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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27회

터미널 앞에는 해장국 가게가 두곳이 있었다. “맛은 둘 다 그냥 그래.” 강차장은 형민에게 가게를 고르라고 했다. 형민이 차이점을 물어보니 한 가게는 갓김치가 맛있고 다른 가게는 깍두기가 맛있다고 했다. “해장국은 깍두기죠.” 깍두기가 맛있다는 해장국 가게의 메뉴판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맛없으면 말해주세요.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아줌마가 되겠습니다.’ 홀에 있는 분도, 주방에 있는 분도, 모두 칠십은 넘어 보여서 형민은 웃었다. 강차장은 뼈다귀해장국을, 형민은 콩나물해장국을 주문했다. 형민은 깍두기를 숟가락으로 퍼서 뚝배기에 넣었다. 뜨거운 국에 깍두기를 담가서 무가 미지근해진 후 먹는 걸 좋아했다. 그렇게 먹으면 늙은이 같다며 아내는 질색했다. 해장국을 다 먹고 나니 깍두기 한개가 뚝배기 밑바닥에 남아 있었다. 형민은 그걸 마저 먹으려다 말았다. “문방구 앞에 있는 나무가 앵두나무야. 앵두 열리면 앵두주 담가줄게, 또 놀러와.” 강차장이 터미널 매점에서 요구르트 한병을 사주며 말했다. 앵두라니. 너무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단어였다. “올게요. 앵두가 열리면.” 형민이 얼른 대답했다. 다시 올 걸 생각하자 마음이 설렜다.

버스에 타자마자 형민은 요구르트를 마셨다. 앞자리에 앉은 아이가 제 엄마한테 쉬지 않고 질문을 해댔다. 엄마, 작은 삼촌도 온대? 할아버지는 혼자 어떻게 해? 그 나쁜 놈은 잡았어? 오늘 가면 할머니 얼굴은 볼 수 있어? 이야기를 들어보니 할머니가 아픈 듯했다. 형민은 의자 틈으로 병원에 입원한 할머니 병문안을 가는 어린 손자의 뒤통수를 보았다. 형민이 어렸을 때, 친척 모임에 가면 항상 형민의 뒤통수를 쓰다듬는 어른이 있었다. 아버지의 작은아버지인가 그랬는데, 늘 막걸리 냄새를 풍기던 노인이었다. 노인은 형민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쩜 니 아비랑 뒤통수가 똑같냐. 형민은 자신의 뒤통수를 한번 쓰다듬어보았다. 납작하지도 그렇다고 툭 튀어나오지도 않았다. 그냥 평범한 뒤통수였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아이가 오줌이 마렵다고 칭얼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이 엄마가 운전기사에게 다가가 뭐라 말을 했다. 그러자 운전기사가 큰 소리로 말했다. “오분 후 휴게소 도착입니다.” 그 말을 듣자 형민은 갑자기 배가 사르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휴게소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을 향해 뛰었다. 뛰면서 옆을 보니 아이도 엄마랑 뛰고 있었다. 하나, 둘, 하나, 둘. 형민은 속으로 구령을 붙여가며 아이와 발을 맞추어보았다.

