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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36회

   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 빛나 선배를 쳐다보았다. ‘뒤통수를 맞은 것 같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어울리는 것 같았다. 현미 선배가 대기업에 입사하다니. 유학 준비를 하다 계획을 변경한 것일까, 아니면, 설마, 처음부터 유학 갈 생각 따윈 없었던 걸까. 순간 영어단어가 잘 외워지지 않아 낙심된다고 말하던 선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현미 선배가 그럴 리 없지. 하지만 계획을 변경했다고 하기엔 취업까지의 시간이 너무 짧은 듯했다.

   다들 충격에 빠진 듯 말이 없었다. 나는 실장님과 부장님의 얼굴을 힐끗 훔쳐보았다. 두분의 충격이 가장 클 것 같았다. 잘못 본 게 아니냐거나, 뭐라고 더 캐물을 법도 한데 그들은 더 묻지 않고 시선을 아래로 한 채 굳은 얼굴로 밥을 씹고 있었다.

   현미 선배가 이곳을 떠난 지 겨우 두달이 흘렀을 뿐인데 그사이 사무실 분위기가 얼마나 달라졌나 생각하니 놀라웠다. 많은 변화 중에서도 가장 달라진 건 부장님의 입지였다. 전에 현미 선배는 반달눈을 하고 두 손을 모은 채 부장님이 자신의 이상형이라고 말하곤 했었다.

   “술도 안 드시고, 책 좋아하시고, 가정적이시잖아요. 부장님은 정말 아저씨 같지 않고 소년 같으세요.”

   부장님의 반찬을 보고 감탄하며 “도시락에서 사모님의 사랑이 묻어나는 것 같아요. 정말 행복하시겠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부장님에게 그런 말을 건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배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나도 선욱씨를 향한 차별대우를 보면서 의구심이 커지고 있었다.

   현미 선배는 사무실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졌다는 걸 모르겠지. 그녀의 기억 속에서 회사는─그리고 우리들은─언제까지고 자신이 떠나던 때 그대로 남아 있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현미 선배에게 소식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퇴사한 이후 누구와도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모두에게 친절했지만, 누구와도 특별히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문득 한번도 선배가 화를 내거나 언짢아하는 걸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명랑함과 불평 없던 태도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의 것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어쩐지 마음이 쓸쓸하게 가라앉았다.

 

*

 

   4월 말, 방명원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마침내 초교 교정을 끝마치고 교정지를 우편으로 부쳤다고 했다. 빠르면 내일 도착할 거라고. 그런데 그 말을 하는 목소리가 어쩐지 밝지 않았다.

   “지향 선생님, 말씀 드릴 일이 있어요. 약간 복잡한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가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제가 예전에, 약 사년 전에 각산재단이라는 곳에서 지원금을 받은 일이 있어요.”

   “각산재단요? 어떤 곳인가요? 저는 처음 들어봐요.”

   “네, 작은 곳이고 잘 알려지지 않아서 모르실 거예요. 진원그룹에서 창립주를 기념하려고 만든 재단인데요, 어떻게 인연이 닿아 유학생활 막바지에 저한테 지원금을 주셨거든요. 조건은 나중에 단독 저서를 낼 때 재단의 총서 일부로 포함시킨다는 거였어요. 하지만 언제까지 책을 내야 한다거나 하는 특별한 조건이 없는 제너러스한 지원금이어서 저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나는 그의 설명을 놓치지 않으려 귀를 세우고 들었다.

   “실은 받은 이후로 몇년간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잊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생각이 나서 확인해봤더니, 책 표지에 재단의 로고와 ‘각산총서 3번’이라는 표시가 들어가야 한다고 하네요. 그동안 1권, 2권이 나왔다고. 제 책은 3권이 된다고 해요.”

   “네, 선생님. 일단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각산재단 홈페이지를 검색해 들어갔다. 심플하고 단정하게 만들어진 홈페이지였다. 장학사업, 저술지원사업, 명사초청 기념강연 등의 카테고리가 있었는데, 쌓인 콘텐츠는 몇개 없었다. 수익을 내거나 몸집을 키우려는 목적으로 움직이는 조직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곧바로 부장님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부장님의 반응은 날카로웠다.

   “각산총서? 그게 무슨 소리야.”

   부장님은 눈썹을 찌푸린 채 내 설명을 한마디 한마디 주의 깊게 들었다.

   “그런 식으로 자기들 총서로 넣을 거라면 그 재단에서 출판사를 운영해야지.”

   나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며 옆에 서 있었다. 들고 온 줄도 몰랐는데 내 오른손에는 교정용 파란 펜이 있었다. 나는 괜히 펜 끝을 눌러 딸깍딸깍 소리를 냈다.

   “그럼 1, 2권은 어디 출판사에서 나왔어?”

   부장님의 물음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홈페이지에 두권의 책 정보가 있던 것은 기억났지만, 출판사까지는 눈여겨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부장님이 마우스에 손을 얹더니 잠자던 화면을 깨워 재단 홈페이지에 접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