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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25회

“산소를 못 찾아 문방구를 닫았다는 건 알겠는데, 그거랑 술이 무슨 상관이래요?” 형민이 강차장에게 물었다. “그니까. 더 들어봐. 그날 그 녀석이 절을 한 묘가 무려 스물한기였대. 마흔두번 절을 하면서 녀석은 생각했대. 그중에서 살아생전 얼굴을 봤던 사람은 몇명이나 될까, 하고.” 기억나는 사람은 동네를 돌아다니며 남의 집 대문마다 침을 뱉던 치매 걸린 이웃집 할머니뿐이었다. 할머니는 꽃상여를 타고 갔다. 문방구집 둘째 아들은 꽃상여에 달린 종이꽃들을 보고는 제사에 올리는 요강사탕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가 치매에 걸리기 전에는 동네 아이들에게 요강사탕을 자주 나눠주었는데, 그는 요강사탕을 먹을 때면 꼭 바닥에 침을 뱉었다. 빨간색 침을 뱉으면 외계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고, 그럴 때면 친구들을 보며 저런 바보 같은 지구인 하며 비웃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절한 산소 중에 그 할머니가 누워 있을 거란 생각을 하자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약간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산을 하다 낙엽을 잘못 밟아 미끄러졌다. 발목을 살짝 삐끗해 걸을 때마다 욱신거렸다. 나뭇가지를 잘라 지팡이를 만들었는데, 그만 지팡이가 부러지는 바람에 산비탈을 구르는 사고를 당했다. “넘어지면서 가장 먼저 생각한 건 휴대폰이었대. 왜, 영화를 보면 꼭 그런 순간에 배터리가 없잖아.” 하지만 다행히 배터리도 구조를 요청할 만큼 있었고, 산속이었지만 통화도 잘되었다. 춥지는 않았지만 그는 두 팔을 양쪽 겨드랑이에 끼웠다. 산속에 고립되면 그렇게 해야 체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겨드랑이에 손을 끼우자 그제야 추위가 느껴졌다. 그는 만약 휴대폰 배터리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해보았다. 자신이 산소를 찾아 나선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약수터가 있는 산도 아니니 등산객이 올 리 없을 테고, 추석 때도 아니니 산소를 찾으러 올 자손들도 없을 것이다. 그는 기어서 산을 내려갈 것이고, 그러다 길을 잃을 것이고, 또 그러다 저체온증으로 죽어갈 것이다. 그 모든 게 아버지 산소를 찾지 못한 불효자에게 내린 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다시 한번 119에 전화를 걸었다. 배터리는 48퍼센트가 남아 있었다.

물류창고에서 사고가 발생했을 때,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119에 전화를 걸어봤다. 후진을 하기 전 분명 지게차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사고를 낸 후배는 말했다. 아내의 출산을 며칠 앞두고 있었다. 쌍둥이라며 그래서 두배로 일해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말했다. 그 마음이 예뻐서 그는 삼겹살에 소주를 사주었다. 지게차에 치인 아르바이트생은 스물다섯살밖에 되지 않았다. 그 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했고, 직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회사에서는 병원비와 약간의 위로금만 주었다. 청년은 고소를 했고, 그는 사고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았다. 전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게차가 후진할 때 나는 음성안내가 들리지 않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르바이트생은 규정을 어기고 이어폰을 꽂고 있었으니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산속에 가만히 있다보니 다양한 동물들의 소리가 들렸다. 고요하다고 생각한 산속은 시끄러웠다.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까지 시끄럽게 들렸다. 그는 부러진 나뭇가지로 낙엽들을 긁어모아 조난을 당한 사람처럼 낙엽을 다리 위에 덮어보았다. “그러다가 땅속에 무엇인가가 파묻혀 있는 것이 보였대. 그게 뭔지 궁금해 그쪽으로 기어가서 땅을 파보았는데 글쎄 그게 막걸리병이었다나봐.” 그렇게 말하고 강차장이 막걸리병을 들었다 내려놓았다. “이거. 물론 디자인은 바뀌었지만.” 형민이 두부를 먹고 막걸리를 한모금 마셨다. 그러면서 술을 마시고 안주를 먹는 게 아니라 안주를 먹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근데 이상하게도 지금 마시고 있는 막걸리는 그게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실을 말했더니 강차장도 형민을 따라 안주를 먼저 먹고 술을 마셨다. 강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주 술 안주 술 안주 술, 이 말을 빨리해봐. 그러면 어느 게 먼저인지 알 수 없지.” 형민이 안주 술이란 단어를 연이어 중얼거려보였다. “그러니까 그 말은 빨리 마시면 안주가 먼저인지 술이 먼저인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해.” 강차장이 형민의 잔에 술을 따른 다음 건배를 했다. 문방구집 둘째 아들은 언제 묻혔는지 알 수 없는 막걸리병을 보자 어릴 적에 그 막걸리병을 찌그러트려 신발에 끼우고 놀던 것이 생각났다. 납작한 플라스틱 병을 신발에 묶고는 얼음판 위에서 스케이트 선수 흉내를 내곤 했던 것이다. “죽은 막걸리집 녀석이 그걸 잘 만들었지. 문방구집 둘째 녀석이 가장 빨랐고. 나는 늘 꼴찌. 암튼, 그래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녀석은 다리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하고 깁스를 풀 때까지 회사를 쉬었는데, 그때 밤마다 얼음을 지치던 어린 시절의 꿈을 꾸었대.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온 거래.” 강차장은 친구가 들려주었던 꿈 이야기를 형민에게 전부 말하지 않았다. 꿈속에서 자신은 절름발이가 되어 있었다고. 절뚝이며 스케이트를 타다 매번 넘어졌다고. 호미를 들고 지나가던 할머니가 검은 봉지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형민이 할머니에게 막걸리를 한잔 따라드렸다. 할머니가 검은 봉지에서 나물 한줌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겨울을 난 시금치. 이 놈 먹으면 다른 시금치는 짐짐해서 못 먹어.”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가 마신 잔을 마지막으로 막걸리가 바닥났다. 형민은 겨우 두병을 사왔냐고 투덜댔더니 강차장이 낮술이란 딱 한병씩만 마셔야 하는 법이라고 말했다. “2차는 이따 밤에. 설마 오늘 갈 건 아니지?” 형민은 저녁에 맛있는 거 만들어주면 하룻밤 더 자고 갈 수 있다고 대답했다. 토요일 밤이니까, 하고 중얼거렸다. 쌀쌀한 날씨에 밖에서 술을 마셨더니 방으로 들어오자 몸이 노곤노곤해졌다. 강차장과 형민은 낮잠을 잤다. 강차장은 꿈도 꾸지 않고 두시간을 내리 잤고, 형민은 계속해서 악몽을 꾸었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니 불쾌한 기억만 남아 있고 꿈의 내용은 떠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