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발칙한 아이들의 모험에서 일상 재건의 윤리적 책임감으로

2010년대 시와 시비평에 관하여

 

 

박상수 朴相守

시인, 평론가. 2000년 『동서문학』에 시, 2004년 『현대문학』에 평론으로 등단. 시집 『후르츠 캔디 버스』 『숙녀의 기분』, 평론집 『귀족 예절론』 등이 있음. susangpark@hanmail.net

 

 

1. 발칙한 아이들의 윤리적 모험과 자기애의 욕망

 

2006년 발표된 함돈균(咸燉均)의 평론 「아이들, 가족 삼각형의 비밀을 폭로하다」가 흥미로웠던 것은 진은영, 이민하, 김민정과 같은 (당시로서는) 젊은 시인들의 목소리를 “가족 삼각형 내부에서 가장 타자화된 자리인 ‘아이 꼭짓점’”1) 등장의 징후로 해석해냈다는 점에 있었다. 젠더의식을 갖춘 80년대 여성주체들의 선구적 등장으로 아버지라는 시적 대상은 전면적인 비판을 받은 바 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여성시는 그러나 “여성 신체와 유비 관계로 환원된 사물세계에 이질성을 거세함으로써, 여성의 몸을 남성적 표상체계에 익숙한 신체로 번역”2)하는 한계를 드러내며 스스로 비판의 대상이 되고 만다. 이에 대해서는 분명 이론의 여지가 있겠으나, 전체적으로는 2000년대의 젊은 시인들이 여성주체의 피로감을 대신하여 ‘아이들’의 자리를 정상성 비판의 새 거점으로 발견해냄으로써 한국시가 갱신된 운동성을 보여준다는 것이 함돈균의 주요한 판단이었다. 어른의 세계에 편입되기를 원치 않지만 그렇다고 아이의 세계에 판타지를 갖고 있지도 않은 경계의 아이들이 아버지와 어머니(혹은 성인 남성과 성인 여성)의 공모로 유지되는 세계에 대한 근원적이고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는 일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3)

이제는 많이 익숙해진 이야기를 인용해본 것은 2000년대 우리 시사에 새롭게 등장한 ‘아이들’이, ‘부모-자식’이라는 수직적 차원에서 불화하는 관계를 그렸다는 것을 또 한번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심지어는 동기간이라고 할 수 있는 수평적 관계마저 불화의 감각으로 그려냈음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바로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언니, 나는 비행기를 탈 거야. 나는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는데, 갑자기 너무 가벼워졌어. 마리오는 아름다운 남자야.

 

안녕. 나는 보따리 장사를 할 거야. 보석 가게에서 나는 아름다움을 감정하지. 가짜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아는 건 멋진 일이야. 언니, 곧 부자가 될게. 라인강가에서.

 

한국 남자를 사랑해보지 못했어. 오늘밤에도 언니는 시를 쓰고 있니? 언젠가는 언니 시를 읽고 감동하고 싶어. 안녕.

 

11월에 나는 마리오를 만나지. 언니는 한국어로 사랑을 고백할 수 있어? 언니, 우리가 어렸을 때 문방구에서 마론 인형을 훔치는 언니를 봤어. 눈물이 주르르 모래처럼 흘렀어.

 

언니,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 모래는 가장 아름다운 흙의 형상이었지. 나는 매일 밤 기도를 해. 언니가 우리 집을 떠나던 날에 나는 왜 쓸쓸해지지 않았을까? 언니를 위해 기도할게. 안녕.

김행숙 「하이네 보석가게에서」 전문(『사춘기』, 문학과지성사 2003)

 

이 작품은 여동생-화자의 시점으로 자매 관계의 불화를 말하고 있지만 단순히 그것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시적 화자는 외국인 남성을 사랑하고, 보석중개인으로 부자가 되고 싶은, 언니의 시를 읽으며 한번도 감동받아본 적이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처럼 보인다. 동시에 시를 쓰는 언니가 어렸을 때 마론 인형을 훔치는 장면을 보며 눈물을 흘렸던 사람이기도 하며 또한 언니를 불쌍하게 생각하지만 진실하게 사랑하지는 못하는 자신을 스스럼없이 편지로 고백할 수 있는 태연함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언니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동생의 마지막 고백은 반쯤의 진실과 반쯤의 위선으로 결합된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시적 화자가 마냥 착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인용시는 화자 내면의 균열과 속물근성, 타인을 향한 애정과 경쟁심, 상대를 폄훼하면서 자신을 부각하려는 묘한 욕망의 드라마를 위태롭지만 매력적인 어조에 담아 매우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김행숙(金杏淑)의 시 한편이 2000년대 등장한 ‘아이들’을 전부 대변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착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아이들’이 보여준 내면의 분열과 무의식, 불화의 감각은 정상성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윤리적 모험’을 가능케 한 측면이 있다.

