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35회

   “하던 프로그램이 끝났는데, 다음 프로그램에 들어갈지 말지 되게 망설였거든. 근데 도저히 하기 싫대. 한번 시작하면 또 집에도 못 들어오고 몇날 며칠 밤새우고 그러니까. 방송국 일이 생각했던 거랑 많이 다른가봐. 그래서 내가 월세를 전부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야.”
   하나 언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마을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어두운 창밖을 내다보았다. 버스 안의 승객은 나 혼자뿐이었다. 금요일 밤이니 다들 어딘가 시끌시끌한 음악과 환한 조명이 있는 장소를 찾아갔겠지.
   선택의 무게가 무척 무겁구나.
   하나 언니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을 할 때의 피로한 얼굴도. 누구나 선택을 내리고 무게를 감당하며 살아간다. 나는 금요일 밤 서울 반대편으로, 적막뿐인 원룸으로 홀로 돌아가고 있었고 언니는 내일 아침 두번째 일터로 나가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 터였다. 선택이라는 단어 때문인지, 문득 이선욱씨에게 생각이 미쳤다. 모든 선택에 댓가가 따른다면, 그는 어떨까. 그도 남몰래 무엇인가를 견디고 있을까?

 

*

 

   4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어느덧 선욱씨가 없는 야근 풍경에도 익숙해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의 존재에 익숙해진 것은 아니었다.
   “실장님은 선욱씨 보기 싫어서 책상 한쪽에 책을 쌓으셨어요.”
   어느날 은희 선배가 말했다.
   “선욱씨 책상이 너무 지저분해서 실장님이 좀 치우라고 하셨거든요. 근데 선욱씨가 이렇게 어질러진 환경이 창의성에 더 좋다는 연구가 있다고 하면서 실실 웃더라고요. 제가 보기에는 약간 농담이랍시고 한 말인 것 같긴 했는데, 어쨌든 실장님은 완전히 정색하셨어요.”
   그날 점심시간에 이를 닦고 들어오면서 냉장고에 볼일이 있는 듯 실장님 자리 뒤쪽을 지나갔다. 과연 모니터 옆에 책탑이 있었다. 책들은 누가 봐도 자료가 필요해서 임시로 그 자리에 놓여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가지런하게 높이 쌓여 있었다. 그밖에는 잡동사니 없이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자리의 주인이 퇴근했다고 여길 정도였다. 키보드 앞에는 교정지와 볼펜이 단정하게 놓여 있었고, 유리 아래 끼워진 것이라고는 손바닥만 한 히라가나 표가 전부였다.
   실장님은 20대 후반에 푸른서재에 입사한 베테랑 편집자였다. 나는 그녀의 칼로 자르듯 정확한 일처리,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좋아했다. 말수가 적은 부장님 대신 편집부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게 그녀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실장님이 그렇게까지 선욱씨를 싫어하는 이유는 뭘까? 난 조금 의아함을 느꼈다. 결국 일을 잘하는 것보다도 공손한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걸까?
   더욱 어리둥절한 건 선욱씨를 대하는 부장님의 태도였다. 야근에 관해 면담한 뒤로 부장님은 그를 냉대하기는커녕 오히려 따사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부장님은 평소 우리가 야근할 때 저녁을 먹고 나서 밖에 나갔다 오는 것도 싫어했다. 대놓고 금지하지는 못했지만 못마땅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점심때처럼 멀리 산책을 나가는 게 아니라 회사 주변을 5∼10분 정도 돌고 오는 것인데도 그랬다. 시간을 낭비하고 노닥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선욱씨에게 다정한 눈길을 보낼 수 있는 걸까?
   어느날 저녁, 여느 때처럼 6시가 되자 선욱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의 작은 인사가 들렸다. 그러자 부장님이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응, 그래.”
   조금 뒤 영인 선배가 자리에서 일어나 똑같은 인사를 했다. 그러나 이번에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점심시간, 선욱씨를 제외한 편집부원들이 도시락을 들고 원탁에 모였다. 실장님도, 부장님도, 선배들도, 다들 아무런 말없이 묵묵히 밥을 먹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들 의식하고 있었지만, 먼저 나서서 침묵을 깨는 사람은 없었다. 나 역시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한참 뒤, 빛나 선배가 불쑥 말을 꺼냈다.
   “저, 현미씨 있잖아요.”
   시선이 일제히 빛나 선배에게로 쏠렸다. 현미 선배라니, 더없이 반가운 화제였다. 지금 분위기에서 현미 선배는 모두를 따사로운 감정으로 묶어주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빛나 선배의 입에서 나온 말은 기대와 완전히 어긋난 것이었다.
   “페이스북에서 봤는데, 취업을 했던데요.”
   “취업했다고?”
   “무슨 소리야, 유학 간다고 했는데.”
   부장님과 실장님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빛나 선배를 쳐다봤다.
   “대기업 취업한 것 같던데요. 프로필에 소속이 SPC로 바뀌었어요. 단체로 연수받는 사진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