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책에 따라 살기”

유리 로뜨만의 문화유형론과 ‘러시아’라는 유령에 관하여

 

 

김수환 金修煥

한국외대 러시아학과 교수. 저서로『사유하는 구조』 등이, 역서로 『기호계』가 있음. lotmania@hufs.ac.kr

 

 

1. postscript 2014

 

“책에 따라 살기”는 9년 전인 2005년에 내가 한 학술지에 발표했던 논문의 제목이다.1) 사실 이것은 18세기 러시아에서 문학이 가졌던 역할과 위상을 논하는 한 글에서 로뜨만(Yuri Lotman)이 직접 사용했던 표현이다. 로뜨만은 당시 문학 텍스트가 실제 독자가 아니라 이상적으로 구축된 독자의 형상을 지향했으며, 실제 독자들 역시 이런 이상화된 모델을 일종의 규범으로서 적극 받아들였기에, 사실상 “독자들에게는 책을 읽을 것이 아니라 책에 따라 살아갈 것이 요구되었다”2)라고 주장했다. 2005년 당시의 나는 “러시아적 문화유형의 매혹과 위험”이라는 부제 하에, “책에 따라 살기”라는 독특한 화용론적 모델의 매혹적인 ‘앞면’과 더불어 그것의 위험한 ‘뒷면’을 생각해보려 했다.

9년이 지난 지금, 나는 같은 제목을 단 또 한편의 글을 쓰려고 한다. 이 글에서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크게 두가지다. 첫째, 나는 텍스트를 대하는 저 독특한 러시아적 태도를 러시아문화의 유형론적 특성과 관련시켜 분석할 것이다. 어정쩡한 중간항, 절충과 타협의 결과로서의 제3항을 거부하는 전형적인 러시아적 입장이 삶과 예술의 경계, 책과 현실 간의 거리를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그들의 태도와 맞물려 있음에 주목할 것이다. 이를 위해 나는 로뜨만의 문화유형론3) 중 가장 흥미로운 지점으로 간주되는 러시아문화의 “이원적 구조”를 비판적으로 재고해볼 것이다.

둘째, 나의 의도는 같은 제목의 두 글 사이에 가로놓인 의미심장한 ‘격차’를 성찰해보는 데 있다. 나는 지난 9년 동안 내 생각이, 그리고 나를 둘러싼 세계가 처음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졌는지를 보여주고, 그 현기증 나는 ‘거리’에 관해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 그러니까 이 글은 우리를 거쳐간 지난 10여년의 세월을 되돌아보는 간략한 회고담이자, 9년 전 내 글에 대한 후기(postscript)의 성격을 띤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러시아문화의 이원론적 성격을 바라보는 로뜨만의 미묘한 시각 변화를 확인하는 기회인 동시에 마치 ‘유령’처럼 귀환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몇몇 개념들(유토피아주의, 파국, 종말, 광신 등)을 재성찰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2. “책에 따라 살기”: 문학 이상의 문학

 

러시아의 문화적 삶에서 문학이 언제나 ‘문학 이상의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져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사회적 가치의 중심 기제로서 문학이 지니는 특별한 위상은 지난 200년 동안 전 유럽에 걸친 보편적 현상이었다. 하지만 문학의 사회적 위상과 역할에 대한 러시아적 태도는 그중에서도 매우 극단적인 경우에 속한다. 뿌슈낀(A. Pushkin) 이후의 러시아 인텔리 계층은 자신의 문학을 문화의 얼굴이자 심장으로 여겨왔다. 개인성, 자유, 도덕을 포함한 거의 모든 종류의 철학적・이념적 사유는 예외 없이 러시아 ‘문학’이라는 심장부를 통과했다. 만일 서구에서라면 철학자나 비평가, 혹은 정치가나 법률가가 해결했을 문제, 언론인이나 역사가가 담당했을 일이 러시아에서는 문학의 대상이 되었고 작가에 의해 처리되었던 것이다.

19세기 중엽에 비평가 벨린스끼(Vissarion Belinsky)는 러시아인을 “책을 읽는” 민족으로 정의했다. “오직 러시아문학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자만이 러시아인이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여기서 민족을 결정짓는 요인은 피도 계급도 아닌 독서의 재능인 것이다.”4) 19세기 러시아문학의 ‘작은 인간’(가령, 도스또옙스끼의 소설 『가난한 사람들』의 주인공 제부슈낀)은 같은 계급의 프랑스인과 달리, 사회적 신분의 상승을 꿈꾸지 않는다. 그 대신 그가 꿈꾸는 것은 훌륭한 글쓰기(의 재능)이다.5) 러시아에서 작가는 언제나 일종의 비공식적 권력, 말하자면 ‘두번째 정부’로 간주되어왔지만, 다른 한편으로 실제의 통치자들 역시(예까쩨리나 2세부터 레닌에 이르기까지) 부단하게 스스로를 문학가로 표상하려 했다. 레닌은 문학비평가, 스딸린은 언어학자였으며, 흐루쇼프(Nikita Khrushchyov)는 현대예술 비평가였고,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는 직접 소설 3부작을 쓴 작가였다.6) 요컨대 문학이면서 동시에 언제나 ‘문학 이상의 어떤 것’이어야 했던 러시아문학은 철학적 사유의 시험대이자 사회변혁을 위한 프로그램이었으며, 민족의 과거를 이해하는 방법이자 미래를 향한 예언의 기초였던 것이다.7)

