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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33회

   “저런 식으로 할 거면 사업자등록을 해서 출판사를 차리지 왜 회사에 들어왔나 모르겠어요.”
   “그러니까요. 누구는 기획할 줄 몰라서 원고 쳐내고 있나.”
   점심 산책길에 은희 선배와 빛나 선배가 말했다.
   “이제껏 없던 캐릭터인 건 맞는 것 같아요.”
   영인 선배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호의적인 말투까지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흥미를 느끼는 듯 보였다.
   “개인주의자는 전에도 있었지만, 저렇게 능력있는 개인주의자는 없었거든요. 그렇지만 개인주의자는 푸른서재의 인재상이 아니에요.”
   “푸른서재의 인재상은 뭔데요?”
   내가 물었다.
   “군말 없이 원고 빨리빨리 쳐내는 편집자.”
   빛나 선배가 빈정거렸다.
   “그렇진 않아요.”
   영인 선배가 말했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이마 한쪽이 찌푸려져 있었다.
   “대표님도 젊은 독자들이 읽을 만한 책을 내고 싶어하세요. 편집부랑 밥 먹을 때도 늘 얘기하시잖아요. 묵직하면서도 시의성 있고 젊은 사람들이 읽을 만한 책을 내고 싶어하는데, 대표님도 최신 연구 흐름은 잘 모르시고 젊은 연구자들과 갑자기 접촉하기도 쉽지 않으니까 선욱씨 존재가 반가운 거예요.”
   그때 영인 선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선배의 엄마인 모양이었다. 선배가 전화를 받으며 뒤로 처지자 대화가 갑자기 끊겨버렸다. 나머지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각자 바닥을 내려다보며 보도를 걸었다.
   마음속이 복잡했다. 은희 선배, 빛나 선배는 선욱씨에게 적대적인 마음을 숨기지 않았고, 영인 선배는 뜻밖에도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쪽인가? 나는 그를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 알 수가 없었다. 그를 좋아해야 하는가, 싫어해야 하는가. 질문을 바꿔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꼭 어느 한쪽이어야 할까?
   그렇다고 내가 그에게 관심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줄곧 그와 관련된 어떤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실 내 눈에는 그의 능력이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능력은 어리숙해 보였던 첫인상 탓인지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낮추어 봤던 걸까? 감히 그보다 내가 더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하기라도 했던 걸까?
   그는 큰 주제 아래 일련의 시리즈를 기획할 능력이 있고, 연구자들과 친분까지 있어서 척척 계약을 성사시키고 있었다. 보는 사람을 심란하게 하는 어색한 몸가짐이며 불안정한 시선도 미팅에 방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닌데, 싹싹한 태도나 환한 미소보다 중요한 건 학문적인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지식일 테지. 나도 언젠가 선욱씨처럼 혼자 외근을 나가 저자를 만나고 계약서에 서명을 받아올 수 있을까. 아무래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때 불쑥 빛나 선배가 말했다.
   “그런데 이선욱씨, 지금까지 한번도 야근 안 한 거 알아요?”
   “그건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요. 아직 수습기간인데 야근하라고 하는 건 좀 그렇죠.”
   은희 선배의 대답이었다.
   “왜요. 지향씨는 인턴할 때도 날마다 야근했던 거 같은데.”
   빛나 선배는 또다시 나를 걸고넘어지고 있었다. 자기 이야기만 하면 될 일인데 왜 자꾸 나를 엮는지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또 내게 화를 내라고 다그칠 것만 같아 마음이 불편했지만 다행히 빛나 선배는 더는 대화를 이어가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

 

   이후 사무실의 관심은 이선욱씨가 언제 첫 야근을 하느냐로 모아졌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부장님과 실장님도, 그리고 다른 부서 직원들까지도 그 사실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선욱씨뿐이었다. 그는 매일 6시 정각이 되면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턱이 가슴팍에 닿을 정도로 목을 움츠리고는 말했다.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그의 인사에 짧게나마 화답해주는 사람은 부장님뿐이었다. 그러나 4월에 들어서자 부장님마저도 입을 다물고 고개를 들어 그의 뒷모습을 힐끗 쳐다보곤 했다.
   “실장님이 부장님한테 얘기할 거예요.”
   어느날 점심 산책길에 은희 선배가 말했다.
   실장님이 더 두고 보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저녁 선욱씨가 퇴근할 때 부장님의 시선이 다른 때보다도 길게 그의 뒷모습에 머물렀다.
   다음 날 오전 10시쯤, 부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선욱씨 쪽으로 가서 어깨를 짚고 귀엣말을 했다. 선욱씨가 부장님을 따라 회의실로 가자 선배들이 몸을 꼿꼿이 세우고 파티션 너머로 시선을 교환했다. 두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열고 함께 들어왔다. 선욱씨는 표정을 살필 겨를도 없이 자리에 앉았다. 부장님은 미소 띤 얼굴이었는데, 뭐랄까, 어쩐지 낭패를 당한 듯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