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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39회

형민은 딸을 낳고 한달이 지나도록 출생신고를 하지 못했다. 아이 이름을 짓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평범하면서도 친구들에게 놀림 받지 않을 그런 이름을 짓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형민이 며칠을 고민해 겨우 이름 하나를 생각해내면 아내가 이런 말을 했다. 동창 중에 그 이름이랑 같은 아이가 있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집에 화재가 나서 죽었다고. 그러니 안 된다고. 그리고 또 형민의 아내가 이름을 말하면 형민이 대꾸했다.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의 이름이라고. 늘 지루하고 우울한 얼굴이었다고. 형민의 어머니는 매일 전화를 걸어 잔소리를 했다. 딸이 태어났을 때, 형민은 병원 앞에 있는 추어탕 집에서 장인어른과 술을 한잔 마셨다. 장인이 고맙다고 형민에게 말했다. 나는 딸이 태어난 걸 못 봤거든. 딸의 이름도 아내가 지었지. 장인은 말했다. 그날 형민은 장인이 젊은 시절에 중동으로 돈을 벌러 갔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장인은 중동으로 떠난 뒤 한달 후에야 아내가 임신했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리고 여덟달이 지난 후에 아이가 태어났다는 편지를 받았다고 했다. 그 편지에는 눈도 뜨지 못하는 갓난아이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장인이 형민의 잔에 술을 따르면서 말했다. 그러니 손녀 이름만은 내가 지어주면 안 되겠나? 형민은 장인어른의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랐다. 아버님. 그렇게 말하고 형민은 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마지는 않았다. 아버님.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되겠어요. 제 첫 딸이거든요. 장인이 그 말을 듣고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 내가 생각이 짧았네. 딸의 이름을 짓지 못하자 형민은 왠지 장인 보기가 껄끄러워졌다. 겨우 이런 이름을 지으려고 내 부탁을 거절했나. 나중에 그런 소리를 들을 것만 같았다. 출생신고 기한이 지나자 아내가 재미있는 제안을 하나 했다. 서로 좋아하는 단어를 다섯개씩 적어낸 다음 제비뽑기를 해보자는 거였다. 나중에 우리 딸이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는 사실을 알면 실망하지 않을까? 형민이 묻자 아내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쩌면 재미있어 할지도 몰라. 그래도 혹시 애가 실망하면 너무 심각하게 살지 말라는 깊은 뜻이 있다고 말해주자. 아내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형민은 이름의 뜻보다 못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봤다고 아내에게 말했다. 그러자 아내도 그렇다고 했다. 형민은 자기 이름에서 민이라는 글자를 하나 적어 냈다. 그리고 하, 연, 효, 경,이라는 단어를 적었다. 아내는 비밀이라고 보여주지 않았다. 열개의 종이를 식탁에 던졌다. 그리고 부부는 가위바위보를 했다. 형민은 보를 냈다. 가위를 내서 이긴 아내가 종이 하나를 집어들었다. 하,라는 글자가 나왔다. 형민이 종이 하나를 집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종이를 집었다. 거기에는 영,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부부는 동사무소로 가서 벌금 만원을 내고 출생신고를 했다. 박하영은 이름 때문에 친구들한테 박카스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형민의 아내는 딸에게 박카스는 지친 사람들이 기운을 내기 위해 마시는 음료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니 좋은 뜻이라고.

