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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이성욱 李晟旭

『한겨레』 기자

 

 

농담의 사회학

KBS 「개그콘써트」

 

 

한 남자가, 여자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너만을 사랑해’라는 말을 끄집어내면 이기는 게임을 벌인다. 하지만 여자가 좀체 호응을 안해주자 화가 난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난 너만을 사랑한다구!” 겁먹은 여자가 말한다. “나도 나만을 사랑해……”

KBS 오락물을 대표하는 동시에 ‘새천년’ 한국 코미디의 대명사가 돼버린 「개그콘써트」의 성공비결이 이런 말장난이다. 우리의 일상을 수놓는 것이라면 거의 빠짐없이 말장난을 위한 패러디 대상이 된다. 광고, 영화, 드라마, 대중가요, 동화, 역사의 위인, 소설, 친구나 연인관계……

「개그콘써트」의 말장난은 영화 「스크림」을 패러디한 꼭지에서 최대치에 이른다. ‘컴퓨터 용어를 말하면 죽는다!’는 경고 자막이 뜬 후 한명씩 죽어간다. “아침에 빨래가 안 말라서 팬티 엄마꺼 입구 나왔…… 윽, 팬티엄! 팬티 아빠꺼 입고 나왔으면 안 죽을 걸” “야, 그렇게 쾅쾅 뛰면 바닥에 홈 패이지. 윽, 홈페이지!” “아까 골뱅이 무침 먹은 게 좀 얹혔나봐. 으윽, 나 왜 죽는 거야?” “하이고 점마 땜에 내 인생도 마 우습게 무너지네. 악! 마우스. 이래 또 죽나. 매정한 사람들 내가 죽게 됐는데 본체만체…… 윽! 본체.”

혹자는 이를 두고 「개그콘써트」가 지나친 말장난에 몰두해 있다고 비판하지만, 말장난 자체를 폄하할 까닭은 없다. 영화 주간지 『씨네21』은 ‘이 주의 한국인, 무엇을 이야기할까’로 시작된다. “위성방송사업, 누가 폭스 ‘머독’을 들이려 하나? 그는 ‘press’업에 종사한다. 가격 누르고 경쟁사 누르고 보도기사 누르고 노동자 누르고” “밥맛없는 땅굴논쟁. 세상에 땅굴이라니 그게 뭔가? 굴이라면 역시 생굴이지!” 한 주간의 뉴스를 간추리되 말을 살짝 비틀어 재미를 주는 동시에 나름의 관점으로 사안을 해석하고 있다. 국내 방송계에 진출하려는 머독의 실체를 은근히 폭로하거나 구태의연한 땅굴논쟁 뒤에 도사린 안보이데올로기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식이다. 이는 농담 같은 말장난이 정치적 기능을 발휘하는 간단한 사례가 된다. 말장난이 뉴스에 적용되면 자연스레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듯, 말장난이 우리의 일상을 농담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일상은 뒤집어지고 해체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뒤집어짐이 절묘하거나 일상의 감추어진 이면에 시비를 거는 순간 말장난에는 쾌감원리가 작동한다. 웃음을 동반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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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콘써트」가 농담과 말장난을 연속된 공연물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라면, 프로이트(S. Freud)나 라깡(J. Lacan)이 등장함직하다. 꿈과 무의식의 상관관계를 파헤친 것처럼 꿈 대신 농담을 대입해 무의식과의 관계를 연구한 게 프로이트이고, 이 연구를 언어적으로 재구성한 이가 라깡 아닌가. 프로이트에게 꿈은 증후인 동시에 치료이듯 농담도 증후인 동시에 치료이다. 억압된 무의식이 꿈을 통해 해방되듯 농담도 억압된 욕망을 해방시켜준다.

「개그콘써트」가 현실의 미묘한 고비들을 농지거리로 만드는 장면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스승님 스승님’ 꼭지에서 스승 김미화가 잘생긴 제자 김대희를 향해 노골적으로 애정공세를 퍼붓고, ‘진실게임’에서 세 명의 여자친구가 진실을 털어놓다 백재현이 “실은 나 남자야”라고 고백할 때 관객들은 폭소를 터뜨린다. 다음은 세 며느리가 까다로운 시어머니에게 맺힌 한을 푸는 ‘동서들의 저녁식사’의 한 장면.

