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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33회

두 할머니가 동네를 한바퀴 걸어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를 움직이면 조금이라도 잠을 잘 수 있을지 모른다며. 할머니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형민은 나중에 늙어서 손주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이 할아버지가 말이야. 형민이 허공에 대고 중얼거려보았다. 그랬더니 그 다음에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니 엄마가 말이야. 형민은 말을 바꾸어보았다. 니 엄마는 똥을 싸도 울지 않았단다. 배가 고파도 울지 않았단다. 형민은 딸이 우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부러 볼을 꼬집곤 했다. 아내 몰래. 형민은 그때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딸이 유치원에 다녔을 때 이런 일도 있었다. 유치원에서 돌아온 딸이 말하길 잘생긴 아이가 새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 아이랑 종일 놀았다고. 남자친구가 생긴 거냐며 형민과 아내는 딸을 놀렸다. 그후로, 딸은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그 아이의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블록놀이를 같이 했다고. 오늘은 그 아이가 요구르트를 주었다고. 오늘은 유치원 농장에 가서 같이 감자를 심었다고. 오늘은 사탕을 받았다며. 어느 날은 그 아이가 자기에게 말도 안 걸고 다른 여자애랑 놀았다며 집에 와서 울기도 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나. 어느 날, 늦잠을 잔 아이를 데리고 유치원에 간 아내는 이참에 딸이 좋아하는 남자아이의 얼굴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아이에 대해 물었다가 이상한 대답을 들었다. 그런 이름의 아이는 없다는 거였다. 새로 입학한 아이도 없다는 거였다. 놀란 아내는 형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모든 것이 아이가 지어낸 거짓말이었다고. 그날 밤, 형민은 아이와 눈을 마주치고는 천천히 물었다. 엄마가 유치원에 갔더니 그 아이가 없었다고. 어떻게 된 일이냐고. 그랬더니 아이가 웃으면서 태연하게 대답했다. 전학을 갔다고. 아빠가 다른 회사를 다니게 되어서 저 멀리 전학을 가게 되었다고.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딸을 보고 형민은 충격을 받았다. 형민은 아이를 혼내지 않았다. 아니 혼내지 못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그 거짓말이 무얼 의미하는 걸까? 혹시 나에게 어떤 나쁜 영향을 받은 걸까? 밤마다 생각해봐도 형민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딸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아내도 이해할 수 없고 자신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어느 날 밤, 비로소 형민은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깨달았다.

형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동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아이가 떨어진 자리에 누군가 꽃 한송이를 놓아두었다. 할머니들에게 아이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다지 슬프지는 않았는데, 꽃을 보자 갑자기 눈물이 났다. 눈물이 나지 않도록 형민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필이면 달이 밝았다. 밝아도 너무 밝다고 형민은 생각했다. 이런 날은 구름에 달이 가렸으면 좋겠다고. 형민은 어머니가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그 밤도 이렇게 달이 밝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달이 밝아 어머니가 나쁜 마음을 금방 거두었다고. 아마도 아버지가 죽고 며칠이 지난 뒤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난 뒤 어머니는 밤마다 울었고, 그래서 형민은 어머니가 창피하지 않도록 잠을 자는 척했다.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어머니가 울지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숨이 막혀왔다. 무엇인가 얼굴을 누르고 있었고, 형민은 순간 그것이 베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주 잠깐이었다. 십초. 아니 그보다 더 짧은 순간이었다. 답답함은 금방 사라졌다. 형민은 눈을 뜨지 않았다. 눈을 뜨면 어머니의 눈과 마주칠 것만 같아서. 아침에 일어나 어머니가 차려준 아침밥을 먹으면서 형민은 밤에 일어난 일이 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날 밤 「전설의 고향」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런 무서운 꿈을 꾼 것이라고. 그래서 형민은 매주 「전설의 고향」을 챙겨보았다. 무서웠지만 꾹 참고 보았다. 「전설의 고향」을 본 날이면 형민은 생각했다. 똑같은 꿈을 꾸게 해달라고. 그래야 그 일이 꿈이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형민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언젠가 한번은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위암 말기에야 병을 발견했고, 수술 후 패혈증이 찾아와 돌아가셨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돌아가시기 이틀 전, 응급실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형민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귓속말을 했다. 그때 그 일은 잊으시라고. 아들은 이미 오래전에 용서했다고. 어머니가 알아들었는지 손가락을 움직였다. 형민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때 형민은 병원에서 나와 집까지 걸어갔다. 네시간인가 다섯시간인가, 그렇게 걸렸다. 길을 걷다 고개를 올려 하늘을 보았는데 별이 듬성듬성 보였다. 별자리를 찾아보려다 아는 별자리라고는 북두칠성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집에 돌아와 보니 엄지발가락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피가 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민은 닦지 않고 아내가 자고 있는 침대까지 걸어갔다. 발이 닿는 곳마다 핏자국이 새겨졌다. 형민은 아내를 깨웠다. 그리고 말했다. 아는 별자리가 북두칠성밖에 없다고, 그게 너무 슬프다고. 형민은 아내를 붙잡고 울었다. 그 소리에 아기였던 딸이 잠에서 깨서 울었다. 잘 울지 않아 억지로 울려야 했던 딸이 자지러지게 울었다. 그때 아내가 형민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지금부터 공부하면 된다고. 별자리도 공부하고. 들꽃이랑 나무의 이름도 외우고. 그래서 나중에 딸과 함께 걸어다니며 모든 걸 말해주는 척척박사 아버지가 되면 된다고. 형민은 그런 아버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형민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생각했다. 지금도 알고 있는 별자리는 북두칠성밖에 없구나.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구나.

집으로 돌아온 형민은 발을 닦았다. 발가락 사이사이를 천천히 닦았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지 않고 일부러 거실을 걸어보았다. 발자국이 남도록. 그렇게 거실을 서성인 다음 방으로 들어와 자리에 누웠다. 피곤했다. 지난 이박 삼일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형민은 이내 잠이 들었다. 그리고 푹 잤다. 꿈도 꾸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