이런 방식의 윤리적 모험은 시에서 재현되는 인간형을 더욱 풍부하고 사실적이며 입체적으로 만들어내고, 제도가 부여한 정상성의 범위를 의심하면서 확장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이전까지의 한국시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감각과 주체의 모습이었음은 분명하다. 이를 ‘불화하는 입체적 개인’으로 불러도 될까? 또한 여기엔 ‘내’가 ‘너’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근본적 탐구정신이 깔려 있음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자기 존재의 특별함에 대한 남다른 자신감은 인용시에서라면, 시적 화자가 부모를 떠나고 언니와도 이별하면서 다분히 태연한 척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어찌되었든 이국에 나가서라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라는 기대와 서로 통한다. 균열과 무의식조차도 존재의 독자성과 아름다움에 관한 이상한 자신감으로 흡수해버린 시적 주체의 ‘윤리적 모험’은 2000년대 시인들에게 두루 작동한 공통감각이었다. 이를 가장 선명하게 이어받은 2010년대의 시인으로는 김승일(金昇一)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김승일의 시적 화자가 “내가 배달된 해에, 할아버지가 둘 다 죽었다. 집안에 큰 인물이 태어나면 초상이 난다지. 이것 역시 내가 정말 정말 좋아하는 이야기. 나는 얼마나 유명해질까? 기대가 된다. 그러나//손금이 평범해서 나는 울었지. 그래도 손금이 평범하다고 우는 애는 나밖에 없을 거야. 있으면 어떡해? 조금밖에 없을 거야. 그렇지? 실컷 울었더니 손금이 변했어.//(…)//할아버지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것이 혹독한 현실. 하지만 사명감은 갖지 않을래. 사명감이 없는 애는 나밖에 없을 테니까. 있으면 어떡해? 있으면 좋지. 짱깨가 내 앞을 지나갔다. 폭주족처럼. 이목을 끌며 멋있게.”(「멋진 사람」, 『에듀케이션』, 문학과지성사 2012)와 같은 목소리로 말할 때, 이 엉뚱하고 도취적인 목소리에 배어 있는 자신감을 외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소위 ‘병맛’이라고도 부를 만한, 유아적이고 어처구니없이 유머러스한 감각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 ‘나라는 위대한 존재가 태어났다’고 뻔뻔(?)하게 기뻐할 수 있는 데는 추모의 윤리적 책임감 정도는 가뿐하게 넘나들 수 있는 ‘과도한 자기애의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역설적으로 이런 식의 (과장된) 자기애는 오늘날 농담 이외에는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감각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여유있게 웃을 수 있는 거리감을 동반하며 다가왔다는 점, 그래서 일종의 무대 위 일인극과도 같은 메타적 관람의 기회를 제공하며 유희적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김승일의 소년 화자는 자기 내면의 복합적인 균열을 들여다보기보다는 현실의 타자가 지닌 구체성에 부분적으로만 책임지거나 아예 타자성을 의도적으로 지나쳐버리는 태도를 통해 웃음을 유발하고, 아직 본격적인 사회로 진입하기 전 ‘자기전능감’을 가진 아이로서 ‘연극적인 자기애의 도취’에 빠진 캐릭터를 인상적이고도 흥미롭게 보여주었다.

 

 

2. ‘국가 없는 국가’의 등장과 생활세계의 상실

 

그러나 이런 식의 아이 화자의 목소리는 더이상 가능하지 않은 것 같다. 김행숙 시의 ‘여동생-화자’라든지, 김승일 시의 ‘아이-화자’를 2017년의 한국적 현실에 도입한다는 것은 이제는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진다. 여기엔 일차적으로 공동체와 사회의 상실, 더 나아가 국가의 상실에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이것에 대해서라면 송승언, 황인찬, 백은선의 시를 제시하면서 ‘세까이계(世界系, 유약한 주인공의 과잉된 자의식이 파멸적인 세계를 좌우하는 일본 써브컬쳐의 한 계열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쓰이기 시작함편집자)’라는 관점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다.4) 2000년대 이후 지속적인 경기하강의 국면에서 개인의 사회적 진출이 지연되거나 아예 봉쇄되고, 타인을 만나 삶의 감각을 체험하고 훈련할 기회, 혹은 사회적으로 일인분 몫을 할 기회를 박탈당해버린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개인의 고독은 깊어져왔다. 개인과 세계 사이에서 안전망 노릇을 해왔던 ‘타인/공동체/사회/국가’의 존재감은 희미해지거나 상실되어갔고 그 결과, 최근 젊은 시인들의 작품에서도 ‘나’와 ‘세계’가 날것으로 직접 만나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 핵심 진단이었다. 구체적 현실감을 느낄 수 없는 중세적 분위기의 시공간, 현실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으로 형성된 데이터베이스에서 도출해낸 것 같은 평평한 인물형이나 시적 풍경, 영문을 알 수 없는 전쟁 중의 세계와 대조적으로 유일한 애인과 평화로운 방 안에서 기이한 만족과 불안을 동시에 누리고 있는 장면, 눈보라 치는 거대한 세계와 홀로 대적하면서 그래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떠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고, 그것을 이 세계의 작지만 소중한 것들에 대한 사랑의 힘으로 전환시켜 지금 일상을 충실히 살아내겠다는 다짐 등이 바로 그 흥미롭고도 인상적인 예에 해당하는 것들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이 한 대담집에서 풀어낸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바우만은 오늘날 세계가 위기에 처한 가장 큰 이유로 ‘국가의 위기’ 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국가의 위기를 초래하는 요소로 첫째, 국가가 더이상 경제와 관련해 구체적 결정을 할 능력이 없는 현실, 둘째, 이러한 무능력 때문에 적절한 사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게 된 현실에 대해 말한다. 즉 원래는 국가가 감당해야 할 재정, 복지, 제도적 권한 등이 갈수록 사기업에 이양되고, “위기의 국가는 공공복지를 제공하고 보장하는 기구가 아니라 시민에게 빌붙어서 오로지 스스로의 생존에만 신경을 쓰는 ‘기생충’”5)이 된다. 우리가 알고 있던 국가는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 앞에 홀연히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통치하는 완전히 새롭고 이상한 지배형태, 즉 ‘국가 없는 국가’(state without a state)”6)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바우만의 진단은 한국적 현실에 대한 구체적 관찰을 토대로 귀납된 결과가 아니라는 점에서 신뢰를 의심해볼 여지가 있지만 이미 전지구적 현실이 균질화되는 가운데 ‘세월호참사’를 통해 ‘이것이 나라인가’라는 필연적인 질문을 던졌고 지금도 던지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 어떤 개념보다도 적실하게 한국적 현실을 설명해주는 말처럼 들린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국가 없는 국가’의 출현이 “공통의 위험들 앞에서 아무도 없이 나 혼자 있도록 선고받았다는 짜증과 모욕감과 분노”7)를 국가의 구성원들에게 폭력적으로 체험케 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국가의 무능을 개인에게 덮어씌움으로써 국가로 향하는 비판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개인의 삶을 망가뜨리기까지 한다.