설사를 하고 나와보니 화장실 앞 벤치에 앉아서 아이가 알감자를 먹고 있었다. 형민이 그 옆에 앉았다. 그랬더니 아이가 아저씨도 쌀 뻔했어요? 하고 물었다. 형민이 응, 하고 대답했다. “저도요. 아슬아슬했어요.” 형민이 화장실 쪽으로 뛰어오는 한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도 아슬아슬한가보다.” 아이가 웃었다. 그리고 알감자 하나를 형민에게 내밀었다. 형민이 받아먹었다. 아이의 할머니는 지난주 새벽 예배를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뺑소니 사고였다. “저번에는 할머니 얼굴도 못 봤어요.” 형민은 아이에게 할머니를 뵙게 되면 먼저 꼭 안아드리라고 말했다. “어른들은 그걸 잘 못하거든.” 아이가 그건 자기가 원래 잘하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마지막 알감자를 먹었다. 형민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하네, 하고. “진우야!” 아이의 엄마가 아이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형민이 아이를 쓰다듬던 손을 들었다. 아이의 엄마가 아이의 손을 잡고 버스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면서도 계속 한 손을 들고 있었다. 아이가 버스에 타는 것을 본 다음 형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스 쪽으로 걸어가는데 다시 배가 사르르 아파왔다. 기사에게 오분만 더 기다려 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곧 출발할 거라 안 된다고 했다. 형민은 버스에 한 발 올렸다가 다시 내려왔다. “전 못 가겠네요.” 형민이 말했다. 운전기사가 주유소가 있는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요. 저기 환승장에 표 파는 곳이 있어요.” 형민은 다시 화장실로 갔다. 그리고 오랫동안 변기에 앉아 있었다. 양쪽 옆 화장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를 세어보면서. 열한번째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 누군가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형민도 노크를 했다. “아빠, 거기 있어?” 어느 아이가 형민의 화장실 앞에 서서 물었다. “아닌데.” 형민이 말했다. 이내 옆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아이가 묻자 아니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후, 먼 곳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여기 있어.” 화장실을 나와 보니 아이가 어느 화장실 앞에 서 있었다. “안녕. 니가 문을 두드린 그 아이구나.” 아이를 본 게 반가워 형민은 인사를 했다. 아이가 입을 삐죽거리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두번 설사를 하고 나니 허기가 졌다. 호두과자와 커피 한잔을 사 들고 휴게소를 한바퀴 걸어보았다. 작은 동물원이라는 푯말이 보여 그쪽으로 걸어갔더니 동물은 없고 빈 우리만 보였다. 우리는 작고 지저분했다. 거기 동물이 없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원 맞은편에 동물 모양의 어린이 놀이기구가 있었다. 사슴 모양의 미끄럼틀. 여우가 그려진 시소. 오리와 하마 모양의 흔들의자. 코끼리 모양의 벤치도 있어서 형민은 거기에 앉았다. 거기 앉아 호두과자를 먹었다. 호두과자 한알에 커피 한모금. 그렇게 먹다 문득 새벽에 술을 마시다 강차장에게 화를 냈던 게 떠올랐다. 쉬운 공을 놓치는 사람은 양조장 친구가 아니라 강차장이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게 생각나 형민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강차장은 복권에 당첨된 누나 이야기를 해주었다. 셋째 누나는 늘 손님으로 북적이는 감자탕 가게를 운영했는데, 그런데도 살림은 나아지지가 않았다. 귀가 얇아 말도 안 되는 사업에 돈을 쏟아붓는 매형 때문이었다. 식구들이 모두 모인 어느 날, 강차장은 여덟개의 복권을 사서 네 누나와 매형에게 한장씩 선물로 주었다. 아무도 복권이 될 줄 몰랐기 때문에 그날 식구들은 복권에 당첨될 경우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이런저런 농담을 주고받았다. 셋째 매형은 동업을 하자는 친구가 있다며 거기에 투자할 거라고 했고, 셋째 누나는 아무한테도 말 안하고 이혼을 할 거라고 했다. 그때 매형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어. 당신 복권이 될 것 같아, 그러니 내거랑 바꾸자, 라고. 셋째 누나는 복권을 바꾸지 않았고, 거짓말처럼 복권에 당첨되었고, 그 돈의 반을 남편에게 주어 다시 한번 실패하는 걸 말없이 지켜보았고, 그리고 이혼을 했다. 누나는 기다린 거지. 마지막 기회까지 말아먹는 매형을. 강차장은 말했다. 누나가 이혼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했는데 막상 이혼하는 걸 보니 매형이 불쌍해졌다고. 그리고 매형을 불쌍하게 여기는 자신이 싫어졌다고. 큰누나는 이혼할 거면서 아깝게 사업자급을 왜 대주냐며 화를 냈고, 둘째 누나는 당첨금의 반을 남편에게 줄 게 아니라 복권을 사준 동생한테 주었어야 했다며 화를 냈고, 넷째 누나는 누가 당첨되든 다섯 남매가 나누었어야 했다며 화를 냈다. 그래도 모두들 이혼은 잘했다고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강차장이 말을 했다. 그러니까 걱정 하지 말라고. 문방구 문을 닫게 되면 자기는 감자탕 가게에 가서 일을 하면 된다고. 그래서 형민이 말했다. 강차장님, 그럼 가요. 거기 가서 일해요. 강차장이 그 말을 듣고 막걸리를 연거푸 두잔 마셨다. 그리고 형민에게 말했다. 인마, 강차장이라고 그만 불러. 이제 강사장이야. 문방구 아저씨라고 불러주면 더 좋고. 그 말이 어느 부분을 건드렸는지 형민은 갑자기 화가 났다. 소리를 지르며 다 마신 막걸리 병을 바닥에 던지기도 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다지 화날 일도 아닌데 왜 소리까지 질렀는지. 생각할수록 민망해서 형민은 호두과자 몇알을 빈 우리에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