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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30회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형민은 거실 형광등을 늘 켜두었다. 퇴근길,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집까지 가는 동안 형민은 불이 켜진 집의 숫자를 속으로 세면서 걷는 걸 좋아했다. 그렇게 불 켜 진 집들을 헤아려보다가 맨 마지막으로 다동 404호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섯동으로 된 연립은 동 이름이 숫자가 아니고 가나다순으로 되어 있었다. 처음 부동산 중개업자가 보여준 집은 가동 501호였다. 그 집에는 거동하지 못하는 할아버지가 방에 누워 있었다. 손자로 보이는 청년이 방문을 열면서 할아버지 미안, 하고 말했다. 냄새가 나서 형민은 자기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코를 막았다. 형민이 계약하길 주저하자 부동산 업자는 다른 동에도 전세 물건이 하나 있다며 보여주었다. 그게 404호였다. 부동산 업자는 형민이 404호를 선택한 이유가 501호에 밴 환자 냄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을 열면 화장실이 왼쪽에 있는 구조가 형민에게 조금 더 안정적인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살았던 신혼집부터 지금까지 다섯번의 이사를 했는데 모두 문을 열면 화장실이 왼쪽에 있는 구조에서 살았다. 퇴근길에 다동을 올려다보면 504호는 늘 불이 꺼져 있었다. 형민이 일찍 오는 날도, 늦게 오는 날도. 불이 꺼져 있었기 때문에 형민은 새벽 다섯시면 쿵쿵거리는 윗집의 발소리에도 짜증을 내지 않았다. 지금 퇴근하는 걸까?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그런 생각을 잠깐 하다 다시 잠이 들곤 했다. 그랬는데, 어찌된 일인지 오늘은 504호에 불이 켜져 있었다.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가 이내 먼저 살던 사람이 이사를 가고 새 사람이 이사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실직을 했거나. 불 켜진 504호를 한참 올려다보다가 형민은 정작 자신의 집은 불이 꺼져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불을 끈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형민은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 헛기침을 한번 해보았다. 나 왔어, 하고 소리도 내보았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가 거실 등 스위치를 켰다. 켰다 껐다. 껐다 켰다. 반복해보아도 불은 켜지지 않았다. 이사 온 뒤로 한번도 등을 갈아본 적이 없었으니. 너도 명을 다할 때가 되었다. 형민은 거실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형민은 부엌 형광등을 켰다. 그러고 소파에 앉았는데 왠지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민은 얼른 텔레비전을 틀었다. 겨우 형광등 하나 때문에 쓸쓸한 감정에 사로잡혀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형민은 오래전 방영했던 예능프로그램을 틀었다. 멤버들이 서로의 집에 쓰레기봉투를 버리는 게임이었다. 지난 칠년간 같은 회차를 다섯번이나 보았는데도, 형민은 또 웃었다. 낄낄거리며 웃었다. 바보 같은 놈들, 하고 비웃으며 웃었다.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갔다가 가스레인지에 뚝배기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목요일 저녁에 끓여 먹고는 그냥 둔 된장찌개였다. 술집에서 안주로 먹다 남은 황태를 가져와서 육수를 낸 거라 맛있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쉰내가 났다. 아까웠다. 뚝배기를 씻으며, 뚝배기는 세제를 사용해서 설거지를 하면 안 된다는 아내의 잔소리를 떠올렸다. 형민은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뚝배기를 닦았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뚝배기는 미세하게 숨 쉬는 구멍이 있는데 거기로 세제가 스며든다는 거였다. 그 말이 맞는다면 쉰 된장찌개에서 나온 곰팡이도 스며들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형민은 뚝배기를 두번 닦았다. 설거지를 마치고 형민은 음식물 쓰레기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동호수를 입력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자 60그램이라는 안내 음이 들렸다. 한달에 백오십원에서 이백원. 그게 형민이 내는 음식물쓰레기 비용이었다. 일이 많던 어느 가을에는 팔십원이 나온 적도 있었다. 작년 여름에는 일부러 수박을 자주 사 먹었다. 수박 껍질을 버렸더니 사백삼십원이 나왔다. 이 집에 살면서 가장 많이 나온 거였다. 형민은 쓰레기통 옆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손을 씻고 라동 뒤쪽으로 걸어갔다. 거기는 남자들이 담배를 피우는 벤치가 있었다. 누군가 담배꽁초를 버릴 수 있는 깡통을 가져다 둔 뒤로 언제부터인가 연립에 사는 흡연자들은 모두 그곳에서 담배를 피웠다. 형민은 담배를 피우지는 않았지만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면 가끔 그 벤치에 앉아 담배 피우는 남자들을 구경하곤 했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나온 남자들. 잠옷을 입고 나온 남자들. 지난달에는 아내 몰래 친구에게 돈을 빌려 달라는 전화 통화를 하는 남편들을 두명이나 보았다.

벤치 쪽으로 가보니 할머니 두분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할머니들을 방해하는 게 아닌가 싶어 형민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랬더니 한 할머니가 말했다. “왜 여자들이 담배 피우는 게 보기 싫어?” 다른 할머니가 이어 말했다. “아님. 늙은이가 담배 피우는 게 싫어?” 형민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그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벤치로 다가가 맨 끝에 앉았다. 형민은 돌아가신 외할머니도 담배를 피우셨다고 말했다. 그것도 환갑이 되어서야 배웠다고. 자식들이 다 늙어서 뭐하는 짓이냐고 화를 냈을 때 형민의 외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무릎도 아프고 허리도 아파 움직이기도 힘들다고. 그러니 근사한 의자에 앉아서 창밖을 보며 담배나 피우며 늙어가고 싶다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자 두 할머니들이 고개를 끄떡였다. “근데 우린 창밖을 보며 피우진 못해. 손주 녀석한테 혼나.” “며느리한테도 구박받고.” 그 말을 듣고 형민도 고개를 끄떡였다. 한 할머니가 담뱃불을 끄고 꽁초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는 이내 새 담배를 꺼냈다. “보름달이라 그런가. 한대 더 피우고 싶네.” 할머니가 말했다. 다른 할머니가 다 피운 꽁초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말이야. 그 애는 왜 그랬을까?” 한 할머니가 말하자 다른 할머니가 그러게 말이야, 하고 대답했다. “한대 줘?” 한 할머니가 형민에게 담배 한개비를 주었다. 형민이 그걸 받아서 냄새를 맡아보았다. 형민이 담배를 들고만 있으니 다른 할머니가 말했다. “솔직히 말해. 안 피우지?” 형민이 그렇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금 더 들고 있으면 안 되겠느냐고, 그러면서 형민은 담배를 코끝에 대고 비벼보았다. “근데 그 아이는 왜 그랬을까?” 할머니 한분이 형민에게 물었다. 형민이 무슨 말인지 몰라 네? 하고 되물었다. “저기. 나동 옥상에서 뛰어내린 아이 말이야.” 아이가 뛰어내렸다니. 형민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래서요. 많이 다쳤어요?” 형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머니 둘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형민은 알아들었다. “그랬군요. 그랬군요.” 형민은 할머니들에게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이가 뛰어내리는 것을 처음 목격한 사람은 택배 배달을 하던 아저씨였다. 나동 3, 4호 라인 배달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이었다고. 할머니들은 말했다. 구급차에 실려 갈 때만 해도 아이는 살아 있었다고. “근데 그 아이는 왜 그랬을까?” 할머니들은 같은 말을 묻고 또 물었다. 그러다 한 할머니가 형민에게 담배를 도로 달라고 했다. “내놔. 한대 더 피워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