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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37회

엉거주춤 선 채, 그는 어떻게든 어깨라도 펴려고 노력했다. 경비업체 직원에게 자신이 살았던 집의 호수를 대려고 했다. 입을 벌리려는 순간, 그 집이 몇호였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동안 살았던 곳의 호수들이 머릿속에서 뒤섞인 채 둥둥 떠다녔다. 1308호, 507호, 2104호, 1003호… 그것들 중에 무엇이 맞는단 말인가. 맞는 숫자가 정말 존재하기는 했단 말인가. 아니, 그런 공간들이 그의 인생에 존재했단 말인가. 애초에 없는 답을 맞혀야 하는 자의 낭패감이 그를 덮쳤다. 그것이 낯설지 않은 감각이라는 사실에 더욱 당혹스러웠다. 이렇게 간단하게 세상 바깥으로 내팽개쳐져버렸다는 느낌을 살아가는 동안 결코 떨쳐낼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그것은 더욱 질기게 자신을 옥죄기만 할 것이다. 그 예감이 그를 몸서리치게 했다. 입주민을 위한 승강기에 올라보지도 못하고 민규는 쫓기듯이 그곳을 빠져나왔다.

무엇보다 돈이 필요했다. 대출 이자와 고시원비, 그리고 최소한의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돈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자동적으로 ‘번다’라는 동사가 떠올랐다. 돈을 버는 법에 관해 민규가 아는 것의 전부는 제 몸을 움직이고 제 몸을 쓰는 방법뿐이었다. 그동안 그는 운전이나 자동차에 관련된 일들을 해왔다.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없었다. 주차대행업체 한군데에 면접을 보러갔다가 왜 이력서에 사고기록을 기재하지 않았느냐는 소리를 들었다. 자신이 낸 사고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면접관은 눈가를 찌푸렸다. 이런 업체들끼리도 구직자를 두고 평판을 조회하는가보았다.

급한 대로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초저녁에 시작한 일은, 밤이 새고 동이 틀 때까지 이어졌다. 컨테이너트럭에 가득 실려 집결지에 도착한 택배상자들이 지상으로 우르르 쏟아지면 그 상자들을 각각의 지역으로 향하는 컨베이어 벨트에 분류해 싣거나, 소화물이라 불리는 작은 화물들을 지역별로 분류해 행낭에 담는 일이었다. 채 회복되지 않은 몸 상태로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이틀을 일하고 세번째 날 허리를 삐끗해 더는 일을 나갈 수 없었다. 그후 며칠 동안 자리에 누워야 했다. 고시원의 침대는 옆으로 돌아눕기 벅찰 만큼 비좁았다. 몸이 고되고 아프다는 것보다, 자신이 이 정도의 노동에 기진맥진해 며칠을 앓아누워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자괴감이 그를 더욱 괴롭혔다. 퇴원할 때 받아온 한 움큼의 약을 삼키고, 죽은 듯이 잤고, 허기 때문에 잠에서 깨는 일이 반복되었다. 혼자 있으면 식사를 건너뛰거나 컵라면이나 편의점 김밥을 먹었다.

지연과 만나 함께 먹는 밥이 제대로 먹는 유일한 끼니였다. 이틀에 한번 그는 지연의 회사 앞으로 찾아가 그녀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같은 직장에서 근무할 때와 다를 바 없는 저녁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지친 그녀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고, 집까지 데려다 주는 정도만은 몸이 부서져도 해주고 싶었다. 사랑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그 범속한 일상과 이어진, 얄따랗고 희미한 끈을 어떻게든 계속 이어가고 싶은 것이었다. 그는 억지로 유지하고 있는 최소한의 균형을 한 순간에 잃고 와르르 기울어져 쓰러지지 않기만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어느 밤, 지연의 집 담벼락 앞에서 갑자기 세상이 핑그르르 돌았다. 민규는 가만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연이 그의 주저앉은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녀는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의 표정으로 안에 들어가 좀 쉬다가 가라고 했다.

“금방 죽을 사람 같아. 요즘 내내 그랬어.”

지금껏 그에게 이렇게 말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연의 작은 방에서 홑이불을 적실 정도로 땀 흘리며 자는 동안, 지연의 찬 손이 그의 이마를 여러번 짚었다. 그가 깨어났을 때 지연은 따듯하게 데운 우유 한컵을 건넸다. 그날 밤 처음으로 지연의 집에서 밤을 보냈고. 곧 그 방에서 출근한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이 늘어났다. 고시원의 짐은 옮길 필요도 없는 것들이었다. 지연의 방은 그의 고시원보다는 넓은 공간이었지만 검소하고 소박했다. 취사도구라곤 라면 한개를 간신히 끓일 수 있는 편수 냄비 하나가 전부였다. 그는 멀지 않은 할인점까지 느릿느릿 걸어 나가 식칼과 도마, 프라이팬 등속을 몇가지 샀다. 계란찜 만드는 법, 김치찌개 끓이는 법 같은 것을 인터넷으로 검색해가며 음식을 만들었다. 창문에 설치된 촘촘한 방범 창살 너머로 오후의 해가 야박하게 비춰 들었다. 저 창살 없는 곳에, 그녀와 함께 살고 싶다는 한때의 소망이 아주 오래전의 꿈인 것만 같았다.

지연이 출근하고 난 아침, 방바닥을 물걸레로 훔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사고 전에 쓰던 번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김민규씨.”

민규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사장이었다.

“그런 식으로 증발해버리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민규는 허공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노라고, 갑작스런 사고가 있었노라고, 전화기의 파손으로 연락을 드릴 수 없었노라고 그는 거듭 말했다. 사장은 ‘오호’라는 애매한 감탄사를 뱉더니 지금은 어떤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몸이 회복되는 동안 잠시 쉬고 있다고 민규는 대답했다.

“그럼 사무실에 한번 나오십시오. 오늘도 좋고.”

그 남자의 말은 청유형이 아니라 명령형에 가까운 것으로 들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연이어 두번 인사하고 전화를 끊은 뒤에 민규는 잠깐 그 남자의 의도에 대해 생각했지만 길지는 않았다. 지갑에 현금이 하나도 없었다. 지연의 책상 서랍을 열자 곱게 접은 천원권 석장이 보였다. 그는 그것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셔츠 단추를 습관처럼 목까지 잠그고서 바깥세상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사흘 굶은 맹수의 찌푸린 얼굴이라 해도, 상관없다는 심정이었다.

 

 

 

한여름에 연재를 시작하면서 겨울을 상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어떤 소설은, 작가가 짐작했던 것보다 더 멀리 가려는 것 같습니다. 곧 해가 바뀌는데 아직 넓고 긴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송구스럽지만, 4등 뒤의 빛까지로 이곳에서의 연재를 갈무리하려고 합니다. 2018년은 오직 이 소설을 앓으면서 보내겠습니다. 그동안 따라 읽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드리며, 너무 늦지 않은 때에 한권의 책으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