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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32회

   그날 오후, 복도를 지나는데 빛나 선배와 실장님이 회의실에 심각한 표정으로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이튿날 선욱씨가 빛나 선배에게 뭔가 용건을 전하면서 ‘선배’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말과 민주주의」의 마지막 챕터 교정을 시작하며 교통정리가 된 모양이구나, 생각했다.
   정수기 앞에서 커피 한봉을 뜯고 있는데 선욱씨가 컵을 들고 다가왔다. 그는 출신 대학의 이름과 로고가 새겨진, 참으로 쓰임새에 충실해 보이는─즉 멋대가리라고는 없는─손잡이 달린 스테인리스 컵에 물을 가득 받은 다음 몸을 돌리더니, 뭔가 생각난 듯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말해보라는 뜻으로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저, 지향씨, 나중에 우체국 라벨 뽑는 법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컵을 든 로봇이라고 해도 서 있는 모습이 그보다는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흔들리는 시선, 경직된 안면근육을 보자 순간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남에게 뭘 부탁하고 배우는 데 익숙지 않은 사람인 것 같은데, 적지 않은 나이에 회사생활을 하려니 힘이 들겠지. 하지만 그 순간 “포즈일 뿐이에요”라는 빛나 선배의 말도 뇌리를 스쳐갔다.
   “네네, 그럼요. 지금 해볼까요? 뭐 부치실 거 있으세요?”
   그는 나를 다시 한번 ‘지향씨’라고 불렀고, 나는 그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나이가 스물다섯인데다 경력이라고 해봐야 아직 일년도 채우지 못했으니, 실장님도 나한테까지 선배라고 부르게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게 분명했다.
   역시, 그게 맞잖아. 불편한 상황이 연출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

 

   선배 호칭을 둘러싼 작은 갈등 이후, 사무실은 몇주간 표면적으로는 조용히 흘러갔다. 습한 공간에 놓인 책이 차츰 물기를 빨아들여 물결 모양으로 휘듯이 그 기간 동안 선욱씨가 우리와 가까워졌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처음에 난 우리 쪽에서─정확히는 선배들이─그에게 어울릴 여지를 내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욱씨 쪽에서도 딱히 끼어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지켜볼수록 그럴 마음이─어쩌면 필요가─없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는 9시 조금 전에 유리문을 열고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셔츠에 스웨터를 입고 그 위에는 늘 같은 진회색 모직 코트를 걸쳤고, 12시가 되면 일어나서 혼자 밖으로 나갔다. 업무와 관련된 용건 외에는 종일 입을 열지 않아서, 한번은 그가 전화통화를 할 때 “이게 누구 목소리지?” 하고 고개를 들어 손님이 왔나 살폈을 정도였다.
   그가 면접 볼 때 제출한 기획서는 빠른 속도로 구체화되었다. 부장님에게 피드백을 받으며 보완하는 눈치더니, 미팅 약속을 잡는 전화통화 소리가 들렸다. 입사 한달 만에 그는 부장님과 첫 미팅을 나갔고, 놀랍게도 처음 한번 이후로는 혼자서 서울로 미팅을 다니기 시작했다.
   “이선욱씨 혼자 미팅 나간 거예요?”
   어느 날 오후, 빈자리를 본 실장님이 부장님에게 물었다.
   “굳이 같이 안 가도 되겠더라고요.”
   고개를 들어 대답하는 부장님의 표정에는 왠지 모를 멋쩍음이 섞여 있었다.
   그밖에도 선욱씨는 계속해서 단행본 기획안을 만들어 부장님에게 들이미는 눈치였다. 그가 출근해서 하는 일들은 구체적으로 공유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는 열심히 일했다. 업무시간에 인터넷 쇼핑을 하거나 메신저를 하는 타입 같지도 않았고, 분명히 한눈 팔지 않고 쉼 없이 일을 하는데, 묘하게도 같이 일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는 뭐랄까, 출근해서 사무실에 앉아 있지만, ‘자기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푸른서재는 기본적으로 원고가 풍족하다 못해 쌓여 있는 회사였다. 이는 무척 드문 경우로서, 긴 세월 동안 훌륭한 책을 꾸준히 펴내 저자들의 신뢰를 얻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걸 나는 알게 되었다. 하지만 저자들은 전화를 걸어 원고를 넘긴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담당 편집자가 배정되지 않느냐, 언제쯤 교정 작업이 시작되느냐, 압력을 넣었고 지금 작업하는 H대학의 인문한국사업단 총서처럼 급한 일정으로 끼어드는 책들도 있어서 편집부는 언제나 바쁘게 돌아갔다.
   이상한 일이지만, 또한 그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가 기획을 하고 외근을 다닌다는 건 그 일들을 분담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