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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35회

박대리가 탄 택시가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형민은 박대리가 첫 출근하던 날을 떠올렸다. 출근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점심을 사주겠다고 했더니 박대리가 비빔냉면이 먹고 싶다고 했다. 자기는 새 일을 시작하면 각오를 다지는 마음으로 매운 음식을 먹는다는 거였다. 그래서 형민은 팀원들과 바싹불고기와 비빔냉면을 세트로 파는 집을 찾아갔다. 맵기를 상중하로 선택할 수 있었는데, 그날은 모든 팀원이 가장 매운 냉면을 시켰다. 맵고 질긴 면. 박대리는 코를 훌쩍이며 냉면을 먹었다. 마치 자기의 앞날에 그런 날이 자주 닥쳐올 것을 미리 예감이라도 하듯이. 냉면을 다 먹고 난 다음 형민은 뜨거운 육수를 마셨다. 후루룩 소리를 내가며. 형민은 혓바닥에 얼얼한 기운이 가시기 전에 뜨거운 육수를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비빔냉면은 그 맛에 먹는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부러 냉면을 먹는 중간에는 물도 마시지 않았다. 냉면을 다 먹고 난 다음 코를 푸는 박대리를 보면서 형민이 말했다. 신입 신고식으론 나쁘지 않네. 그러자 다른 직원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신입이 들어오면 매운 음식을 먹여요. 그래서 그 이후로 새 사람이 들어오면 매운 냉면을 먹는 게 전통이 되었다. 박대리는 오후 세시쯤이면 줄넘기를 했다. 책상 서랍의 마지막 칸에는 운동화와 줄넘기가 들어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복도에서, 날이 좋으면 회사 옥상에서. 박대리가 줄넘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형민은 일부러 따라 나섰다. 왜 따라와요? 박대리가 말하면 형민은 이렇게 변명을 했다. 너 따라가는 거 아냐. 졸려서 잠 깨려는 거야. 형민은 자판기 커피를 한잔 뽑아 들고 옥상 벤치에 앉아 박대리가 줄넘기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 정말 잠이 달아났다. 몸무게가 백 킬로그램이 넘었다는 박대리는 입사를 하기 전에 살을 뺐다. 서른번도 넘게 면접에서 떨어진 뒤에 다이어트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했다. 살도 빼고 취직도 했는데, 여자친구에게 차였다. 살을 뺐더니 여자친구가 다른 사람과 사귀는 것 같다며 떠나갔다는 거였다. 박대리는 살을 뺀 뒤에 여자친구와 가려고 적어놓은 식당 목록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하루에 세번 줄넘기를 했다. 출근 전에 십분. 회사에서 십분. 그리고 퇴근 후 십분. 그 이야기를 듣고 형민은 그런 의지면 일도 똑 부러지게 할 거라고 기대했지만, 박대리는 줄넘기 시간을 지키는 것 말고 다른 일들은 늘 대충 처리했다. 실수가 잦았지만 그때마다 솔직히 자진신고를 했고, 변명을 하지 않았고, 상사에게 혼나도 큰 상처를 받지 않았다. 농담도 잘해서 사람들을 웃겼다. 그게 일을 못하는 박대리가 미움받지 않는 비결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농담을 해서 조과장으로부터 매일매일이 만우절이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 내일이 만우절인데. 이제 앞으론 박대리 얼굴을 보면서 웃긴 글렀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형민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고는 이내 이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비겁하게 느껴졌다. 그게 무서워서 박대리에게 아무 말하지 말라고 했던 것 아닌가, 하고. 그제야 형민은 조과장에게 화가 났다. 돈을 횡령해서가 아니고 자신을 속여서가 아니었다. 농담을 주고받으며 하루를 시작하던 그 풍경들. 그것 빼앗아갔기 때문이었다.

