를 써봐.”

   회의가 끝나고, 나는 원고를 책상 위에 반듯하게 올려놓은 다음 화장실에 갔다. 손을 깨끗하게 씻고 주말에 새로 산 씨트러스 향 핸드크림을 바르고 나서 원고 읽기를 시작할 생각이었다.

   편집실 옆 여자화장실에는 칸이 두개뿐이었다. 한쪽 문이 잠겨 있어서 옆 칸으로 들어갔는데, 볼일을 보고 옷매무새를 다듬는 동안 벽 너머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쉬익쉬익 하는 규칙적인 기계 소리였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 동안에도 반복적인 기계 소리만 새어나올 뿐 다른 인기척이 없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나는 문 앞으로 한걸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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