다시 한국시로 돌아와서, ‘국가 없는 국가’의 부정적 위력이 이 정도라면, 이 ‘짜증과 모욕감과 분노’를 어떻게든 표출하고 되돌려주려는 시적 대응을 떠올려보는 일도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 길이 2000년대 시인들의 ‘윤리적 모험’과 맞닿는 부분일 터인데 참사 이후 한국시가 이쪽으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런 모험을 경계하며, ‘그들을 구하지 못했다’ ‘거기에는 분명 내 책임이 있다’는 윤리적 책임감과 죄책감이 훨씬 더 강력한 정서로 작동했다고 적는 것이 옳겠다. 안전하다고 믿었던 삶이 무너진 상황에서 지금 당장 고통받는 타인의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는 절박함을 누가 외면할 수 있을까. 이것이 아마도 ‘재난의 공동체’였을 것이다. 그 속에서 이전과는 그 무게감이 다른, 매우 강력한 ‘타자윤리’에 응답하는 시편들이 생산되기 시작했고 그 앞자리에 안희연(安姬燕)의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비 2015)가 있다.

 

 

3. ‘윤리적 모험’에서 ‘윤리적 책임감’으로의 이행

 

이 시집에 관한 가장 인상적인 평 중의 하나는 “안희연은 대체로 ‘안과 밖’의 경계/차이의 구도로 상상되어온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옆’의 수평과 연대의 구도로 치환한다. (…) 근접성, 평등, 접촉 등을 함의하는 ‘옆’은 안희연이 지향하는 삶과 시의 윤리적 지평을 가늠하게 한다”8)는 것이다. 이제는 타인과 나를 구분하는 감각, ‘나’와 ‘당신’이 어떻게 다른가라는 인식이 아니라 ‘나’와 ‘당신’이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한다. ‘옆의 상상력’은 그런 의미에서 안희연 시에 대한 적절한 호명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를 인정한다면, 참으로 놀라운 변화가 아닐까. 한국시의 흐름이 2000년대의 ‘윤리적 모험’에서 2010년대의 ‘윤리적 책임감’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선명한 사례가 바로 안희연의 시집을 둘러싼 양상임을 증명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가족 삼각형(역삼각형)에서 ‘아이’의 위치를 점하고, 윤리와 비윤리의 경계를 넘나들며 삼각형의 기성질서에 대한 발칙한 질문을 던졌던 2000년대의 ‘아이-화자’의 흔적이 안희연의 시에서는 거의 사라졌다. 마치 유년기의 기억을 몽땅 압수당하고 곧바로 ‘사회적 대의’를 통로로 세계의 실상에 직접 접속해버린 몸을 보는 것 같다. 안희연의 시도는 역삼각형이 아니라 사다리꼴의 형태를 띠며, 사다리꼴의 밑변을 지속적으로 늘려감으로써 바로 지금 우리 사회가 시인에게 기대하는 연대의 감수성을 누구보다 충실하게 보여준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모험이 정형화되어 있어서 읽다보면 지루한 감이 있다’9)라든지 “자기 세대의 현실을 너무 특권화하고 싶은 유혹”10)에 빠져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 또한 너무 “착한 절망”11)이 아니냐는 말은 경청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물론 반론도 충분히 가능하다. 안희연의 ‘착한 절망’에는 무엇보다도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가 무너져버린 우리의 현실 문제가 걸려 있다. 김승일의 시적 화자가 ‘엉뚱한 자기애의 욕망’을 형상화할 수 있었던 것은 실상 자기가 아니어도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애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리라는 공적 기대가 어느정도는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현실이 그렇지 않더라도 일단 시적 정황 안에서는 자기 말고 주변 사람들이 어쨌든 애도의 윤리를 실행할 수 있는 정상적 타인으로 상정되고 있기에 시적 자아가 ‘발칙’하게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안희연의 일부 시들에서는 그런 상식적 기대 자체가 무너져버렸기에 바로 그 ‘가장 기본적인 윤리’를 재가동시켜야 하는 선결과제를 떠안게 된다.

