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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8회

“고등학생 때는 욕쟁이 할머니가 나오는 드라마를 좋아했어요. 제목은 기억이 잘 안 나네요. 그 할머니가 설렁탕집을 했는데, 일찍 죽은 남동생의 아이들을 친자식들처럼 키우는 내용이었어요.” 그는 어머니가 그에게 짜증을 내는 것보다는 욕쟁이 할머니에게 욕을 듣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런 욕이라면 상처받지 않고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환상이 사라진 것은 몇년이 지난 후였다. 스물두살 때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던 여자와 잠깐 사귄 적이 있었다. 이름이 연정이었다. 영화를 보다가도, 술을 마시다가도, 옛이야기를 하다가도, 여자는 울었다. 여자가 울 때마다 그는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눈물을 닦은 뒤 여자는 손수건을 자기 가방에 넣었다. 빨아 줄게요. 그렇게 말했지만 한번도 손수건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는 그 여자와 욕쟁이 할머니로 유명해진 식당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여자는 할머니에게 욕을 듣자마자 울었고, 그러다보니 남의 가게에서 울고 지랄이라며 더 욕을 먹게 되었다. 남자가 우는 여자를 달랠 줄도 모른다며 그도 한바탕 욕을 먹었다. 막상 욕을 먹으니 기분이 나빠졌다. 욕은 욕이구나.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하나 알게 된 사실도 있다. 여자가 욕을 듣는 순간 기분이 시원해졌다. 그는 당황스러웠다. 여자가 욕을 듣는 걸 보는 게 즐겁다니. 그날 그는 여자와 헤어지기로 결심을 했다. 여자에게 헤어지자 말을 하던 날, 백화점에 가서 고급 손수건을 샀다. 여자가 울면 그 손수건을 건네줄 생각이었는데 여자는 울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동안 그에게 섭섭했던 일들을 한시간도 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는 자신이 속 좁은 놈이면서 융통성 없는 놈이면서 또 속없는 놈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대 시절 그는 속 좁은 아버지를 빼다 닮았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가 아내와 연애를 할 적에 동창들과 몇번 술자리를 가졌는데, 그때마다 친구들은 그의 학창시절 별명이 성인군자였다며 놀리곤 했다. 박형민 화나게 만들기. 우리끼리 그런 게임도 했다니까요. 그것 때문에 내가 이 자식에게 정강이를 차였잖아요. 민식은 그의 뒷자리에 앉아서 그의 등에 낙서를 했다. 그는 두번을 참았다. 그리고 세번째 낙서를 하던 날, 수업 중이었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 민식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 일이 있은 후에 단짝 친구가 된 민식은 술만 취하면 바지를 걷어 그의 아내에게 보여주었다. 어찌된 일인지 민식의 정강이는 늘 멍이 들어 있었고 그래서 매번 그때 맞은 게 아직도 이렇답니다,라는 농담을 했다. 그의 아내는 민식의 정강이를 보고 난 뒤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잘 맞았네요, 하고. 그날 그는 민식이의 정강이를 한번 찼지만 민식은 그의 정강이를 두번이나 찼다. 그는 그 사실을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다. 민식이도 말하지 않았다.

