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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40회

형민의 딸은 영하에게 절교선언을 당한 뒤에도 부모님에게 거짓말을 했다. 오늘은 영하랑 떡볶이를 사먹었어. 영하가 중간고사를 망쳐서 울었어. 영하가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는데 안 갔어. 그렇게 거짓말을 하다가 서서히 다른 친구들 이야기를 곁들였다. 같이 급식을 먹는 친구들 이야기로. 그렇게 몇달이 지나자 형민의 아내는 딸이 단짝 친구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그냥 다른 반이 되어서 멀어졌다고 생각했다. 그 나이 때 자신도 그랬듯이.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자연스럽게 새 친구를 사귀었다고. 하영은 다시는 단짝 친구를 만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넷이나 다섯. 항상 그런 무리 속에 있으려고 노력했다. 일학년 때는 첫날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급식을 먹었던 아이들하고 어울렸다. 그날 하영은 육인용 테이블에 앉았다. 밥을 먹기 전에 서로 인사를 했다. 그중 셋은 초등학생 때부터 알던 사이였다. 여섯은 몰려다니기에 적당한 숫자였다. 하영이 억지로 말하지 않아도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영은 그중 몇몇이 따로 단체 메시지 방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냥 같이 점심을 먹고, 전날 본 텔레비전 이야기를 하고, 시험을 망치면 위로를 하는, 그런 관계로 만족했다. 그러다 2학년이 되었고 어울렸던 다섯명의 친구 중 둘이 같은 반이 되었다. 학기 초에는 셋만 다니다가 토론 수업에 같은 조가 된 것을 인연으로 두 친구가 합류해서 다섯이 되었다. 3학년 때는 그중 한명이 같은 반이 되었다. 그런데 1학년 때 어울렸던 다섯명의 친구 중 둘이 또 같은 반이 되어서 하영이까지 넷이 모여 다니게 되었다. 그중 미진이랑은 3년 내내 같은 반을 했다. 너 닭 싫어하면 내가 먹을까? 그게 미진이가 하영이에게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마지막으로 먹으려고 남겨둔 것이었지만 하영은 그걸 미진에게 주었다. 미진은 농담을 잘해서 인기가 많았는데,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방송국 공채시험에 합격한 개그맨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포졸이나 까페 손님으로 몇번 방송 출연을 한 적도 있었지만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잘나가는 동기들을 보면서 미진의 아버지는 울분이 생기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렸다물론 잘 되지 않았고 그래서 마음을 수련할 생각으로 요가학원을 다녔다. 거기서 우리 엄마를 만났잖아. 미진은 부모님의 연애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자주 들려주었다. 미진의 엄마는 요가 선생님이었고 미진의 아버지는 이벤트회사 사장이었다. 덕분에 미진의 반은 체육대회에서 늘 응원상을 받았다. 그랬던 미진과는 고등학교도 같이 진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같은 반이 되어서 미진은 하영에게 이러다가 육년 내내 같은 반을 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내가 그런 게 아니야. 그 미진이가 그런 거라고.” 하영은 형민에게 그렇게 말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하영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난 그냥 미진이 뒤에 서 있었을 뿐이라고. 그냥 미진이가 말을 하면 고개를 끄떡였을 뿐이라고.” 형민은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는 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 형민은 성당에 가서 예배를 올린 적이 있었다. 아내의 병실은 5층이었는데 거기서 밖을 보면 성당의 첨탑이 보였다. 형민은 그곳까지 걸어갔다. 병실에서 봤을 때는 가까워 보였는데 막상 걷다보니 꽤 멀었다. 성당에 들어갔더니, 새벽이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형민은 맨 뒷자리에 앉아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형민은 두 손을 맞잡고 눈을 감았다. 그날 형민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도를 해보았는데 어색해서 그런지 적당한 기도문이 떠오르지 않았다. 형민은 고개를 들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상을 보았다. 한참을 바라보자 진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너무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 않도록 해주세요. 너무 크게 성공하지 않게 해주세요. 형민은 그렇게 기도를 했다. 형민은 성당에 가서 기도를 했다는 사실을 아내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막상 기도를 하고 나니 그게 딸을 위한 기도인지, 자신을 위한 기도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형민은 딸이 진심으로 그렇게 자라길 바랐다.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애쓰지 않고 살아가기를. 성공을 해서 망가진 사람들. 혹은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성공한 사람들. 형민은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형민은 딸이 높은 자리에 오르려다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길 바랐다. 형민은 물을 한잔 마셨다. 그리고 식탁에서 일어나 정수기에서 다시 물을 한잔 받았다. 그 자리에 서서 물을 마셨다.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그런 게 아니에요. 난 그냥 뒤에 서 있었어요. 딸이 한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 안에 겁 많고 야망도 없는 박형민이라는 십대 소년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때 그렇게 기도를 하지 말았어야 했어. 형민은 뒤늦게 후회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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