이제 타인은 2000년대의 시에서처럼 차이와 불화의 감각으로 자신의 개별성을 빚어내는 긴장과 척력(斥力)의 ‘구체적 대상’이 아니라 있다면 존재감이라도 느껴보고 싶은 ‘흐릿하고 추상적인’, 동시에 그만큼 더 애틋한 그리움과 연대의 대상으로 변모한다. 바람이 있다면 어떤 커다란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허락된 누군가의 손을 잡고 소소한 일상을 같이 꾸려나가고 싶다는 정도랄까. 바로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의 또 한쪽에서는 ‘기대가 사라져버린 세계의 무기력과 무능감’을 형상화하는 작품들이 생산된 것도 사실이다. 양쪽 모두에, 가장 기본적인 일상의 향유를 막는 악화된 현실의 문제가 지속적인 배경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도 시인들은 실감을 잃어버렸던 ‘타인/공동체/사회/국가’를 재인지하며, 스스로 그것들을 재건해야 하는 임무를 떠맡게 되었다. 역설적이지만 세월호참사를 계기로 흐릿해져만 갔던 ‘나’와 ‘세계’의 중간항들을 트라우마적인 방식으로 자각하게 된 것이다.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사라졌다. 사라진 것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모두가 절멸하고 말 것이라는 공포와 분노. 그렇다면 행동해야 한다.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 상실감 속에서 고립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본적인 삶을 다시 살기 위한 조건들을 밑바닥에서부터 차례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중요한 의무와 책임이 ‘2010년대 중반 이후 시인들’에게 주어진다. 이제 ‘자아’와 ‘주체’의 2000년대식 구분과 둘 사이의 의도적 균열, 그로 인한 시적 활력과 개성의 발산은 더이상 장려사항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균열을 봉합하여 ‘시인-시적 자아’를 어떻게 하면 윤리적으로 다시 촘촘하게 일치시킬 수 있는지의 여부가 중요한 압력으로 작동하게 된 것이다.

‘시적 주체의 윤리적 모험’이 ‘일상 재건의 윤리적 책임감’으로 기울어진 최근 한국시단의 변화에 충분히 공감하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해도 고민할 대목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2010년대 한국의 시가, 또는 비평이 지나치게 ‘진정성’의 언어를 추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회학자 김홍중(金弘中)은 ‘진정성’(眞正性, authenticity)에 대한 여러 저작을 살펴 자신의 논지를 펼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바 있다. “모더니티의 문화적 문법에 의하면, 진정성의 윤리는 사회의 부조리와 억압에 저항하는 반역적(rebellious) 개인성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후기 근대적 진정성은 사회와 길항하는 개인성이 아니라, 개인이 속한 조직이나 공동체에 기능적으로 복무하는 노동윤리에 충실한 주체형성의 원리로 변모한다. 진정성의 추구가 사회적 순기능으로 전환되는, 소위 ‘진정성의 덫’(authenticity trap)이 나타난다.”12) 이를 조금만 변용시켜 적용해보자면, ‘일상 재건의 윤리적 책임감’이 현실논리가 아니라 문학의 논리에 너무 쉽게, 빨리 적용되어버린다면, 2010년대의 시적 운동성은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혹은 좀더 많은 사람들이 합의할 수 있는) 보편적인 공동체의 윤리를 구축하는 데에 바쳐질 수 있다. 아무리 정교한 비평적 논리로 2010년대 시의 정치성과 운동성을 독특하게 조명한다고 해도 결국은 이미 전제된 ‘일상 회복’, ‘타자-연대’, ‘공동체 재건’을 위한 순기능적 효용성이 당위적 목표로 전제되며, 비교적 보수적인 합의로 그것들이 흡수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성의 덫’이라고 부를 만하다.

안희연의 시가 “착한 절망”으로 평가되는 것은 진정성의 추구가 ‘길항하는 개인’, ‘반역적 개인’을 충분히 거쳐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그냥 통과해가면서,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윤리에 너무 ‘기능적이고 정합적으로 복무하는 모범성’을 보이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안희연이 “끝인 줄도 모르게 길들이 끝나 있었다. 등 뒤는 드넓은 공터였다.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어요? 물었을 때//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당신 안에 사람이 있다고/좁은 다락에 갇혀 문을 두드리는 어린아이가 안 보이냐고, 안 보이냐고 물었다”(「라파엘」,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라고 말할 때,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네 안에 갇혀 문을 두드리는 어린아이가 안 보이냐’는 당위적 대답이 가해지면서 질문이 빚어내는 다양한 대답의 가능성은 서둘러 닫혀버리는 것 같다. 만약 2000년대 시인들이었다면, 혹은 2010년대 초반의 송승언이나 황인찬이라면 대답을 불러오는 일을 좀더 지연시키면서 “끝인 줄도 모르게 길들이 끝나 있었다. 등 뒤는 드넓은 공터였다”라는 문장의 감각 안에 더 오래 머물렀을 것 같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 이후 이쪽으로의 가능성이 인정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 ‘보이지 않는 것’, 즉 지금 여기서 찾아볼 수 없는 ‘희망’을 구하는 방법으로서의 ‘선명하고 즉각적인 고통’과, ‘고통을 겪는 얼굴로서의 타자’, 그것이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키는 ‘공감의 윤리’, ‘신념’, ‘의지’의 문제로 삶의 다양한 감각들은 흡수돼버린다. 그럴수록 진정성에 대한 요구는 늘어날 것이다. 분명 소중하며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길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혹시 사회적 대의와 요청을 지나치게 기능적으로 빨리 내면화한 결과는 아니냐는 것, 역설적으로 ‘사회와 길항하는 개인’을 너무 쉽게 제거하고 얻은 진정성의 길은 아니냐고 조심스러운 질문을 해보는 것이다. 진정성은 유일하고 순수한 상태를 위해 그것에 해당하지 않는 것을 제거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양면성을 내포하고 있다.