형민의 딸은 초등학교 육학년 때 단짝 친구를 사귀었다. 이름이 영하였다. 하영과 영하. 이름만 봐도 단짝이 될 운명을 타고난 것 같았다. 영하가 전학을 오던 날, 하영은 배탈이 나서 양호실에 누워 있었다. 그래서 전학생이 왔다는 사실을 몰랐다. 양호실에서 약을 먹고 한잠을 자고 나니 몸이 괜찮아졌고, 그래서 하영은 교실로 돌아왔다. 체육시간이어서 반 아이들은 모두 운동장에 나가 있었다. 교실로 들어온 하영은 창틀에 걸터앉은 채로 운동장을 내려다보는 영하를 발견했다. 누구? 하영이 물었다. 그러자 영하가 말했다. 전학생인데,라고. 부반장이었기 때문에 하영은 전학생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고 그래서 전학 온 걸 축하한다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반가워. 하영이가 영하의 손을 잡았다. 악수를 하다가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영하가 마카롱 하나를 하영에게 주었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네는 친구에게 줄 생각으로 챙겨온 선물이라고 했다. 하영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카롱을 먹어보았다. 영하의 어머니는 까페를 했다. 마카롱도 거기에서 파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셔서 보험금으로 어머니가 까페를 차렸는데, 그 근처로 이사를 해야 해서 전학을 온 거라고 영하가 말했다. 하영이는 부모님이 이혼을 해서 어머니와 둘이 산다고 말했다. 둘은 잠들기 전에 삼십분씩 카톡을 했다. 하영이는 아이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친구와 이야기를 주고받기 위해 영하가 좋아하는 아이돌을 따라 좋아했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둘은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 모습을 본 형민의 아내가 웃었다. 누가 보면 영영 헤어지는 줄 알겠다. 형민의 아내가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딸의 사진을 찍으면서 말했다. 둘은 같은 중학교에 배정되었다. 영하가 형민의 아내에게 말했다. 아줌마. 그래도 같은 반은 안 될 수도 있잖아요. 영하의 부모님은 오지 않았다. 형민이 같이 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더니 영하가 거절했다. 엄마랑 가게에서 피자 먹기로 했어요. 영하가 말했다. 그리고 언제 울었냐는 듯 둘은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크리스마스이브에 하영이 만나자는 메시지를 보냈을 때 영하는 미국에 있는 이모네 집에 잠깐 놀러갔다 올 거라는 답을 보냈다. 갔다 와서 보자. 예쁜 거 사다줄게. 그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방학이 끝날 때까지 영하는 하영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영하와 하영은 다른 반으로 배정되었다. 개학식이 끝나고 하영은 교문 앞에 서서 영하를 기다렸다. 영하가 다른 아이들과 웃으면서 운동장을 건너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하영이 손을 흔들었다. 영하는 손을 흔들지 않았다. 안녕. 영하가 하영을 지나치면서 무뚝뚝하게 인사를 했다. 혼자 남은 하영은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영하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속상해서 저녁을 굶었다. 다음날, 하영은 다시 교문 앞에서 영하를 기다렸다. 이번에는 영하 혼자 걸어오고 있었다. 안녕. 하영이 영하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영하가 하영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친구하자고. 새 친구가 생겼다고. 그날, 하영이는 미끄럼틀 안에 들어가 울었다. 하영이가 다녔던 유치원에 있던 미끄럼틀이었는데, 놀이기구가 아니라 화재시 탈출을 위해 만들어진 거였다.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서 맨 아래에서 거꾸로 걸어 올라가면 중간에 있는 평평한 곳까지 갈 수 있었다. 하영이는 거기 쪼그리고 앉아 울면서 생각했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에 대해. 그러면서 혹시 영하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기도 했다. 하영의 비밀장소를 아는 사람은 영하밖에 없었으니까. 하영은 속상할 때마다 그 안에 들어가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렇게 한참 노래를 부른 다음, 미끄럼을 타고 밖으로 나오면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긴 마라톤 경주를 마친 선수가 된 기분이 들었고 그러면 우울한 기분이 사라졌다. 땀이 식기 전에 근처 약국에 가서 박카스를 한병 사먹고 기운을 냈다. 영하가 절교를 선언한 날, 그날 하영은 노래를 부르지도 않고 박카스를 사먹지도 않았다. 대신, 영하가 먼저 말을 걸기 전까지 자기도 말을 걸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을 했다. 그리고 삼년이 지난 후, 하영은 미끄럼틀을 다시 찾아갔다. 살이 쪄서 미끄럼틀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겨우 겨우 중간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통 안에 누웠다.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나지 않았다. 좁고 어두운 통 안에 갇혀 있다보니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여기서 죽어버리면 아무도 찾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하영이는 미끄럼틀 안에서 약을 먹고 죽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제야 눈물이 났다. 눈물이 나자 친구가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의 문구가 생생하게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