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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24회

눈을 떠보니 열한시가 넘어 있었다. 형민이 미닫이문을 열고 문방구 카운터 쪽으로 고개를 내밀자 강차장이 배고파? 하고 물었다. 냉장고에서 달걀 하나를 꺼내 프라이를 하면서 강차장이 말했다. “이따 맛있는 거 해줄게. 지금은 간단히.” 형민은 들기름과 간장을 넣은 달걀비빔밥을 한 손으로 들고 문방구를 돌아다니면서 먹었다. 혼자 살게 되면서 형민은 종종 서서 밥을 먹었다. 김치찌개나 된장찌개에 밥을 말아서 거실을 빙글빙글 돌면서 먹다보니 이십년을 넘게 앓아왔던 위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강차장이 방앗간에서 직접 짠 들기름이라고 자랑을 했다. “맛있어요. 그런데 장사는 잘돼요?” 형민이 묻자 강차장이 무심히 대답했다. “작년에 문 닫았어, 초등학교가.” 폐교 앞에 있는 문방구라니. 형민은 먹던 밥이 목에 걸려 기침을 했다. 강차장이 다가와 등을 두드려주었다. “뭘 놀라. 폐교 전에도 학생이 열명밖에 없었는데.” 학생이 열명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강차장은 아침마다 문방구 앞에 서서 학생들의 등교를 구경했다.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며 하이파이브를 하다보면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십대 시절 강차장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등교하는 아이들을 보니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이 치기 어리게 느껴졌다. 선생님은 될 수 없겠지만 뒤늦게 공부를 하고 싶은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형민은 밥을 먹고 설거지를 했다. 젖은 손을 꽃무늬바지에 닦았다. 화장실을 가려고 밖으로 나왔다가 교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교문이 열려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명의 아이들은 어디로 전학을 갔을까? 새 교실에서 새 친구들과 잘 지내고 있을까? 형민은 철봉에 매달렸다. 팔에 힘을 주고 턱이 막대에 닿을 때까지 몸을 끌어올려보았다. 겨우 두개. 그런데 이 운동 이름이 뭐더라.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형민은 철봉에 매달려 두 다리를 흔들었다. 분명 세 글자인데. 세 글자인데. 형민은 철봉에서 내려 손바닥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녹슨 쇠 냄새를 맡으니 옛집 마당에 버려진 역기가 생각났다. 세를 살던 남자 중 한 사람이 가져다 놓은 것이었는데, 그가 이사를 간 뒤 마당 한쪽에 버려졌다. 비를 맞고 눈을 맞고, 역기는 녹슬어갔다. 문방구에 와보니 강차장은 보이지 않았다. 형민은 크레파스와 도화지를 꺼내 책상에 앉았다. 오래된 나무 책상은 서랍이 뒤틀려 조금씩 열려 있었다. 책상 위에는 계산기가 놓여 있었는데, 장사도 안 되는 가게에 계산기가 무슨 소용인가 싶어 형민은 웃었다. 그리고 1부터 10까지 숫자를 더해 55를 만든 다음 다시 0이 될 때까지 빼기를 했다. 형민은 파란색 크레파스를 들고 도화지 위에 구름을 그렸다가, 구름의 모양을 보고는 자신의 상상력이 별 것 없다는 생각에 실망했다. 형민은 다시 문방구를 둘러보았다. 도라에몽 색칠공부가 있었다. 다시 책상에 앉아 파란색으로 도라에몽의 옷을 칠했다. 가슴의 주머니가 무슨 색이었는지 떠올려보았는데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노란색으로 칠했다. 그랬더니 반달로 보였다. 진짜 반달처럼 보이도록 그는 도화지를 왼쪽으로 기울였다. 도라에몽이 반달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반달을 보면 배가 고파요. 초승달을 보면 웃고 싶어요. 딸이 쓴 동시가 생각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그 시를 써서 딸은 상을 받았다. 도라에몽 색칠을 끝내고 문방구 앞을 나가보니 저 멀리서 강차장이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형민은 손을 흔들었다. 그랬더니 강차장이 손을 흔들었다. 두부가 굳는 걸 기다렸다가 사오는 바람에 늦어졌다며 강차장은 두부가 담긴 봉지를 형민에게 내밀었다. 따뜻했다. “신 김치에 싸 먹으면 술이 술술이지.” 강차장이 말했다. “술이 술술이지.” 형민이 그 말을 따라했다.