 

 

4. 2010년대의 비평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덧붙여 2010년대의 시를 읽는 독법을 점검해볼 필요도 있다. “이미 끝나버렸다는 단정과 망연자실로 가득한 “내정된 실패의 세계”에서 시인은 거기에 휩쓸리지 않고 “머릿속 전구가 켜지는 순간”을 떠올린다. (…) “서로를 물들이며” “언덕”(안희연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이 생성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우리 또한 저버릴 수 없을 것 같다13)는 해석은 어떤가. 양경언(梁景彦)은 ‘현실의 압력 때문에 무능감과 열패감에 시달리는 2010년대의 시적 주체와 언어’라는 비평적 접근에 반대하며 “불안과 무기력함, 축소화와 왜소화라는 말로 삶을 가둘 때 거기에서 피어나는 부패의 공기를 다른 방향으로 흘려보”내기 위해 ‘작은 것들의 정치성’을 주장하며 2010년대 동세대 젊은 시인들의 작품이 가진 의미있는 운동성에 주목하는 활약을 펼치고 있다. 안희연의 작품 역시 그런 맥락에서 ‘가만히 있는 것’ ‘다만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닥 너머의 세계로 향하는 출구를 마련”14)하는 일로 해석해낸다. 그런데 여기에는 작품의 육체를 두루 살핀 자의 감각보다는 “기대를 우리 또한 저버릴 수 없을 것 같다”라는 말처럼, 이미 가진 기대로 작품을 너무 빨리 구원해내려는 조급함이 느껴진다. 물론 이러한 작업은 동세대 시인들을 적극 지지하고, 당면한 현실에 눈감지 않고 싸우며, 문학의 가능성을 꼼꼼하게 살피고, 시인들의 작품을 현실의 귀결이 아니라 늘 현실을 극복하려는 힘을 가진 언어로 파악해낸다는 면에서 진지하고 믿음직스러운 행보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양경언의 어떤 해석은 시를 너무 신학적으로 보는 관점의 소산은 아닐까? 예를 들어 그의 비평적 전제는 늘 “눈먼 자들의 국가에서 버림받은 이들의 곁, 그 자리로 가서 오래도록 귀를 열고, 말을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씻겨가지 않도록 계속해서 쓰는 것. 문학은 느린 화살처럼 오래도록, 은밀한 걸음으로 갈 것이다. 이는 문학이 애초부터 해온 일이기도 하거니와 문학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15)라는 쪽에 벌써 고정된 것 같다. 이것은 구원을 전제로 하는 너무나 익숙한 비평적 레토릭이어서 현실에서라면 몰라도 작품 내에 곧바로 도입될 경우, 각각 다른 작품들이 대입되어도 언제나 엇비슷한 결론으로 이어지는 ‘자동회로’로 작동하는 듯하다. 비록 양경언 비평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아니지만 아래의 글을 참조한다면 생각은 조금 더 진전될 수 있을 것 같다.

 

시가 일정한 기능을 갖게 되면 삶에서의 시의 역할이 뚜렷하게 설명되기 때문에 효용에 갇히게 되는데,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시의 효용 그 자체가 아니라 시가 삶과 맞닿는 부분이 자신의 효용이 작동하는 부분적인 범위로 제한된다는 점일 것이다. 모두가 주어진 제자리에 놓여 있으며 자신의 기능에 충실할 때, 시를 쓰는 자에게나 읽는 자 모두에게 삶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타자 윤리를 경유하여 2010년대 시의 가치를 설명하려는 방식이 새로운 시를 다루는 세대 담론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새로운 인식적 충격을 주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16)

 

시의 정치성을 강조하고 타자윤리를 중요시하며,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혹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책임감을 강조할 때, 더 깊숙이 생각해볼 문제는 시의 효용성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런 논의가 대체로 설명해내는 지점이 매우 뻔하거나 협소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2010년대의 시인들이 무기력이나 무능감을 드러내면 안 되는가? 고통받으면서도 늘 보이지 않는 희망을 꿈꾸고, 여기가 아니라 저기를 향해 운동하는 것만이 시의 중요한 의의이자 기능이어야 하는가? 그것의 실패, 좌절, 혹은 다른 고통, 두려움, 미련, 막막함 안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는 것인가? 나는 양견언의 작업이 문학장에 대한 비평가의 중요한 개입이자 좋은 의미의 비평적 압력이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저 오래된 ‘문학적 진정성’ 추구의 또다른 버전이라고 생각한다. 2000년대의 ‘윤리비평’이 2010년대의 ‘진정성비평’으로 그 자리를 옮겨왔다고 할까. 이렇게 되면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시에서 힘겹게 얻어낸 ‘입체적 개인’은 또다시 사라지고 만다. 입체적 개인을 건너뛰면 의미는 있지만 매력은 없는 언어가 된다. “진정성의 추구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정의( justice)의 이상은 속되고 개인적인 ‘행복의 추구’를 죄악시하게 된다”17)는 말에 귀 기울여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또한 양경언의 비평은 “2010년대의 시들이 그 이전에 쓰인 시들의 영향 아래에서 쓰이는 것은 사실이나, 이 시들이 이전 시들에 대한 나른한 변주가 아니라 저 자신들의 치열한 모색 속에서 각각의 표정을 짓고 있는 상황 자체를 대면해야 할 책무를 이 글은 감당하고 싶어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는 읽기의 장벽을 마주하지만, 쓰기의 역능은 그를 천연덕스럽게 돌파하기 때문이다18)라든지 “이처럼 2010년대 시는 낯익은 화법으로 ‘나’를 내세워 ‘너’를 요청하는 ‘잠재적인 대화의 관계’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씌어지고 있다. 이전 시들과의 관계 속에서 읽기의 곤궁을 호소하던 독자 역시도 2010년대 시를 읽을 때에는 각 시구의 배치를 통해 형성된 의미 층위에 불편 없이 참여하거나, 또는 화자가 마련한 사유의 틈새에 개입하는 전환된 역할을 부여받는다19)라고 말하면서 2010년대 시를 2000년대 시와의 관련성 속에서 해석하는 움직임에 반대하며 2010년대 시의 독자성과 차별성을 부각하는 입장을 취한다.