만우절을 위한 자판기를 만들자고 제안을 한 직원이 있었다. 캔커피를 누르면 꿀물이 나오고, 휴지를 누르면 손수건이 나오고, 껌을 누르면 가그린이 나오는, 그런 자판기를 만들자고. 물론 그 아이디어는 채택되지 않았다. 상사들에게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회사가 놀이터냐는 소리도 들었다.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고 점심도 늘 혼자 먹는 직원이었는데, 회의만 하면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쏟아냈다. 하지만 채택된 아이디어는 단 한건도 없었다. 그 직원이 오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두면서 형민에게 어떤 비난의 말을 했는데, 이혼 직전에 아내에게 들은 말이기도 해서 형민은 깜짝 놀랐다. 그 일로 형민은 한동안 의기소침했다. 그래서 그 다음해에 만우절을 위한 자판기를 만들자는 제안서를 다시 올려보았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남의 의견을 존중하는 그런 상사라고, 형민은 말하고 싶었다. 형민은 제안서가 통과되지 않을 것임을 당연히 알았다. 하지만 그 의견을 묵살한 것은 자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고 그런 행동이 얼마나 얄팍한 짓인지도 알았다. 해마다 만우절이 되면 형민은 그 직원이 생각났고 그때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점심시간이 되자 형민은 박대리에게 점심을 먹자고 했다. “냉면 먹으러 갈까?” 형민이 묻자 박대리가 위염에 걸려 약을 먹는 중이라고 했다. 그래서 죽을 먹으러 갔다. 박대리는 전복죽을 시키고 형민은 미역죽을 시켰다. 형민은 미역국을 좋아해서 한번 끓이면 십인분을 넘게 끓였다. 미역국을 먹다 지겨우면 쌀을 넣고 죽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또 죽이 지겨우면 미역국에 라면을 넣어 끓였다. 미역이 들어간 라면은 딸도 좋아했다. 그래서 딸은 생일날은 쌀밥에 미역국을 먹고, 생일 다음 날은 미역국에 라면을 끓여먹었다. 그게 코스였다. 형민은 미역죽을 먹으면서 박대리에게 만우절에 태어날 뻔한 딸 이야기를 해주었다. “예정일이 3월 28일이었거든. 그래서 나는 농담으로 이렇게 말하고 다녔어. 며칠만 늦었어도 만우절 날 태어날 뻔했다고.” 그러다 예정일이 되었는데 아이가 나올 기미가 없었다. 아내는 하루만 더 기다려보자고 했다. 29일이 되었고 역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야 걱정이 되더라고. 만우절 날 태어나게 될까봐. 사람들에게 생일을 말하면 거짓말 마세요,라는 대답을 듣게 될 거 아니야. 그것도 평생.” 형민이 말하자 박대리가 요즘은 만우절이 생일인 사람들에게 공짜로 케이크를 주는 가게도 있다고 말해주었다. 오히려 더 재미있었을 거라고. “암튼, 그때는 그랬어. 내 딸의 시작이 거짓말을 하는 날이 되는 게 싫었어.” 형민은 아내에게 수술을 하자고 말했다가 비웃음을 샀다. 뭐든 순리대로. 아내는 말했다. 그래서 형민은 아내의 배에 대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오려면 얼른 나와. 얼른. 시간이 없어. 30일이 되었고 형민은 아침저녁으로 아내의 배에 대고 속삭였다. 얼른 나와. 얼른. 그렇게 31일이 되었고 그제야 형민은 속삭이는 말을 바꾸었어. 나오지 말라고. 이틀만 참으라고. 거기서 조금 더 있어. 알았지. 조금만 더. 형민은 아내의 배에 귀를 대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면 아기가 알았다는 듯 움직였고 그게 꼭 자신의 말에 대답하는 것 같았다. 4월 1일이 되었고 점심에 양수가 터졌다. “아내의 손을 잡고 병원으로 가면서 나는 말했어. 조금만 참으라고. 열두시간만 참아달라고.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형민이 물었다. 그리고 박대리의 말버릇처럼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말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아내가 내 뺨을 때렸어. 병원 응급실 앞에서 뺨을 맞은 남편이 된 거야.” 그날 아내는 형민의 빰을 때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넌 한번도 우리 아기한테 건강하게 나오라는 말을 안 했어. 그저 빨리 나와라. 아니 늦게 나와라. 그딴 말만 했지. “그 말을 듣고서야 빰을 맞아도 싸다는 생각이 들었지.” 형민이 말하고는 웃었다. 박대리가 전복죽을 남겼다. 가게 주인이 남은 음식을 포장해줄 수 있다고 하자 박대리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형민은 남김없이 다 먹었다. 박대리가 각자 계산을 하자고 해서 형민은 그러자고 했다. 다시 회사로 들어가면서 박대리가 물었다. “그래서 오늘이 딸 생일이에요?” 형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일. 4분 지나서 태어났거든. 4월 2일. 0시 4분. 그게 딸 생일이야. 이 아빠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4분을 참은 거지. 난 그렇게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