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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37회

   조금 전 내가 봤던 홈페이지의 메인 화면이 나타났다. 그는 망설임 없이 마우스를 움직여 저술사업 페이지로 들어갔다. 나도 옆에 붙어 서서 허리를 숙이고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1권은 넥스트. 문제집 회사잖아. 2권은…… 이게 어디지? 처음 들어보는 덴데. 이것 봐라. 이거 이상하다.”
   그가 안경을 벗어 들더니 왼손 엄지와 중지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제야 일이 심상치 않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일단 알았어.”
   자리로 돌아왔지만 일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조금 뒤 부장님이 다시 나를 불렀다. 나는 부리나케 일어나 부장님 옆으로 갔다.
   “방명원 선생님한테 전화해서, 지원금 받았다는 문구를 판권면에 넣으면 안 되느냐고 얘기해봐. 재단 쪽에 한번 물어보시라고 해.”
   그는 옆에 놓인 묵직한 하드커버 책을 집어 들고는 판권면을 펼쳐 손가락으로 짚어 보였다.
   “지금 작업하는 인문한국사업단 총서도 나중에 이런 식으로 문구를 넣게 되어 있거든.”
   묘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판권면은 책들의 주민등록증처럼 지은이와 발행인, 발행일 등의 정보가 깨알 같은 글씨로 적혀 있는 중요한 페이지인 동시에, 일부러 찾아보지 않으면 있는 줄도 모르고 넘어가기 쉬운 곳이니, 겉으로 드러나길 원치는 않지만 누락할 수 없는 정보를 담기에 그보다 맞춤한 공간은 없었다.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된다는 멘트가 나올 때까지 수화기를 들고 기다렸지만 선생님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대신 용건을 정리해 문자메시지를 보내두었다.
   퇴근 직전, 내 자리의 전화벨이 울렸다. 방명원 선생님이었다.
   “대학원생들과 세미나가 있는 날이라 전화기가 연구실에 있었어요.”
   그가 말했다. 그는 연락을 받지 못했을 때 늘 이렇게 간략하지만 정확하게 상황을 설명했는데, 그게 내겐 좋은 매너로 여겨졌고, 존중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밝지 않았다. 내 메시지를 확인하고 곧바로 재단에 문의한 다음 전화하는 거라고 했다. 풀이 죽은 목소리에서 이미 우리가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반드시 앞표지와 책등에 각산총서 로고가 들어가야 한다고 하네요. 이거 어떡하지요.”
   “아……”
   “죄송합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제가 큰 실수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선생님. 함께 방법을 찾아봐요.”
   전화를 끊고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뭔가 방법이 있을 것 같았지만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너무나 좋은 원고에, 너무나 마음에 드는 저자였다. 그걸 원하던 대로 내가 맡게 되었고. 그래, 모든 게 너무 말이 안 될 만큼 지나치게 좋더라니.
   생각대로 보고를 받은 부장님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었다.
   “이걸 대표님한테 어떻게 얘기하나. 대표님이 굉장히 화내시겠는데.”
   “부장님, 지금 이게 되게 심각한 문제인 거죠?”
   “그렇지, 이 사람아. 우리가 납품 회사야, 다른 회사 총서를 만들어주게?”
   부장님은 몇초간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저었다.
   “게다가 대표님은 그 책을 푸른인문학총서로 넣으라고 하셨는데.”
   그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푸른인문학총서는 푸른서재에서 나오는 인문학 서적들을 넘버링한 그야말로 느슨한 총서였다. 그밖에도 몇가지 총서가 더 있었고, 푸른서재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책은 그중 하나에 속하게 되었다. 하나의 키워드를 갖고 기획된 책들이 아니라 어느 회사에서 나온 책이라는 의미 정도밖에는 없는 총서였지만, 아무래도 한권의 책이 동시에 두개의 총서에 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각산총서 3번. 푸른인문학총서 28번. 잠깐 떠올려봐도 우스꽝스러웠다.
   “그 양반, 이상한 양반이네. 대표님한테 다짜고짜 전화부터 걸었다기에 당돌한 친구라는 생각은 했지만. 아니, 일을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지. 초교까지 끝나고 나니까 이제야 말을 해?”
   내가 선생님께 들은 모든 사정을 그대로 전해 들었으면서도, 부장님은 그 말을 잊은 건지 선생님이 사기꾼이나 파렴치한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불손하게 들리는 ‘친구’라는 호칭까지 붙여서.
   다음 날, 「말과 민주주의」 교정지가 도착했다. 보낼 때는 내가 써넣은 파란색 글씨뿐이던 교정지에 빨간색 글씨들이 어우러져 보기에 좋았다. 이제 이 수정사항을 입력해 새로운 교정지를 뽑아달라고 전산부에 요청할 차례였다. 그러나 그날 오후, 부장님의 말을 듣고 나는 낙심할 수밖에 없었다.
   “전산부에 올리지 말고 일단 갖고 있어. 대표님하고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