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4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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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튿날 오후 늦게, 방명원 선생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초조함이나 의혹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가 이미 부장님을 통해 모든 사정을 전해 들었다는 걸 알았다. 그게 언제였을까? 어제였을까, 아니면 오늘이었을까? 나는 그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과거의 제가 내린 판단에 대해 책임을 질 때가 온 것 같네요.”
   그 말을 들으니 정말 끝이라는 실감이 몰려왔다. 그렇다면 이건 마지막 통화가 될 터였다. 선생님을 한번 만나보지도 못했는데, 모니터에 흐릿한 사진을 띄워놓고 보는 사이 내 마음속에 생겨난 이미지를 실제의 그와 견주어볼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이제 영영 상관없는 사이가 되는 것이다. 마음의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뭔가가 내게서 떨어져나가고 있었다.
   “지향 선생님께도 면목이 없네요. 그동안 관심 갖고 애써주셨다는 걸 알아요.”
   면목이 없는 건 접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이 상황에 꼭 들어맞는 말은 아닌 듯했다. 몇초간 침묵이 흐른 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선생님, 그럼 「말과 민주주의」는 어디서 나오나요?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셨어요?”
   “주변 교수님들께 여쭈어보니 자비출판 형식으로 낼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원고는 이미 완성되었으니까 적당한 회사만 찾으면 책으로 나오는 건 금방일 것 같아요.”
   각산재단의 홈페이지에서 봤던 각산총서 1권, 2권의 표지가 떠올랐다. 이제 얼마 후면 그와 비슷한 표지에 ‘말과 민주주의’라는 제목이 박힌 3권을 저술지원사업 페이지에서 보게 될 터였다.
   “푸른서재에서 첫 책을 내는 게 꿈이었다고 하셨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작가의 말에 그 얘기를 멋지게 써보려고 생각도 해두었는데.”
   선생님은 너스레를 섞어 말했지만, 그 순간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선생님, 그 원고, 정말 좋은 원고예요. 알고 계시죠? 저는 경력도 얼마 되지 않았고 아는 것도 별로 없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게 좋은 원고라는 건 확신할 수 있어요. 제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는 않겠지만요. 그건 정말로 좋은 책이에요. 지금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담론이고요.”
   ‘담론’이라는 단어를 실제로 입 밖으로 발음한 건 처음이었다. 내 목소리가 너무 비장했는지 그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서로 고맙다는 인사를 주고받았다.
   내가 쓴 파란색 글씨와 그가 쓴 빨간색 글씨가 빼곡히 적힌, 커다란 집게로 물린 「말과 민주주의」 교정지는 책상 서랍 맨 아래 칸으로 들어갔다. 이후로 방명원 선생님이 회사 쪽에 일정 비용을 지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정확한 금액이 얼마인지, 세세한 처리가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과정을 치르며 그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떠올리면 마음이 무거웠다.
   조용한 오후,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문득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혹시라도 내가 뭔가를 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너무 쉽게 포기해버린 건 아닐까.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3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사직서라고 적힌 흰 봉투를 단검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에 쥐고 흔들며 대표님에게 “「말과 민주주의」를 출간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사표를 내겠습니다!” 하고 외치는 모습이었다.
   “어느 총서에 속하건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한가요. 중요한 건 이게 정말 좋은 책이라는 거 아닌가요? 약간의 흠결을 감수하고라도 이건 꼭 푸른서재에서 나와야 할 책이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상상 속에서도 이 장면은 비장하거나 감동적이라기보다 생뚱맞고 우스꽝스러웠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대표님이 내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한번도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본 적이 없었으니까. 대표님이 놀란 얼굴로 “그런데 넌 누구지? 우리 직원인가……?”라고 말하는 장면이 떠오르자 그만 맥이 빠졌다.
   이건 개인적인 일이 아니잖아. 감상적으로 굴 일이 아니야. 나는 애써 마음을 추슬렀다. 그러나 이상하게 잘 되지 않았다. 뭔가가 내 안에서 떨어져 나갔는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사이 편집부에는 생각지 못한 불똥이 날아들었다. 인문한국사업단 총서 일이었다. 대학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착오가 있었다며 상반기에 두권의 책이 아니라 네권의 책이 출간되어야 한다고 알려온 것이었다. 그렇게 「말과 민주주의」 원고 대신, 내 손에는 총서 3권의 교정지가 들어왔다. 1, 2권을 부장님이 마무리하는 사이 3권은 내가, 4권은 영인 선배가 맡아 서둘러 교정을 보기로 했다. 어느 사이에 부장님과 영인 선배, 나 세 사람은 테스크포스 팀 비슷한 것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