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중학생 자살사건에 대한 몇가지 단상

김종엽

김종엽 / 한신대 교수, 사회학

 

사용자 삽입 이미지대구중학생 자살사건을 계기로 지난 20여일간 왕따와 학교폭력 문제에 대해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열렬한 논의가 한때의 호들갑으로 끝날 위험을 경고하고 나섰다. 교실붕괴 이야기가 나온 지 10여년이고, 왕따문제가 논란이 된 지 20여년이 되어가는데다가 그동안 이 문제가 간간이 여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곧 잦아들곤 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런 반응은 납득할 만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간의 패턴에 대한 냉소를 거두고 요란하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더 열심히 논의해야 할 때라고 생각된다.

 

사실 대중과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사회적 고통이 지속되는 경우는 많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어떤 연유에서든 의제로 부상했을 때조차 사회가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지나가버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필요한 것은 이 문제가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지 않도록 끝까지 물고 늘어지려는 태도, 지금의 감정과 호들갑과 열의를 1년 아니 2~3년쯤 이어가려는 것이라 생각된다.

 

필자가 이 글을 통해서 말하려는 것은 세가지다. 우선, 왜 대구중학생 자살사건이 이전보다 더 뜨거운 논의를 불러일으켰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것이 왕따와 학교폭력 문제에 대한 논의지형을 어떻게 바꾸었나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재 이 문제에 대한 논의에서 발견되는 편향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다. 세 논의 모두 내세울 만한 새로운 통찰은 아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지적했듯이 문제 해결의 문턱을 넘을 때까지 열심히 논의가 계속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해서다.

 

대구중학생 자살사건이 이토록 뜨거운 논의를 불러온 이유

 

먼저 대구중학생 자살사건이 그렇게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킨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자.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의 도덕적 둔감성은 이미 상당히 심각해서 자살 그 자체에 대해 강한 사회적 관심이 생겨나지는 않는 것 같다. 이번 사건이 여느 청소년 자살과 다른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자살 외에 다른 요인이 추가되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필자가 보기에 자살한 대구중학생이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을 유서에 소상히 기록했고, 그것이 언론에 보도되었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고 나 또한 그랬는데, 소년의 유서를 볼 때 자살한 소년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더 먼저 다가온 것은 생생한 악(惡)의 이미지였다. 물고문을 하고 전기선으로 피해 소년의 목을 묶어 끌고 다니면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먹으라고 했던 가해자들의 행태에는 단지 돈을 뺐고 뒤통수를 쥐어박는 따위의 통상적인 학교폭력과는 다른 어떤 과잉과 기괴함이 배어 있다. 뒤이어 공개된 자살한 소년의 핸드폰 문자나 가해자들의 문자에서도 그런 느낌이 강했다.

 

이런 가해자들의 행태로 인해 그들에 대한 분노와 개탄이 피해자에 대한 연민보다 더 앞서는 감정이 되었는데, 그것이 두번째로 이야기하려는 왕따와 학교폭력에 대한 논의지형의 변화를 유발한 것으로 보인다. 왕따에 대한 논의는 지금까지 대체로 왕따당하는 학생의 특성에 주목했다. 비록 왕따현상이 우리 교육현실에서 학생들이 겪는 고통과 긴장으로부터 나온 공격성의 산물로 파악되긴 해도, 정작 왕따당하는 학생이 ‘다른 이’가 아니고 바로 ‘그’인 데는 그의 개인적 특징이 작용하고 있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방도 왕따당하는 학생들의 개인적 적응과 교정 그리고 자기방어능력 신장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그런데 대구중학생 자살사건을 계기로 ‘문제는 피해자다’에서 ‘문제는 가해자다’로 논의의 초점이 이동했다. 