‘뿌슈낀—우리의 모든 것’ 혹은 ‘뿌슈낀 공동체로서의 러시아’ 같은 유명한 구절이 함축적으로 요약하는바, 이런 극단적인 ‘문학 중심주의적’ 태도는 흔히 근대 러시아사회가 처했던 역사적 조건에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되곤 한다. 사회적, 법률적, 경제적 기제의 자율적 성장이 상대적으로 억압되었던 제정 러시아의 사회정치적 상황에서, 문학은 그들 모두의 역할을 대신하는 ‘대체물’로 기능해야 했으며, 그런 점에서 당시로서는 유일하게 기능할 수 있는 사회적 소통구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과 작가에게 ‘그보다 더한 어떤 것’을 요구하는 이런 관념은 다른 각도에서 설명될 수도 있다. 즉 우리는 문학이 경험적 현실보다 더 높은 어떤 진리와 관련된다는 사고를 중세적 가치구조의 연장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를테면 신성한 ‘말’(logos)의 힘과 권위에 의존했던 중세의 종교적 권위성의 자리를, “신성함의 자리는 결코 비워지는 법이 없다”라는 원칙에 따라 다름 아닌 ‘말’의 예술, 즉 (세속)문학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과거의) 성스러운 텍스트들을 대체하면서, 문학은 그것들의 문화적 기능을 상속받았다. 18세기에 일어난 이 대체는 이후 러시아문학의 영속적인 특징이 되었다.”8)

하지만 이와 관련해 더욱 흥미로운 지점은 따로 있다. 로뜨만에 따르면 이 문제는 러시아적 근대의 특정한 세계인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주목할 것은 문학에 대한 이런 태도가 추상적 이념의 세계와 물리적 경험 세계 간의 안티테제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물리적 삶과 이상적 세계는 각기 독자적인 닫힌 세계로서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때의 이상적 질서는 아직 오지 않았으나 언젠가 반드시 도래해야 하는, 말 그대로 완전히 ‘지상적인’ 어떤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러시아의 근대적 세계감각의 핵심은 어디에 있는가? 세계의 창조 과정이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는 것, 러시아에서 문화는 아직까지 건설된 바 없으며, 이제 바야흐로 ‘창조’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라는 인식에 놓여 있다. 이 인식이 문학을 신성시하는 중세적 태도와 결합되었을 때, 진리탐구의 수단으로서 문학이 지니는 실질적 중요성과 가치는 명백해진다. “러시아의 문화적이고 도덕적인 건설의 길은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길이 지니는 목적과 그것의 최종적 형상을 구현하고 있는 것은 바로 문학, 곧 책과 무대다. 18세기의 인간은 바로 문학으로부터 자신들의 정신적 체험의 모델과 행위 규범들을 길어올렸던 것이다.”9)

당연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문학(및 작가)에게 부여되는 사회적 역할은 원칙적으로 창작을 넘어서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작가는 단지 작품을 창조하는 자가 아니다. 그는 그런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는 문화 자체를 창조하는 자이다. “작가는 문화적 상황을 뒤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것을 창조한다. 그는 텍스트를 창조해야 할 필요성뿐 아니라 그것을 읽을 독자들, 나아가 그런 문화 자체를 창조해야 할 필요성으로부터 출발한다.”10) 이는 텍스트와 독자의 상호관계에 있어, 동시대 서구예술의 일반적인 규범에서 보면 완전히 ‘뒤집혀진’ 상황을 창출한다. 예컨대 작가는 현실에 존재하는 실제 독자(구매자)가 아니라 (그 자신이 창조해내야 하는 목표로서의) 미래의 이상적 독자를 지향하게 된다. 다시 말해 텍스트가 그 내부에 상정하고 있는 것은 현실의 독자가 아니라 이상적으로 구축된 미래의 독자 형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대 문학을 대하는 독자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실제로 그러한 (이상적인) 독자가 ‘되는 것’, 좀더 정확히 말하면 문학작품이 제시하는 모델에 따라서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바꾸는 것’이었다. 요컨대, 독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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