강차장을 도둑으로 몰았던 문방구 사장은 뒷마당에 놓을 평상을 만들다가 못이 박힌 나무를 발로 밟았다. 그리고 다음 날 감기에 걸린 것 같다며 자리에 누웠는데 사흘을 앓다 허망하게 죽었다. 그 소식을 들은 강차장은 울었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개미들을 죽여가며 자기를 의심한 문방구 사장을 저주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강차장은 같은 반이었던 문방구집 둘째 아들을 보면 죄책감이 들었고, 여럿이 어울릴 때가 아니면 같은 자리에 있기를 피했다. “그런데 말이야. 그때 그 장난감을 훔친 사람이 자기라고 하더라고. 그 녀석이.” 강차장이 형민에게 막걸리를 따라주면서 말했다. 술을 한모금 마신 뒤 형민은 신 김치에 두부를 싸서 먹었다. “음, 좋네요.” 형민이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어머니가 문방구를 계속했는데 한 십년 전인가 부산에 사는 큰형이 모시고 갔다나봐. 세 남매의 추억이 있는 곳이라 문방구는 팔지 않고 세를 주었고.” 세 들어 사는 사람이 장사를 그만두겠다는 바람에 문방구집 둘째 아들이 형 대신 고향에 내려왔다. 세를 받지 않는 대신 문방구를 계속 유지해줄 사람을 찾고 싶었는데 부동산에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폐교가 될 거라는 소문이 돈다는 것이었다. 부동산에 나와 문방구로 가보니 문이 닫혀 있었다. 그래서 문방구 앞에 있는 오락기 앞에 앉았다. 쪼그리고 앉아서 오락을 하다보니 이참에 고향에 내려와 문방구나 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방구 뒤에 텃밭도 있어서 농사를 지으면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전이 삼백원뿐이라 세판밖에 하지 못했다. 게임을 마치고 세입자에게 전화를 거니 저녁이 되어서야 가게로 돌아올 수 있을 거란 말을 들었다. 시간도 남고 해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 산소를 찾아갔다. “그런데 말이야. 아무리 해도 지 아버지 산소를 찾지 못했나봐. 이 산소에 가서 절을 하면 저 산소 같고. 저 산소에서 절을 하면 이 산소 같고. 그래서 할 수 없이 보이는 산소마다 다 절을 했는데.” 강차장이 술을 한모금 마시고 다시 말을 이었다. “바보 같은 놈이지? 그래서 생각했대. 부모님의 문방구를 이어받을 자격이 자기에겐 없다고. 그래서 문을 닫게 하자고.” 형민은 강차장의 잔에 술을 따랐다. 문방구 앞에서 파라솔 테이블과 의자를 펼쳐놓고 술을 마시다보니 이런 휴가라면 일주일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민이 중학생 때인가 고등학생 때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 산소를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어머니도 아버지 산소를 한번에 찾지 못했다. 호미를 들고 할머니 한분이 지나갔다. 강차장이 잔에 막걸리를 따라 한잔을 건네주었다. “무릎 아파. 쉬엄쉬엄.” 그러고는 두부를 김치에 말아 할머니 입에 넣어 드렸다. “형우네 두부구만. 이 집이 최고지.” 할머니가 말했다. “막걸리 칭찬도 좀 해요. 이만하면 맛있다고.” 강차장이 말하자 할머니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멀었다고, 옛날 그 맛을 따라가려면 더 있어야 한다고,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다 형민은 문득 한 단어가 떠올랐다. 턱걸이. 맞아. 그 운동은 턱걸이였어. 나는 턱걸이를 두개 밖에 못하는 남자가 되었어. 형민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