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온라인 연재

38회

*

 

   그러나 사흘이 지나도 부장님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무런 말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싹 잊어버린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에, 혼자서 속을 끓이던 나는 결국 사흘째 되던 날 오후에 참지 못하고 부장님, 제 원고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물었다.
   “지향씨, 몰랐는데 성격 되게 급하네.”
   그가 짜증 섞인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예상치 못했던 예민한 반응이었다.
   “일에 상황이란 게 있고 우선순위라는 게 있어. 내가 부를 때까지 좀 기다려.”
   부장님의 핀잔을 듣고 나는 앗 뜨거, 놀라서 움츠러들었다. 내가 너무 성급했던 걸까? 「말과 민주주의」 원고에 마음이 쏠린 나머지 주변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한 걸까? 지금까지 나는 내심 사무실의 다른 선배들보다 부장님과 마음이 통한다고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이젠 부장님의 심중을 읽을 수 없어 답답했다.
   그뒤로 나는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나 온 신경은 부장님 쪽으로 향해 있었다. 부장님 자리에 전화가 걸려오면 저절로 귀를 세우게 되었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표 나지 않게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들어 파티션 너머로 쳐다보았다. 화장실에 가는 건가? 혹시 대표님을 만나러 가는 길인가?
   오래지 않아 나는, 짧은 전화가 걸려오고 나서(그가 대답할 틈도 없이 끊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가 검은색 가죽 다이어리를 챙겨 일어나면 대표님의 호출을 받은 게 틀림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적어도 이틀에 한번, 또는 하루에 두번 세번까지도 3층에 올라갔는데, 사무실로 돌아온 뒤 혹시 나를 부르지 않을까 기다렸지만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알고 보니 부장님이 하루에도 두번 세번씩 3층에 불려가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일본의 거물급 저자인 와다 켄이찌의 신작 출간을 앞두고, 번역 출판권을 따내는 경쟁에 참여할지 고민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와다 켄이찌 선생은 거장의 반열에 오른 역사 저술가로, 대표님과 세대가 같았다. 젊은 시절 선생의 대표 삼부작을 푸른서재에서 출판했는데, 그게 베스트셀러가 되며 한국시장에 이름을 알린 인연으로 오랫동안 우리 회사와 파트너 관계를 맺어온 작가였다. 그러나 약 십년 전부터는 다른 회사들에서도 번역서를 출간하면서 일대일 파트너 관계는 깨진 상태였다.
   5월이 되면서는 해외 판권 담당인 영인 선배도 부장님과 함께 위층에 다녀오는 일이 잦아졌다. 화요일, 점심 산책을 나갔을 때 영인 선배가 말했다.
   “1억으로 최종 제출했어요.”
   모두들 헉 소리를 냈다.
   “그렇게까지요? 그만큼 팔릴까요?”
   “언젯적 와다 켄이찌라고요.”
   선배들이 반문했다.
   “함께했던 시간이 있으니 성의 표시를 한 것이기도 해요. 대표님이 고민 많이 하셨어요. 5년 만에 낸 책인데 입찰에 아예 응하지 않는 것도 예의가 아니고요. 무리이긴 하지만 된다면 최선을 다해 만들어보자, 이런 생각이세요. 오랜만에 낸 대작이니 어느 정도는 나갈 거예요.”
   “선배가 보시기에는 어때요? 저희가 될까요?”
   내가 물었다. 번역 출판권을 따낸다면 대표님의 기분이 좋아질 테니, 「말과 민주주의」 건에도 조금이나마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글쎄요, 우리가 가장 많이 제시한 쪽은 아닐 거예요. 과거의 인연 때문에 선택해줄 확률은 있지만.”
   갑자기 영인 선배가 말을 멈췄다.
   주차장에 흰색 벤츠가 들어와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 지우히메가 작은 토트백을 들고 내리더니, 우리 쪽으로 고개를 까딱 숙여 보이고 지나갔다. 큰 키에 세련된 머리 스타일이며 광택이 나는 피부가 정말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두 아이를 둔 엄마라고는 전혀 짐작도 못할 듯했다.
   “지금 출근하나봐요.”
   은희 선배가 말했다.
   “우리 얘기 들은 거 아니겠죠? 대표님 어쩌고 하고 있었잖아요.”
   “그러게. 에이, 뭐 어때요. 이상한 말 한 것도 아닌데.”
   빛나 선배와 은희 선배가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영인 선배는 물끄러미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건물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입찰 결과가 발표되는 금요일에는 아침부터 회사 전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오후 늦게, 영인 선배가 전화를 받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부장님 옆으로 갔다. 어두운 표정에서 결과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나중에 선배에게 들으니 저자가 에이전시를 통해, 대표님께 따로 유감의 뜻을 담은 메시지를 보내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퇴근 직전에 방명원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5월이 되었는데도 아무런 연락이 없으니 어떻게 되어가는지 무척 궁금했을 터였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각산재단에 지원금을 돌려드리겠다고 말했는데, 오히려 역효과를 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