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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23회

강차장은 어릴 적에 문방구에서 물건을 훔쳤다는 누명을 쓴 적이 있었다. 아니라고 말해도 문방구 사장은 믿어주지 않았다. 심지어 부모님과 누나들도. 문방구 사장이 집으로 찾아오자 부모님은 아들의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그게 섭섭해서 강차장은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 훔친 장난감을 밭에 파묻었다고. 그랬더니 아버지가 아들의 등짝을 때리며 말했다. 당장 가서 찾아와! 못 찾으면 집에 올 생각도 하지 마. 그날, 강정구는 일부러 밭에 심은 무를 뽑아 버렸다. 무는 아직 자라지 않아서 엄지손가락만했다. 무를 뽑으면서 작년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했다. 할머니라면 무조건 믿어줬을 텐데. 할머니 생각을 하자 눈물이 날 것만 같았고 그래서 강차장은 울지 않기 위해 뽑은 무를 발로 짓밟았다. 애당초 찾을 장난감이 없었기 때문에 집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나이가 400년이 넘었다는 마을 수호수인 나무 아래에서 개미들을 구경하다가 비가 와서 당집으로 비를 피하러 갔는데, 거기서 깜빡 잠이 들었다. 당집에서 잠이 들었기 때문인지 기괴하게 생긴 귀신들이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악몽을 꾸었다. 소리를 지른 뒤 눈을 떠보니 어머니가 가슴을 토닥이며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해주었다. 아내와 딸이 캐나다로 떠난 뒤, 주말 오후에 낮잠을 자다가 강차장은 그때 그 꿈이 생각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꿈이 아니라 괜찮다며 토닥여주던 엄마의 손길이. “그래서 여기로 내려온 건 아니야.” 강차장이 형민에게 말했다. 매형의 생일이라 오래간만에 고향에 사는 큰누나네 들렸다가, 누나에게 아직도 당집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일년에 한번씩 제를 지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강차장은 산책도 할 겸 당집을 찾아 나섰다. 길을 잘못 들었는데 그 바람에 문이 열린 양조장을 보았다. 오래전에 문을 닫은 양조장이었다. 양조장 아들은 강차장과 동창이었는데, 반에서 공부를 가장 잘했다. 그 아들이 대학에 합격했을 때 양조장 아저씨는 동네잔치를 했다. 졸업 후 은행에 입사를 했을 때도, 같은 회사의 대리와 연애를 해서 결혼을 했을 때도, 마을 사람들은 실컷 막걸리를 마셨다. 동창들 중에 가장 먼저 결혼해서 결혼식장 분위기는 동창회를 하는 듯했다. 그후, 십여년이 지난 뒤 장례식 때 찾아온 동창들은 몇명 되지 않았다. 죽은 친구가 주식으로 큰돈을 잃고 나중에 회사 돈에까지 손을 대서 잘렸다는 이야기가 술자리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꽤 많은 친구들이 돈을 불려주겠다는 말에 투자를 했다가 돈을 날렸다고 했다. 아들을 잃은 양조장 아저씨는 술은 안 만들고 술만 마시더니 알코올중독으로 죽었다. 혼자 남은 양조장 아주머니는 양조장 문을 닫고 딸네 집으로 떠났다. 그런 양조장이 열려 있다니. 강차장은 열린 양조장 문을 두드려보았다. 계세요. 그러자 안에서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어이, 정구. 남자가 강차장의 이름을 불렀다. 누구? 강차장이 물었다. 나야. 나. 문방구. 남자가 말했다. “문방구 집 둘째 아들이었는데 오래간만에 봐도 얼굴을 알아보겠더라고. 그 녀석이 어찌된 일인지 양조장을 인수받아 술을 빚고 있더라고. 그날 막걸리를 얻어 마셨는데. 그게 참 맛있더라. 그래서 문방구를 인수했지.” 그게 무슨 말이냐고 형민이 되물었더니 자고 일어나면 알 수 있을 거라고 강차장이 말했다. 그러면서 꽃무늬가 새겨진 이부자리를 깔아주었다. “바지까지 이런 걸 주고 이불까지 꽃무늬라니.” 형민이 양복바지를 벗고 빨간색 꽃이 새겨진 수면바지로 갈아입으면서 투덜거렸다. “나이 들어서 그래. 너도 몇년 지나봐.” 강차장이 자리에 누웠다. “불 꺼요?” 형민이 묻자 강차장이 그냥 두라고 했다. 불을 켠 채 잠을 자게 된 지 몇년이 되었다고. 형민은 눈을 감았다. 형광등 불빛 때문에 눈이 부셨다. 몸을 왼쪽으로 돌렸더니 강차장의 등이 보였다. 뒤통수가 납작해 보였다. 다시 오른쪽으로 돌려 미닫이문을 바라보았다. 미닫이문을 열면 바로 문방구로 연결되는 구조였다. 형민은 문을 열어놓고 손님이 올 때까지 낮잠을 자는 강차장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아이들이 물건을 훔쳐도 모를 정도로 낮잠을 자는 강차장. 사표를 내는 강차장에게 이제 뭐 할 거냐고 물었을 때 강차장은 형민에게 그렇게 말했다. 당분간 낮잠을 좀 실컷 자야겠어,라고.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강차장은 어떤 해명도 하지 않고 사표를 냈다. 동료들은 두 편으로 나뉘었다. 아들이 죽었는데 그 정도는 봐줘야 하지 않느냐는 사람들과 그러기엔 일년은 너무 길었다고 말하는 사람들. 형민은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 어느 날, 만취한 강차장을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이런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구내식당 반찬이 맛이 없는 것도, 일도 못하면서 따지기만 하는 신입 직원들도, 얍삽한 한부장의 얼굴을 매일 봐야 하는 것도, 참을 수 없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나쁜 공기 때문에 화가 난다고. 마스크를 쓰고 걷는 사람만 봐도 미칠 듯이 화가 난다고. 강차장이 사표를 낸 뒤 형민은 차장으로 승진을 했다. “강차장님?” 형민은 나지막이 불러보았다. “왜?” 한참 후에 강차장이 답했다. 형민은 잠을 자다 말고 중간에 일어나 오줌을 누는 버릇이 있었다. 과음을 하면 자다 말고 두번씩 화장실을 가기도 했다. “화장실은 어디 있어요?” 형민이 물었다. 강차장이 문방구 밖으로 나가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있다고 말했다. 강차장이 하품을 하더니 이내 숨소리가 들렸다. 강차장의 숨소리를 듣고 있자니 쌔근쌔근이라는 단어가 절로 생각났다. 쌔근쌔근. 숨소리에 맞춰 형민도 숨을 내쉬었다 들이쉬었다. 그러다보니 저절로 잠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