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2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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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과 민주주의」 원고의 교정지가 나왔다.
   나는 아직 아무런 표시도 하지 않은, 접은 곳도 없고 볼펜 글씨 하나도 없는 교정지를 양손에 받쳐 들고 그 위에 수첩을 얹은 다음 회의실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긴 테이블 끝에 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편집실 책상마다 직통 전화가 있었지만, 통화가 길어질 것 같으면 회의실을 이용하는 게 권장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선배들을 관찰한 결과, 사람들이 듣지 않았으면 하는 대화가 예상될 때에도 이곳을 찾는 듯했다.
   수첩을 펼쳐 말해야 할 사항을 순서대로 적어놓은 목록을 훑어보았다. 저자인 방명원 선생과 몇번 메일을 주고받은 적은 있지만 전화를 거는 건 처음이었다. 통화 연결음이 네번 되풀이되었을 때 그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얼른 자기소개를 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푸른서재 편집부 문지향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그의 목소리가 대번에 밝아졌다. 다행히 내 목소리는 적당히 낮고 차분해서 신뢰감을 줄 만했다.
   나는 그에게 이제 교정지가 나와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다고 말했다. 교정은 총 세번 보게 되는데, 되도록 초교와 재교 때 집중적으로 수정하고 세번째 교정에서는 확인하는 느낌으로 봐달라고 설명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일 테니 절차를 세세히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그는 설명을 들으며 흡족해하는 듯했다. 일처리가 꼼꼼한 편집자를 만나 다행이라고 그가 여기기를 바랐다. 나는 과하지 않은 선에서 원고에 대한 호감과 열정을 표하고, 믿음직한 인상을 주기 위해 힘썼다. 우리는 되도록 5월을 넘기지 않고 책을 출간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나는 선배들의 통화를 들으며 기억해두었던 말을 써먹었다.
   “나머지는 진행하면서 차차 의논드릴게요.”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르겠습니다. 많이 조언해주세요.”
   그가 듣기 좋게 말했다. 통화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여기고 있을 때, 그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혹시, 제 원고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들으셨나요?”
   “대표님 통해서 들어왔다는 것만 들었어요.”
   “첫 책을 푸른서재에서 내고 싶다는 게 제 오랜 바람이었어요. 제가 학생 시절 길잡이 삼아 공부한 책들이 모두 푸른서재에서 나온 책들이었거든요. 하긴, 저뿐만은 아닐 거예요. 푸른서재에서 책을 내는 건 많은 학자들의 꿈이지요. 그런데 책을 쓰는 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고요. 작년 말에 겨우 완성이 되어가기에, 제가 대표님 전화번호를 수소문해서 전화를 드렸어요. 일면식도 없는 사이에 전화를 걸어서 이러저러한 원고를 썼다고 말씀드렸는데, 흔쾌히 보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의 목소리는 솔직하고 경쾌하면서도 겸손했다. 상대를 떠보려 하거나 우위를 점하려 하지 않는, 의뭉스러운 데가 없는 목소리였다. 난 언제나 경쾌한 사람들을 좋아했다. 괜히 폼을 잡는 사람들 치고 알맹이가 있는 이들을 본 적이 없었다.
   “선생님, 그 얘기 꼭 저자후기에 써주세요. 정말 감동적인데요? 저희 회사에도 기쁜 일이 될 거예요.”
   그는 반가워하며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통화를 마치고 나는 잠시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처음 책을 내는 저자와 신입 편집자의 조합이 기분 좋게 여겨졌다. 저자와 원고에 책임감을 느꼈고, 반드시 좋은 책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편집자로서 나의 이력에도 중대한 의미가 있는 책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2월 하순에는 파주에 눈이 많이 내렸다. 며칠간 내린 눈이 녹지 않고 쌓이면서 단단한 얼음으로 변했다. 신입 직원 면접이 있는 날에도 이른 아침부터 눈이 내려, 겨우 건물을 찾아온 지원자들은 현관에서 머리카락과 코트의 물기를 털고 있었다. 면접을 위해 부른 사람은 다섯명이라고 했다. 복도를 오가면서 그중 몇 사람과 마주쳤다. 저 사람이 될까? 저 사람일까? 자못 궁금했다.
   그날 저녁을 먹은 뒤 빈 그릇을 내놓으러 나갔다가 눈에 발이 빠지고 말았다. 사무실에 돌아와보니 털실내화 속 양말이 축축했다. 양말을 벗을까, 하다가 신고 있으면 마르겠지 생각하며 그대로 야근을 했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데, 발가락이 무척 간지러웠다. 집에 와서 양말을 벗고 들여다보니 오른쪽 발가락 세개가 벌레에 물린 것처럼 붉고 땡땡하게 부어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이튿날에는 따끔따끔한 통증까지 있어 검색해보니 놀랍게도 동상의 증상과 일치했다.
   동상이라니! 왠지 웃음이 터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