 

문제는 피해자가 아니다

 

이는 매우 의미있는 방향전환이기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간과되어서는 안될 중간항이 있다. 그것은 ‘문제는 피해자가 아니다’라는 인식이다. 많은 분석들이 왕따 피해자들의 이런저런 특성에 대해서 말해왔다. 아마도 그런 분석들이 대체로 맞을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이런저런 문제를 가졌다는 것과 그들이 왕따가 된다는 것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누구도 이런저런 어리숙함이나 모난 성격을 이유로 폭력이나 따돌림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도덕적 확신을 사회적으로 확립하는 것이 왕따나 학교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교사는 왕따당하는 학생을 불러 이런 점을 고쳐보라고 말하는 대신 왕따시키는 아이를 준엄하게 야단칠 수 있으며,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두려움 속에서 사태를 방관하던 학생들이 가해자를 ‘이상한 애’ 또는 ‘야비한 애’로 비난할 수 있다. 또한 부모들의 관심사도 제 자식이 왕따당하지 않는다는 안도감을 갖는 것에서 제 자식이 남의 자식을 왕따시키는 수치스런 사태에 빠지지 않는 것으로 바뀔 것이다.

 

마지막으로 왕따와 학교폭력에 대한 논의들에서 발견되는 편향을 살펴보자. 최근의 여러 논의를 보면 좌우파 모두에서 관습적이고 문제가 있는 진단들이 드러난다. 우파적 발상법에서 나온 전형적인 논법은 학생인권조례 제정과 학생체벌 금지가 교사들이 학교폭력을 막을 유효한 수단을 박탈했고 그것이 지금과 같은 문제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 학교폭력에 대한 통계와 진보적 교육감의 분포를 연결해 제시하기도 한다. 이런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학생인권조례나 학생체벌 금지 논의가 나오기 훨씬 전부터 우리 사회는 왕따와 학교폭력 문제에 시달려왔기 때문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통계 또한 자료수집 과정에서의 편기(bias)를 배제한 신뢰성 높은 것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필자 또한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처벌 없이 어떻게 가해자들이 학교공동체로 복귀할 수 있겠는가? 화해는 정의의 열매이지 그냥 주어질 수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처벌을 통해서 그들의 잘못을 가르치는 동시에 그 잘못으로부터 사면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교육적 처벌이다. 또한 가해자들이 지금처럼 심각한 결과에 직면하기 전에 더 빨리 더 제대로 그들의 잘못이 지적되고 처벌되어야 한 다. 하지만 우파적 발상에서 나온 논의는 처벌을 체벌과 곧장 동일시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체벌 아닌 처벌, 참된 교육적 처벌의 방안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의 학교는 우리의 사회보다 더 도덕적인 곳이어야 한다

 

한편 좌파적 논의에서도 편향이 드러난다. 단기적으로는 이명박정부 이후 경쟁교육의 강화 그리고 중장기적으로는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 찌든 우리 교육현실, 부패와 위선이 만연한 기성사회에서 현재의 원인을 찾고, 해결방안 역시 그 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본다. 우파적 논의가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든 경우라면 이런 좌파적 논의는 기본적으로 옳은 구도에만 머무르려 한다는 문제가 있다. 만일 좌파적 논의를 따른다면, 왕따와 학교폭력 문제로 벗어나는 것은 요원할 것이다.

 

달리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학교는 전체 사회의 특징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교가 전체 사회와 일정한 차이를 내며 변화해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다양한 하위 부문들의 불균등한 발전이 사회의 실상에 더 부합하며, 그래서 한 사회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효율적인 부분이 있는 것처럼 더 도덕적인 영역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생각하면 우리의 학교를 우리 사회보다 더 도덕적인 곳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학습의 수준에서 시도되는 혁신학교를 왕따와 학교폭력 없는 도덕적 혁신학교의 실험으로 이어가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분발할 필요가 있다. 교사와 학부모와 교육청이 힘을 모으고 단지 학생들을 돌보는 것을 넘어서 진정으로 가르치고자 해야 하며, 가르칠 만한 자가 될 것을 요구하는 가르침의 엄중함에 자신을 내맡겨야 할 것이다.

 

2012.1.11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