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나쯔메 소오세끼 『이 몸은 고양이야』, 창비 2017

이 앙큼한 고양이의 매력, 혹은 소설 쓰기의 현장

 

 

남상욱 南相旭

인천대 일어일문학과 교수 indimina@inu.ac.kr

 

 

175_410100년 넘도록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아온 나쯔메 소오세끼(夏目漱石, 1867~1916)의 작품 중에서도 최고 인기작으로 꼽히는 『吾輩である』(1905~6)가, 서은혜(徐恩惠)에 의해 ‘이 몸은 고양이야’라는 도발적인 제목으로 다시 번역되었다. 해방 이후만 따져도 1962년 김성환에 의해 ‘나는 고양이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래 『나는 고양이로다』(최을림 옮김, 중앙출판사 1992),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유유정 옮김, 문학사상사 1997) 등으로 번역되어왔지만(윤상인 외 『일본문학 번역 60년』, 소명출판 2008, 188면), ‘나’를 ‘이 몸’으로 번역한 것은 획기적인 시도로, 논란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된다.

아직 번역자의 ‘해설’을 보지 못한 상황에서(본 서평은 『이 몸은 고양이야』가 편집 중인 시점에서 작품 번역원고를 읽고 씌어졌음편집자) 이러한 번역의도에 대해 논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일단 이 번역이 고양이 화자를 거의 무의식적으로 인칭대명사 ‘나’로 환원해온 경향에 대해 반성케 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니까 서은혜의 번역은, 기존의 번역이 소오세끼가 고양이를 지칭함에 있어 (와따시), (오레), (보꾸) 등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반적인 1인칭 대명사를 의도적으로 회피했다는 점, 그리고 그 선택지로서 ‘吾輩(와가하이)’라는, 이미 그보다 이십여년 전에 발표된 쯔보우찌 쇼오요오(坪内逍遥)의 「당세서생기질(当世書生気質)(1885~86)에서나 볼 수 있는 인칭대명사를 선택했다는 점, 나아가 이를 가능케 하는 다양한 1인칭 대명사를 보유한 일본어 시스템의 특징 그 자체를 누락했다는 점을 환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몸’이라는 번역어가 이러한 번역상의 난점을 모두 해결했다고는 볼 수 없다. ‘나’를 ‘이 몸’으로 바꾼다고 인칭대명사를 둘러싼 일본어의 특징이 고스란히 한국어 속에 기재될 리 만무할 테니까. 그럼에도 새로운 번역은 ‘이 몸’이라는 말을 통해 근대성의 시발점이 되는 ‘나’의 자명성을 소오세끼가 유보하려 했음을, 그러니까 인간으로서의 ‘나’를 굳이 고양이라는 동물의 ‘몸’의 시선을 빌려서 보고자 했던 노력의 흔적을 가능한 살리려고 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건 서구적 의미의 ‘인간’ 속에 자신을 투영하고자 했던 당시 일본인들을 비판하기 위한 거리를 어떻게든 확보하고자 한 작가의 노력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이 번역이 다른 번역들보다 더 원문에 충실하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서은혜 번역은 문단 나누기에 있어 가독성을 중시한 송태욱 번역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현암사 2013)와는 달리 원문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번역은 원문에 대한 번역자의 해석이 매우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건 바로 소오세끼 문체의 일관적인 특징 중 하나인 종결어미 ‘である(데아루)’를, ‘이다’가 아닌 ‘이야’(혹은 ‘이고’)라는 어미로 번역한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예컨대 현대 일본어 문맥에서 ‘である’는 ‘XY다’와 같은 수학적 명제에 쓰일 만큼, 확정적이고 단호한 문어체이다. 다름 아닌 고양이가 그러한 문어체를 통해 인간들이 내뱉는 일상어를 인용하고 해석하는 데 원작의 형식적 미학이 있다. 서은혜의 번역이 고양이의 말을 ‘이야’라는 구어체로 바꿈으로써 원문 속의 문어체와 구어체의 전도된 긴장관계를 살리지 못한 점은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과감하게 ‘である’를 버린 대신, 서은혜 번역본은 ‘~고’ ‘~지’ ‘~어/아’ 등 다수의 한국어 종결어미를 자유롭게 사용해 문단 나눔 없이 두세면에 걸쳐 줄기차게 이어지는 사고의 흐름을 끊지 않으면서도, 가독성을 높이는 데 성공한다. 실제로 감칠맛 나게 이어지는 고양이의 말을 좇다보면, 마치 이 고양이가 소오세끼라는 작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하나의 살아 있는 캐릭터로 독립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새로운 번역은, 독자들로 하여금 날카로운 비평정신을 가진 완고한 근대 일본 지식인 소오세끼보다도, 그 옆에서 그를 관조하는 이 “이름은 뭐, 아직 없”(7면)는 고양이에게 초점을 맞추도록 유도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제까지 이 작품은, 소설로서의 작품성 그 자체보다는 소오세끼라는 지식인의 프레임을 통해 본 당시 일본의 모습이라는 측면에서 읽히는 경향이 강했다. 그때 고양이는 러일전쟁 직후 일본인의 생활모습과, 그것을 바라보는 일본 지식인의 시선 그 자체를 드러내기 위한 소설적 장치로서 간주될 뿐이었다. 그 방증으로 일본의 1993년도판 소오세끼 전집(岩波書店)은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반영한 568개의 주석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상세히 해설하고 있다. 이는 일본에서 소오세끼 작품이 하나의 역사적 자료이자, 동시대 역사를 매개하는 미디어로서 읽혔음을 의미한다. 김태원(金泰源)의 지적대로 번역이 “수세기 동안 축적된 독서경험의 역사 혹은 지적 전통에 참여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점을 의식한다면(김태원 「명작의 새번역: 온고지신의 미덕」, 『창작과비평』 2016년 겨울호 579면), 한국의 다른 소오세끼 번역들과 마찬가지로 간략한 용어해설 정도로 주석을 처리함으로써 독서경험의 역사를 갈무리하는 『이 몸은 고양이야』 또한, 소오세끼 전문가들에게는 불만족스러울지 모른다. 하지만 서은혜의 번역은 그러한 문학연구자들에게 이 텍스트가 역사적 자료 이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소설임을 환기시켜준다. 즉, 나긋나긋한 문체로 전개되는 고양이의 ‘목소리’를 따라가다보면, 당시의 시대상 이전에 인간의 타자로서 인간세계를 조망하는, 이 앙큼하고 요물 같은 고양이의 존재 그 자체에 자신도 모르게 매료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이라고.

물론 이름은 없다고 ‘말하는’ 고양이는 분명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타자를 인간의 언어로 구성한다고 하는, 이 불가능성에 도전하는 것이 바로 소설 쓰기이며, 이에 소오세끼가 매료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아직 학문의 세계 안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며 전전긍긍하던 소오세끼가 고양이-쓰기를 통해서 행을 나눌 겨를조차 없이 소설의 세계 속으로 깊숙하게 빨려들어가는 현장, 그리고 이에 당시의 독자들이 폭발적으로 열광하던 현장이 바로 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본다면, 그것을 가능토록 만드는 고양이가 조금 거만하게 “이 몸은 고양이야”라고 한다고 뭐라 할 수만은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