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42회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알지만, 낙심이 돼요. 정말 좋은 원고였거든요. 우리 회사에서 나왔으면 참 좋았을 텐데. 선배, 자비 출판으로 나오는 책은 담당 편집자도 없겠죠? 표지도 엄청 이상하겠죠?”
   선배가 빙긋 웃었다.
   “그보다 유통과 홍보가 문제죠. 출판사에서 보도자료를 써서 내보내는 책과는 많이 달라요. 언론에 리뷰 기사도 안 실리고, 서점 납품도 한계가 있고요. 안타깝긴 하네요. 그분 입장에서도 첫 책인데 잘 만들어서 기사도 실리고 주목받으면 좋았을 텐데.”
   그 말을 들으니 더욱 안타까웠다.
   “제가 보도자료에 인용할 부분들도 다 체크해놓았었거든요.”
   그 말을 하는데 마음속에서 뭔가가 복받쳤다. 「말과 민주주의」를 둘러싼 일들, 그리고 이어진 강행군으로 점점 압력을 더해가며 쌓여가던 감정이 뚫고 나올 곳을 찾은 것처럼 눈물이 터졌다.
   “지향씨, 그 원고 많이 좋아했구나.”
   선배는 테이블 끝으로 가서 티슈를 여러장 뽑아 와 내 손에 쥐어준 다음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내가 느끼던 것 이상으로 많은 것들이 쌓여 있었던지, 눈물이 쉽게 멈추지 않았다. 한참 펑펑 울고 난 뒤에야 겨우 눈물이 잦아들었다.
   “지향씨가 책 가지고 그러는 걸 보니 갑자기 기분이 이상하네요.”
   티슈로 얼굴을 꾹꾹 눌러 닦고 코를 풀고 있을 때 선배가 말을 건넸다.
   “옛날 생각이 나네요. 책 때문에 마지막으로 울어본 게 언제였더라. 그런 때가 있긴 있었던가?”
   선배가 콧등을 찌푸리며 웃었다.
   “언젠가부터 일은 그냥 일이 되었어요. 이렇게 하라고 하면 이렇게 하고, 그렇다고 하면 그런가보다 하고. 책이 나와도 이젠 물건처럼 보여요. 판매를 위한 물건. 하자만 없이 만들어지면 그걸로 다행인 거고.”
   차분하게 말하는 영인 선배를 보는데, 조금 전 영상에서 봤던 아기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내 앞에 앉은 그녀의 얼굴이 어쩐지 조금 낯설게 보였다. 지금껏 내게 그녀는 회사의 직원이자 선배였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아이의 엄마이자 누군가의 가족인 그녀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었다.
   “선배도 힘드시죠?”
   “그러게요. 힘드네요.”
   선배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이 낳기 전에는 월급이 적다는 생각도 안 들었고, 야근이 많은 것도 그다지 힘들다고 생각 안 했거든요. 어차피 남편도 항상 늦게까지 일하기도 하고.”
   그녀가 남편과 캠퍼스 커플이었다는 것, 그리고 남편이 시민단체에서 일한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대학 동기들이 대기업에 들어가고 연봉이 얼마라는 얘기를 들을 때도 전혀 부럽지 않았거든요. 남편이나 나나, 대학생 때도 다 끝난 운동한다고 다녔던 사람들인데, 뭘. 오히려 그 길을 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지. 그런데 요즘은 있잖아, 아기 낳은 대학 동기들이 마음 편히 육아휴직 쓰고, 비싸고 좋은 것만 애한테 먹이는 걸 보니 마음이 참 복잡해요.”
   선배는 내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책 몇권에 눈길을 주었다.
   “그런데 지향씨를 보니까, 오랜만에 옛날 생각이 나네요. 이게 그냥 일이고 물건이고 직업이 돼버린다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겠죠. 여러 생각이 드네요.”

 

*

 

   금요일 저녁, 영인 선배와 함께 나도 6시 정각에 사무실에서 나와 출퇴근 카드를 찍었다. 오랜만에 퇴근하는 발걸음이 경쾌했다. 하나 언니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해 질 녘의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약속 장소를 향해 걸었다.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언니를 마지막으로 만난 게 벌써 두달 전이었다. 선욱씨가 막 입사했을 때였다. 그 뒤로 내게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지 언니에게 들려주고 하소연할 생각을 하니 걸음이 바빠졌다. 짧은 순간이나마 사직서를 손에 들고 대표님 방에 올라가 담판을 지을까 고민했다는 이야기도 꼭 해야지.
   식당에 들어가자 안쪽 테이블에서 언니가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자리에 앉아 만두전골과 맥주 한병을 주문한 뒤, 언니가 말했다.
   “지향아, 음식 나오기 전에 중요한 얘기부터 할게. 나 이번 달까지만 일하고 퇴사하기로 했어.”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벌린 채 언니를 쳐다봤다. 오는 길에 내가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준비한 화제들의 무게가 순식간에 쪼그라들어 납작해지는 걸 느끼며.
   “언니, 이직하는 거야? 아니면……?”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원룸도 정리할 거야.”
   언니가 담담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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