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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30회

   동상이란 뭐랄까, 고전소설 속 여러 청년 주인공들을 스러지게 했던 폐결핵처럼, 이제는 현실보다 책에 더 어울리는 병 같았다. 내가 동상에 걸리다니. 그때 문득 이런 시대에 책을 만드는─그것도 도서관 깊숙한 서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학술서 코너에 꽂히는 책을 주로 만드는─나 같은 사람이 걸리기에 안성맞춤인 병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자 기분이 유쾌해졌다.
   “저 동상 걸렸어요!”
   점심시간, 나는 원탁에 편의점 도시락을 내려놓으며 씩 웃었다.
   “정말이에요? 지향씨, 괜찮아요?”
   다들 깜짝 놀라 쳐다보았지만, 나는 올해의 우수 직원상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굴었다. 파주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라는 것도 나를 즐겁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였다.
   그날도 야근을 한 다음 아홉시가 다 되어 집에 돌아갔다.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고, 하나뿐인 의자를 욕실 문턱 앞까지 끌어왔다. 발을 담그고 앉아 멍하니 방 안을 둘러봤다. 아직 커튼을 달지 못해 한쪽 벽의 절반을 차지하는 커다란 창문의 테두리가 볼품없이 드러나 있었다. 그 아래 책상에는 책 무더기가 쌓여 있었고, 그 속에서 새해에 야심차게 구입했던 『점심시간이 기다려지는 101가지 도시락 반찬』의 귀퉁이가 보였다. 꽈리고추가 들어간 멸치볶음을 만든 뒤로는 그 책을 펼쳐본 적이 없었다. 나는 매일 아침 버스를 타기 전에 정류장 앞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가고 있었다. 음식이라기보다는 음식을 흉내 낸 모조품처럼 느껴지는 맵고 짠 반찬들을 허겁지겁 먹고 나면 어김없이 조금쯤 우울해졌고 속이 더부룩했다.
   갑자기 대야에 발을 담그고 있는 모습이 궁상맞고 서글프게 느껴졌다. 나는 대야의 물을 쏟아버리고, 방바닥의 물기를 닦았다. 그러고는 내일 할 일을 떠올리며 잠에 들었다.
   다음 날 회사에는 놀라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입 뽑았는데, 남자래요.”
   화장실 앞에서 마주친 은희 선배가 말했다.
   “정말요?”
   “근데, 서른두살이래요.”
   서른둘이라니. 나는 눈썹을 치켜세워 보였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난 뒤로 왠지 모를 기대감이 생겼다. 변화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랄까. 새로운 직원으로 인해 사무실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지라는 예감이 들었다.

 

*

 

   3월 2일 수요일, 출근해서 보니 현미 선배의 자리에 처음 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신입 직원 이선욱씨였다.
   얼마 전까지 학생이었기 때문일까? 네모난 뿔테 안경을 낀 얼굴이 생각보다 앳돼 보였다. 인사를 나눌 때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걸 보니 굉장히 수줍음을 타는 성격인 듯했다.
   점심시간이 되기 직전에 3층에 올라갔다가 손에 서류 한장을 들고 있는 선욱씨와 마주쳤다. 고개를 빼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부서들의 위치를 몰라 헤매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안녕하세요? 뭐 찾으세요?”
   나는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는 우왕좌왕하는 뒷모습을 들킨 것을 부끄러워하며 한쪽 팔을 들어 코트 소매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지향씨, 관리부가 어디예요?”
   그러고는 양쪽 팔을 어디에 둘지 몰라 어린아이들이 그러듯 몸에서 조금 떨어뜨린 채 똑바로 내렸는데,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문이 많아서 헷갈리죠? 저 문으로 들어가서 왼쪽 두번째 자리에 앉은 대리님한테 얘기하시면 될 것 같아요. 박은정 대리님이에요.”
   나중에 계단을 내려오는데, 그나 내게 ‘지향씨’라고 불렀던 것이 떠올랐다. ‘선배’가 아니라 말이다.
   하긴, 나한테까지 굳이 선배라고 부를 필요는 없지. 나는 생각했다. 서른둘이라고 했으니, 가만 있자, 나보다 일곱살이 더 많잖아. 내게 선배라고 부르면 오히려 듣기 민망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점심을 먹고 산책을 나갔을 때 빛나 선배가 말했다.
   “신입 말이에요. 그 사람 뭐예요?”
   무슨 말인가 싶어 모두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점심을 먹는 내내 빛나 선배의 얼굴이 어두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인트라넷이랑 웹하드 이용법을 알려줬는데, 나한테 자꾸 빛나씨라고 하는 거예요. 한번도 아니고 계속 그러기에 선배라고 부르라고 했더니, 뭐라는 줄 알아요? 자기는 회사에서 굳이 직원들끼리 선배라는 호칭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