말하자면 2010년대 어떤 젊은 비평가들이 보여주는 ‘진정성의 감각’ 안에는 파국의 현실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것으로서의 글쓰기 혹은 시쓰기에 관한, 동시대성에 근거한 과도한 의미부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1장에서 인용했던 김행숙의 시가, 여동생의 눈으로 ‘시를 쓰는 언니’에 대해 말하면서 비판적 외부시선을 도입했던 것과는 달리 2010년대 일부 젊은 비평가들의 글에서는 자신이 선택한 텍스트에 대한 비판 없는 매끈한 상찬, 시와 비평의 힘을 지나치게 맹신하는 열정적 언어가 발견된다. 2010년대 시 이외의 다른 것들을 모두 지워버리거나 서둘러 비판하면서 자기 세대의 감각과 현실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욕망이 느껴진다.20) 욕망 자체, 혹은 욕망의 순기능을 부정하자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2010년대 젊은 비평가 중에서 자기 세대의 ‘시’에 대해 ‘구성적 외부’를 자처하며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실의 공동체뿐 아니라 문학의 공동체를 만들려는 욕망이 너무 강한 나머지 자기를 점검하는 외부적 시선을 마련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2010년대 어떤 비평가들은 수평적인 차원의 동기간 연대에는 많이 열려 있지만 수직적 차원의 대화에는 너무 빨리 문을 닫아버린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자기 세대의 현실을 특권화하고 싶은 유혹’(정홍수)2010년대의 시뿐만 아니라 비평에도 적용될 수 있다.

 

 

5. 그러나 이 글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물론 2000년대 시와 비평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같은 질문이 이들에게도, 2000년대 시인과 비평가들에게도 똑같이 돌아가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진지한 반성과 검토의 시간, 그리고 아주 긴 지면이 필요할 것 같다. 돌이켜보자면 2000년대의 어떤 시들은 자아에서 주체로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균열과 쾌락에 기대어 자신이 무한해질 수 있다고 믿은 나머지 90년대적인 시적 자아가 그래도 감당하려고 노력했던 책임감의 문제를 놓쳤다.21) 즉 ‘90년대 시적 자아의 책임감’과 ‘2000년대 시적 주체의 쾌락’을 길항관계로 놓고 좀더 오래 고민하지 못한 채 너무 쉽게 후자로 넘어가버렸다는 것이다. ‘입체적 개인’과 ‘시의 권능’, ‘시의 무한’, 그것이 만들어내는 ‘시의 쾌락’을 중요시한 결과이리라. 동세대 비평 또한 이것을 지나치게 선도하거나 너무 쉽게 방조하고 말았다. 게다가 ‘아이-화자’를 대거 페르소나로 삼으면서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놓친 것도 뼈아프다. 여성이 실제 삶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차별은 그대로이거나 더 가혹해졌는데, 시 안에서 ‘아이-화자’로 말하면서 남성과 여성의 정체성을 교란하고 넘나드는 일에 주된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그뿐 아니라 어떤 남성 시인들이 위계와 권력을 이용하여 여성을 착취한 사건은 부정할 수 없는 과오로 기록될 것임에 분명하다. 이런 이유로 2010년대 시인들이 삶을 먼저 생각하고, 그만큼 시쓰기와 문학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려는 것, 삶과 시를 진정성의 관점에서 일치시키고, 시와 비평의 윤리적 공동체를 마련하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작용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시인들이 찾아낸 ‘입체적 개인’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말아달라는 말을 하고 싶다. 2000년대 시인들이 90년대 시적 자아의 책임감을 놓친 것처럼, 2010년대 시인들이 2000년대의 입체적 개인을 포기해버린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물론 별일이야 있겠는가. 2010년대의 시인과 비평가들이 그동안 잘해왔듯이 태연하게 자신들의 일을 하면 된다. 하지만 바로 그렇게 반성 없이 질주했던 2000년대 어떤 시인들이 한국시를 추문으로 만들었다. 그들 모두가 어찌되었든 한국문학이라는 제도 안에서 비평적 상찬과 보호를 받았던 시인들이었다.

