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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연재

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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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미 선배의 보고서는 남태평양의 ‘아일랜드 타임’에 대한 서술로 시작됐다. 그곳 사람들은 낮 1시에 만나 회의를 하기로 약속하면 2시쯤 하나둘 얼굴을 보이기 시작하고, 다 모인 뒤에도 이런저런 잡담을 늘어놓다가 3시쯤에야 겨우 회의를 시작하는데, 아일랜드 타임이란 이런 느긋한,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비합리적이고 속 터지는 남태평양 사람들의 시간관념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했다.
 나는 현미 선배가 입사 전에 외국에서 지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남태평양의 쿡아일랜드와 사모아 섬에서 일년간 지냈다. 커다란 여행가방과 함께 귀국했을 때 한국은 눈발이 흩날리는 겨울이었다. 면접이 있던 날, 그녀는 파주 출판도시에서 내려 푸른서재 건물을 찾아가면서 ‘이건 아닌데, 너무 빠른데……’ 중얼거렸다고 했다. 그동안 떨어져 지냈던 가족들과 여행도 가고 차분히 교정교열 수업도 들으려 했는데 푸른서재의 채용 공고를 보고, 또 대표님의 저서를 읽고 놓칠 수 없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고. 그녀는 귀국한 지 삼주 만에 면접을 치르고 입사했다. 볕에 그을린 팔다리에는 모기 물린 자국이 선명했고, 아일랜드 타임에 맞춰 시간을 계산하는 버릇도 아직 고치지 못한 채였다.
  ―지향씨, 저도 영인 선배가 참고하라고 주셨었어요.
  메일에서 현미 선배는 쓰고 있었다.
  ―대표님 저서에서 몇구절 인용을 해야 해요. 제목 아래 자서처럼 인용해도 되고, 본문에 넣어도 괜찮고요. 그리고 사진은 안 넣어도 되지만 넣는 게 좋다고 들었어요. 나중에 대표님 면담했을 때 사진을 기억하고 물어보시더라고요.
  보고서 중간에 작게 넣은 사진 두장에 눈길이 갔다. 해변에서 외국인들 틈에 섞여 발리볼을 하는 사진, 그리고 모래사장에 천막을 치고 음식을 먹고 있는 사진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열대 과일들이 놓여 있었다. 선배는 탱크톱에 펑퍼짐한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외국인들 사이에서 단번에 찾아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현지에 녹아든 모습이었다.
  남태평양의 어느 해변─내겐 말 그대로 지구 반대편 어딘가처럼 느껴지는 곳─에서 팔다리를 드러낸 채 웃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집 수영장에 있는 사람처럼 편안해 보였고, 그래서인지 강인함이 느껴졌다. 선배에겐 어딘지 모르게 한국적이지 않은 풍모가 있었다.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았고, 사무실이라는 큰 상자 안에서 하루하루 일어나는 자잘한 신경전에 무심했다. 그녀는 큰 키에 풍성한 긴 머리가 등을 덮고 있어서 언뜻 보면 여성스러운 인상을 주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화장을 전혀 하지 않았고 입술에도 투명한 보호제만 바르는 듯했다. 늘 해사한 얼굴이었지만 도무지 그늘이라곤 없어 보여서, 정말로 가까운 사이가 되기는 힘든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현미 선배의 전공은 문화인류학이었다. 섬에 머무는 동안 몇권의 문화인류학 고전이 흘러 흘러 손에 들어왔는데, 한권을 빼고는 전부 푸른서재에서 나온 책이었다고 쓰여 있었다. 그때는 출판사 이름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한글 텍스트가 귀했던 그곳에서 그녀는 그 책들을 책장에 손때가 묻도록 읽고 또 읽었다고 했다.
  나는 현미 선배의 보고서를 모니터 한쪽에 작은 크기로 띄워놓고 읽었다. 끝까지 읽은 다음 컵을 들고 정수기로 갔다. 믹스커피 한봉을 붓고 뜨거운 물을 받았다. 오후의 편집실은 조용했다. 이따금 들리는 타닥타닥 키보드 치는 소리는 오히려 조용함을 깨닫게 해주고 강조하는 효과를 냈다. 자리에 앉아 김이 오르는 뜨거운 커피를 조금씩 마시면서 사무실의 높은 천장과 조명, 책들이 가득 꽂힌 벽을 둘러봤다. 내 자리는 편집실 제일 안쪽, 벽을 등진 자리였다. 등 뒤에도 전면 책장이 있었고, 74년부터 푸른서재에서 출간한 책들과 참고자료들이 느슨한 질서체계에 따라 꽂혀 있었다. 무엇이 나를 이 자리까지 이끌었을까. 갑자기 생각이 여러갈래로 뻗어나갔다.

 

*

 

  나를 책벌레라고 부르던 사람이 있었다.
  내가 출판사에 취직했다는 걸 알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가끔 궁금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릴까. 아니면 이마를 찌푸릴까. 그런데 내가 직장인이 되었다는 걸 알고는 있을까. 아마 모를 것이다. 더는 대학생도 아니고, 이제 곧 서울을 떠나게 된다는 것도 모르고 있을 터였다.
  이런 변화의 순간을 그와 함께 나누지 못한다는 사실이 여전히 마음 아팠다. 앞으로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내가 어떤 사람이 되든 그는 그걸 알 수 없고 영영 모르리라 생각하면 생생한 아픔이 느껴졌다.
  나는 결정을 내리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사람이었다. 티셔츠나 운동화를 고를 때도 그랬고, 다른 중요한 결정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내가 대학 동기들 중 제일 먼저 취업해서 학교를 떠나는 사람이 되었으니,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까.
  준범과 나는 학교 안 까페테리아에서 아르바이트를 같이했다. 대학 기획처에서 운영하는 까페로, 자연과학관 1층에 널찍하게 자리 잡은 곳이었다. 아메리카노 한잔에 1500원, 두껍게 크림치즈를 얹은 베이글이 2000원으로 값이 싼데다가 당시에는 캠퍼스 안의 유일한 까페였기 때문에 언제나 손님이 많았고, 특히 점심 무렵에는 엄청난 주문이 밀려들었다. 아르바이트생들 중에는 경영학과, 경제학과, 국제관계학과 아이들이 가장 많았고 국문과는 나 혼자였다. 그는 내가 3학년이던 가을에 나타나 일을 시작했다. 귀티가 나는, 하얀 피부에 섬세한 생김새의 얼굴이었는데, 의외로 전역한 뒤 반년 동안 막노동을 하며 등록금을 벌고 복학했다고 했다. 일자리를 찾아 전국을 떠돌았는데, 그중엔 내 고향 도시의 조선소도 있었다. 조선소는 중년 남성들이 일하는 곳이라고만 생각했기에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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