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4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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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대학의 인문한국사업단 총서 출간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한달 보름이었다. 여덟명의 필자들이 보내온 원고 파일을 열어보니 문장부호를 통일하고 맞춤법과 외래어표기법을 체크하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선배, 이거 쉽지 않겠는데요.”
   나는 파티션 너머로 영인 선배에게 말을 걸었다.
   “4권도 마찬가지예요. 심지어 글 중 하나가 ‘인문 학술지의 간략한 역사’인데 인명과 지명이 무시무시하게 많네요.”
   삼교까지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일정이었고, 나와 영인 선배가 각각 3, 4권의 초교를 봐서 넘기면 부장님이 한번 읽고 마무리를 하기로 했다. 나날이 야근을 하는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말과 민주주의」로 속을 끓이고 있었는데, 마음을 달랠 새도 없이 다른 원고를 붙들고 씨름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6월이 닥쳐왔다. 참고삼아 다른 총서들을 뒤적이다보면 새삼 이 세상에는 정말로 많은 총서가 존재하는구나 싶어 놀랍기까지 했다. 지금껏 푸른서재에서 나온 총서의 이름만 떠올려도 열손가락을 금세 채울 수 있었다. 그런데 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금을 받은 총서는 되고 각산재단의 지원금을 받은 총서는 안 된다는 걸까. 따지고 들면 실은 확고한 기준 따위는 없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면 속이 상해 입이 꾹 다물어졌다.
   어느때보다도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할 시기라고 스스로 다그쳐도 보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이상하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어느날, 야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보니 당장 내일 입을 옷이 없었다. 개수대에는 말라붙은 밥공기와 접시가 쌓여 있었고, 내다놓지 않은 재활용 쓰레기도 세봉지나 되었다. 얼른 빨래부터 돌리자. 급한 일부터 처리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겉옷을 벗어 스르륵 방바닥에 내려놓고 그 옆에 허물어지듯 드러누웠다.
   눈을 떴을 때는 놀랍게도 아침 8시 15분이었다. 목과 어깨에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빨래는커녕 세수도 하지 않고 잠이 든 것이다! 급히 머리를 감은 다음 거울을 보는데 옷깃에 눌렸는지 왼쪽 뺨에 칼자국처럼 굵고 깊은 한줄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 위에 선크림을 펴 바르는데 스스로에 대한 못마땅함인지 안쓰러움인지 모를 감정이 치밀었다.
   밤늦게까지 야근을 해도 마음이 뿌듯하고 아침 일찍 눈이 떠지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어떻게 그랬지. 나는 한산한 마을버스 뒷자리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했다. 그때의 뿌듯함은 또렷하게 기억이 났지만, 그 에너지를 되살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날 밤, 저녁을 먹고 자료를 찾으러 회의실에 들어갔다가 영인 선배와 마주쳤다. 선배는 벽에 기대 휴대전화로 동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나를 보고는 화면을 끄고 전화기를 재킷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기 동영상 보시는 거예요?”
   서가에서 책을 몇권 꺼내며 내가 물었다. 선배 역시 나처럼 날마다 야근을 하고 있었다.
   “아기 되게 보고 싶으시겠어요.”
   별것 아닌 말인데, 지금껏 선배에게 이런 말을 건네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많이 컸겠다고 말하려다가 선배의 아기가 몇개월인지 생각이 나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내가 7월에 입사할 때 출산휴가에 들어가고 바로 아기를 낳았으니까…… 나는 얼른 머릿속으로 개월수를 헤아려보았다.
   “선배, 저도 아기 보고 싶어요. 영상 하나만 보여주세요.”
   “정말요?”
   선배의 눈에 놀라움이 스치더니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켠 것처럼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영상 하나를 찾아 보여주었다. 거실을 배경으로 아기가 누군가의 손을 잡고 한발짝 한발짝 걸음마를 하는 모습이었다. 선배를 닮은 반짝반짝한 둥근 눈, 뿌듯함으로 가득 찬 얼굴을 보고 있는데, 새삼 시간의 흐름이 실감이 났다. 내가 입사한 뒤로 아기가 걸음마를 뗄 정도의 시간이 지났구나.
   “금요일 저녁 KTX 표 끊어놨어요. 월화수목 야근하는 걸로 충분하지 않나? 금요일은 무조건 칼퇴할 거예요.”
   선배는 휴대전화 화면을 끄고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제 회의실에서 나갈 줄 알았는데, 선배는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런데 지향씨는 괜찮아요?”
   “저요?”
   “방명원 교수 원고 때문에 많이 속상했죠?”
   뜻밖이었다. 다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초교까지 보고 나서 그렇게 엎어지는 일은 사실 흔치 않죠. 속상할 만해요.”
   그 말을 듣는데 갑자기 눈 안쪽이 뜨거워졌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선배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