장은정(張銀庭)은 최근 출간된 안태운의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민음사 2016)의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읽는 자마저도 분열시키는 이 전면적인 경악 앞에서 자유와 혁명의 계기로서의 시에 대한 모든 기대는 파기된다”고. 안태운의 시가 “자유가 아니라 예속”을 선보인다는 것이다. 안태운의 시가 선사하는 충격은 “현실의 삶에 대한 믿음과 마찬가지로 내면적 현실에 대한 믿음 역시 환각에 불과했음”을 보여주는 데 있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는 너무 오래도록 현실의 삶과 대비되는 문학의 진정한 삶을 믿어왔던 것은 아닐까”라며, “진정한 삶 역시 현실의 삶과 마찬가지로 기만이며 환각인 것은 아닐까”22)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상당히 낯설고 이채롭게 다가온다. 평상시 동세대 시인들의 시를 누구보다 명민하고 단단한 감각적 논리로 풀어내면서 시와 비평의 진정성과 가능성에 투신해온 목소리와는 많이 다른 해석이기 때문이다. 평소 자신이 가졌던 시에 대한 믿음이 부서지는 경험 때문인지 이 해설에는 특히나 자문과 질문이 많다. 스스로도 이런 자신의 해석을 믿을 수 없다는 놀라움이, 이런 식의 경악이 시의 끝이어서는 안 된다는 자의식과 함께 작동한 것이리라(그런데 시가 그런 경악으로 끝나면 왜 안 되는 것일까?). 그러면서도 “안태운의 시는 자신을 증오하는 것조차 서슴지 않는다. 이 증오는 우리의 감은 눈을 끝내 찢고 그동안 알면서도 모른 척해왔던 것을 남김없이 보게 만든다”라고 지적하며 “이 잔혹한 예속조차 시의 자유일 것이다”23)라고 결론 내린다. 이런 장은정의 해석에 감탄하고, 또 그것을 지지하며, 다만 1부의 시편들은 조금 다르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다.

안태운의 시집을 처음 읽으면 슬픔과 절망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1부의 시편들은, 각각 의미론적으로는 닫혀 있거나 구원 없이 종결되는 듯 보이지만 이미지의 차원에서는 지속적으로 흔들리고 흘러넘치면서 다른 운동성으로 이어진다. 즉 첫 시 「얼굴의 물」이 “비는 계속 내리고 물은 차오르고 얼굴은 씻겨 나가 이제 보이지 않고”로 끝나기에 충분히 고립의 슬픈 이미지만 부각되는 것 같지만 만약 이미지를 ‘사물’이 아니라 ‘행위’로 이해한다면 이 구절은 폐쇄적인 단절의 이미지가 아니라 무언가 지속될 것을 암시하는 불완전한 결론-미래를 암시하는 이미지로 해석된다. 특히나 「얼굴의 물」 다음에 등장하는 「탕으로」의 첫 구절은 “고인 물은 멈추지 않고 있다”로 시작됨에 주목하자. 「탕으로」는 매우 암시적인 방식으로 세월호참사로 고통받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이념적 언어로 몰아세우며 폄훼했던 폭력적인 분위기를 재현하는 듯 보이는데, 중요한 것은 이 시가 “모든 물은 넘쳐흐르고 옷자락은 몸을 휘감고 형태는 마모되어 갔다. 주위로 소리를 내면서 지나고 있는 것들이 있었다. 물의 자취가 날아가고 있다”라는 구절로 끝난다는 점에 있다. 이렇게 가볍게 끝내도 되는 것일까라는 질문이 들 정도이고 어쩌면 이 구절들은 사건의 비극성과 고통에 대해 직접 말하기를 비켜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비켜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안태운의 시적 자아가 이미지의 운동성 안에서 사건을 다루는 방법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 같다. 즉 여기서 작동하는 물의 이미지는 내용적으로 탕 안에서 죽어가는 이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동시에 물이 끊임없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바로 그 이미지의 운동성, 말의 운동성에도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죽음을 되돌릴 수는 없고 죽은 이들이 물속에서 다시 걸어나올 수도 없지만(그래서 너무나 고통스럽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사태가 완전히 그렇게만 끝나지도 않을 것임을 바로 이 움직이는 물의 이미지, 그것을 반영한 마지막 문장의 운동성이 현시한다고 할까. 그러니까 1부의 시편들은 각각의 시편으로 끊어지거나 조각나지 않고, 물 이미지의 운동성으로 끝과 시작이 서로 깊숙이 연결되어 있으며, 시적 화자와 익명의 인물들은 물이 이동하고 출렁이듯이 ‘행동-다음 행동-또 다음 행동……’을 반복적으로 쌓아가고, 지속적인 변화를 암시하며 최종결과를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언어를 개방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모순과 긴장, 문장의 운동이야말로 물의 이미지이고 ‘행위로서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안태운이 ‘자서(自序)’에서 “뒷모습과/뒤를 돌아보는 모습/사이에서/걷고 있었다”라고 적을 때, 그의 시적 자아가 지닌 정체성은 더욱 의미있게 다가온다. 이 한발 늦은 돌아봄이야말로 안태운 시의 개성을 결정짓는 독특한 자리이다. 안태운은 적어도 시집의 1부에서라면, ‘행위로서의 이미지-잔존하는 이미지의 미광’을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나’는 ‘너’를 지나쳤지만, 그것이 ‘나’의 한계이지만, 결코 끝은 아니며 ‘너의 이미지’는 ‘나’에게 남아 여기, 출렁이는 언어로 기록될 것이다,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24)

이처럼 안태운은 물의 이미지, 물의 운동성으로 “잔혹한 예속”을 극복한다. 자유가 아니라 구속의 방식으로. 만약 세월호참사가 없었다면 안태운의 시에 이같은 뒤돌아봄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참사 이전이라면 안태운의 시는 2000년대 시의 어떤 자산을 충실하게 계승하며 절망과 고통을 현시하는 시로 남았을 것이다. 그게 나쁘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 또한 우리의, 인간의, 시의 명백한 일부이다. 다만 스타일상 언어적 사유를 중시하고, 현실과의 구체적인 접촉면을 멀리할 것 같은 안태운의 시도 2010년대의 현실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이, 2010년대 시를 2000년대 시와 구별짓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제 우리의 긴 여정을 정리하며 안태운이 보여준 이 ‘돌아봄의 순간’이야말로 2000년대 시와 2010년대 시가 만나면서 불화하는, 혹은 길항하는 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2000년대의 입체적 개인과 2010년대의 윤리적 책임감이 현재로서는 안태운의 시에서 충돌하고 있다. 당신이라면 어디로 가겠는가. 당신의 감각은 어느 쪽으로 기우는가.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 시의 일은, 또 해석은 달라질 수 있으리라. 다만 어느 쪽이든 ‘개인’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인다면, 부디 시를 사랑하되 시의 자유와 권능을 너무 믿지는 말라는 것이다.