“아내는 거래처 회사의 직원이었어요. 그 회사에 전화를 걸면 늘 아내가 받았죠. 한 육개월 정도. 서로 그렇게 통화만 했죠.” 아내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이 이야기를 더 해야 하는지 잠시 망설였다. 사회자가 이혼소송을 진행 중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사회자의 아내도 아나운서였는데, 위자료를 놓고 싸우다 보니 지저분한 일들까지 대중에게 밝혀지곤 했다. 그는 이혼소송이 아직도 진행 중인지 아닌지 궁금해졌다. “연애도 드라마처럼 했나봐요. 왠지 멋진 사연일 것 같아요.” 사회자가 말했다. 그는 그렇게 멋진 사연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오히려 바보 같은 이야기예요. 아내가 전화를 받을 때면 꼭 말실수를 하게 되었어요. 왜 그런지 모르지만 긴장이 되었죠. 한번은 이런 적도 있었어요. 날이 추워요, 감기 조심하세요. 그렇게 말을 해야지 하고 미리 생각을 해두었는데 감기 걸리세요, 하고 말이 나왔어요.” 그렇게 말하고 그는 웃었다. 그가 웃자 방청객 사람들이 따라 웃었다. “그런데 제가 그 말을 한 날 아내가 정말 감기에 걸렸더라구요. 그게 아내와 제가 만나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감기 걸리세요,라는 말실수를 하고 사흘이 지난 뒤 그는 주문서를 넣기 위해 거래처에 전화를 걸었다. 코맹맹이 소리로 아내가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전화를 건 사람이 그라는 걸 알자 대뜸 화를 냈다. 당신이 감기 걸리라고 말해서 정말로 감기에 걸렸어요. 그날 저녁, 그는 약을 사서 아내의 회사 앞으로 갔다. 그가 아내에게 사과를 했다. 미안해요. 쌍화탕과 한약 냄새가 나는 가루약을 먹은 다음 아내가 말했다. 괜찮아요. 며칠 동안 코를 풀어댔기 때문에 그날 아내의 코는 빨갛게 헐어 있었다. 그는 그 모습을 보자 사슴 코가 생각났고, 마침 며칠 후에 크리스마스 이브였기 때문에, 그는 그 자리에서 데이트를 신청했다. 결혼한 뒤 그의 아내는 그날 데이트 신청을 받아준 것은 쌍화탕 때문이라고 말했다. “제가 그날 쌍화탕이 식을까봐 품에 안고 있었거든요. 전 오랫동안 아내가 그런 제 모습에 반했다고 생각했어요.”

드라마에서 진구는 종종 밥을 했다. 할아버지가 바쁠 때면 저녁밥을 짓는 건 항상 그의 몫이었다. 밥공기를 아랫목 이불 밑에 묻어두었다가 형이 오면 한그릇, 할아버지가 오면 또 한그릇, 그렇게 밥을 꺼내 상을 차렸다. 민지가 낮잠을 자다 발로 밥공기를 걷어차는 장면을 찍을 때도 있었다. 진구와 민지는 이불에 묻은 밥풀을 떼어내 먹었다. 그는 그 장면을 찍을 때 민지가 밥풀을 먹는 게 싫다고 울었던 것이 생각났다. 거지같이 어떻게 먹어. 민지가 말했다. 그는 민지에게는 먹는 시늉만 하라고 하고 자신이 다 먹었다. 그의 어머니는 겨울이면 그의 옷들을 이불 밑에 묻어두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하기 전, 그의 어머니는 이부자리를 걷고 그 자리에 아들이 입을 바지와 티셔츠와 양말과 장갑을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이불을 덮었다. 그가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는 동안 옷들은 따뜻하게 데워졌다. 그는 그렇게 따뜻해진 옷을 입는 게 좋았다. “다시는 아랫목에 묻어둔 옷을 입는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곤 해요.” 그는 사회자에게 말했다. 그런 기억 때문에 쌍화탕을 품에 안고 있었을 거라고. 진구와 어머니가 자신에게 만들어준 추억 덕분에 아내를 만나게 된 거였다고. 그는 그렇게 믿었다. 딸이 태어났을 때 그는 아이의 내복을 이불 밑에 묻어두는 걸 좋아했다. 보일러를 틀지 않는 여름이면 드라이기로 아이의 내복을 데워 입혔다. 그러고는 옹알이를 하는 아이에게 말했다. 뽀송뽀송. 좋지? 뽀송뽀송하고 말하면 아이는 그 말을 알아듣는 듯 웃었다. 그때는 모든 게 영원할 것만 같았다. 영원히 뽀송뽀송한 세계일 것만 같았다. 딸이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봄. 그는 아내와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