 

 

1) 함돈균 「아이들, 가족 삼각형의 비밀을 폭로하다」, 『얼굴 없는 노래』, 문학과지성사 2009, 63면.

2) 함돈균, 같은 글 61면.

3) 함돈균, 같은 글 56~65면 참조.

4) 졸고 「상실 이후, ‘나’와 ‘세계’가 직접 만날 때: ‘세카이계’의 관점으로 살펴본 최근 우리 시의 한 모습」, 『현대문학』 2016년 5월호.

5) 지그문트 바우만·카를로 보르도니 『위기의 국가』, 안규남 옮김, 동녘 2014, 47면.

6) 같은 책 75면. 정치철학자 에띠엔 발리바르의 말로 까를로 보르도니가 인용했다.

7) 지그문트 바우만, 앞의 책 186면.

8) 김수이 「‘옆’의 존재론, 의미없는 실패라도 좋은」,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해설, 창비 2015, 152면.

9) 신용목·정홍수·최원식 좌담 「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창작과비평』 2015년 겨울호 284면 최원식의 말.

10) 같은 좌담 283면 정홍수의 말.

11) 송종원 「제23회 김준성문학상 시 부문 심사평」, 『21세기문학』 2016년 여름호 18면.

12) 김홍중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 세대」, 『사회학적 파상력』, 문학동네 2016, 278면.

13) 양경언 「이제 되었다니, 그럴 리가」, 『문학과사회』 2015년 겨울호 557면. 강조는 인용자. 본문의 논점과는 별개로 이 글에서 양경언이 졸고 「기대가 사라져버린 세대의 무기력과 희미한 전능감에 관하여: 2010년대 시인들의 무기력 혹은 무능감 2」(『문학동네』 2015년 여름호)를 비판하며 “시적 주체가 점유해온 계급적 위치”를 탐독하는 작업은 시가 새로운 화법을 발명할 때마다 개시하는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애초부터 차단하는 결론에 이를 수 있고, 2010년대 이후 시적 주체들의 주된 상태를 ‘무기력’하다고 보는 관점이 문학작품의 송곳니를 끝내 드러낼 수 없도록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무기력한 시대감각을 고스란히 체화하는 시’라는 예정된 결론으로 가는 것은 아닌지 지적한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비판이었다. 현실의 위력을 앞세우는 글은 늘 문학적 실천의 가능성과 새로운 희망에 둔감할 수 있음을 성찰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4) 양경언, 같은 글 544~45면.

15) 양경언 「눈먼 자들의 귀 열기: 세월호 이후, 작가들의 공동 작업에 대한 기록」, 『창작과비평』 2015년 봄호 290면.

16) 장은정 「끝과 실패」, 『문학과사회』 2016년 여름호 378면.

17) 김홍중 「진정성의 기원과 구조」,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40면.

18) 양경언 「나는 거기에 있지 않다」, 『실천문학』 2015년 봄호 49면. 강조는 인용자.

19) 양경언 「작은 것들 정치성: 2010년대 시가 ‘안녕’을 묻는 방식」, 『창작과비평』 2014년 봄호 356면. 강조는 인용자.

20) 뒤에서도 다룰 테지만, 예를 들어 양경언과 함께 2010년대 시에 적극적으로 의미부여하는 장은정의 비평은 철학이나 사회학 등 어떤 외부 논리에도 기대지 않고 오로지 작품의 내적 논리만으로 시의 의미를 규명해보겠다는 의욕을 선보인다(물론 최근 들어 조금씩 변화의 조짐을 드러낸다). 이는 매우 참신하고 경탄할 만한 시도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러다보니 자신이 선택한 텍스트를 과잉해석하거나, 시의 논리를 비평가의 논리로 너무 많이 채워버리는 문제, 결과적으로 시의 권능을 과도하게 부각하는 문제를 노출한다. 비평에 ‘구성적 외부’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 2010년대 시들은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으며 그것이 다가오는 어떠한 시간들 속에서도 더 나은 상태로 변화하리라는 희망을 전혀 전망하지 못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많은 비평들은 이러한 특성을 어떤 출구도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사회 현실에서 기인한 반응이라 해석하는 일에 동참하며 심지어 이들의 절망에 공감하고 이들의 한계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 비평의 윤리가 아니겠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이것은 무지와 무능, 한계 자체가 실패라는 전제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며 이들의 시가 정면으로 다루고자 하는 무능의 가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장은정, 앞의 글 398~99면)와 같은 구절에서 그 기미를 엿볼 수 있다.

21)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졸고 「왜가리 없는 왜가리를 어떻게 껴안아야 할까: 이수명론」, 『귀족 예절론』, 문예중앙 2012 참조.

22) 장은정 「찢는 증오」, 『감은 눈이 내 얼굴을』 해설, 96~98면.

23) 장은정, 같은 글 110면.

24) 이 부분의 해석은 졸고 「부서져나간 자리에 잔존하는 미광: 안태운 시, 그리고 이미지 운동에 관하여」, 『시인시대』 2017년 봄호(출간 예정)를 참조 발췌, 요약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