김미화  어머님, 동서들 대신 제가 사과드릴게요. 동서들, 어머님 생신날 이게 무슨 짓들이야. 어머님이 얼마나 속상하시겠어. 난 어머님과 동창이라도 절대 말 안 놓잖아. 강부자, 언제 내가 그러는 거 봤어? 안그래? 부자?

백재현  흑흑…… 원주야! 전원주! 니가 중매해놓고 어떻게 이럴 수 있니?

프로이트는 꿈과 농담을 차이지었다. 꿈이 사회성이 개입되지 않는 정신적 산물인데 비해, 농담은 쾌락 만들기를 목표로 하는 정신적 기능 가운데 가장 사회적이라는 것이다. 꿈은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지만, 농담은 다른 사람의 참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농담을 건네는 열명 안팎의 개그맨들, 코앞에서 그 농담에 폭소를 터뜨리는 700여명의 관객들, 그리고 텔레비전을 통해 웃음을 기대하는 수백만의 시청자들이라는 삼자구도가 정립된 「개그콘써트」는 집단으로 펼치는 ‘농담의 사회학’이다.

‘역사가 꼬인다’에서 한석봉 어머니는 떡을 썰 줄 모르고,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진실은 맹자가 하도 사고를 쳐서 그 어머니가 야반도주를 이어가야 했던 것뿐이다. 교훈의 역사는 조롱거리가 되고, 면박주기라는 코미디 원리는 공주병 환자나 모범생을 비웃는 데 쓰인다.

백재현  쟤 말예요. 좀 전까지 시험 망쳤다고 한숨 쉬더니 또 일등이라잖아요. 거짓말은 범생이들이 더 한다니까.

김영철  맞아. 꼭 저런 애들이 수석합격 인터뷰하면 그러잖아. ‘학교 공부로 충분했어요. 잠도 충분히 자구요!’ 알고 보면 전과목 고액과외에다가 하루 두세 시간 자면 많이 잔 거야!

역할 바꿔보기 게임인 ‘방황’은 노골적으로 우리의 관념을 비웃는다. 비둘기가 된 개그맨이 쌓인 불만을 터뜨린다. “뭐, 내가 평화의 상징이라구? 지들 맘대로 평화의 상징이라고 해놓고는 올림픽 때 성화에 태워 죽여? 그리고 니들! 젤 느린 기차에 왜 내 이름을 붙여? 난 날아다녀. 또 니들 낭만에 사로잡혀서 내 다리에 쪽지 묶어 날리는데, 내가 그걸 전해줄 거라고 믿는 너희들의 상상력은 정말 놀라워! 나 혼자 읽으면서 얼마나 비웃는지 알아. 쓰려면 잘 쓰든지 새대가리인 내가 봐도 아주 유치해 죽겠어.”

농담이 웃음의 쾌감을 성공적으로 충족시키려면 당연히 갖춰야 할 게 있다. 예컨대 농담하는 주체가 자신의 욕망을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듣는 이의 욕망을 이해하고 금지된 것들을 적절히 건드려줘야 한다. 신인 개그맨들을 주전으로 내세우고, 대학로 공연무대를 텔레비전 스튜디오로 옮겨오고, ‘앵콜’ 순서를 통해 바로 앞의 꼭지들을 스스로 뒤집고 해체하는 실험들이 빛을 발하는 건 이런 필요조건이 뒷받침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아쉬운 건, 「개그콘써트」가 소재로 삼는 농담의 대상들이 너무나 안전한 일상에 머문다는 것이다. 정치·경제의 민감한 현안은 농담의 정치학이란 타격 범위에서 제외되어버렸다. 그나마 간혹 등장할 때도 뇌관은 제거된다. 예컨대 이 프로그램으로 우뚝 선 개그맨 심현섭의 단골 메뉴는 김대중 대통령이다. 그러나 그가 흉내내는 DJ는 인자하고 현명하며 따뜻할 뿐이다. 「개그콘써트」가 농담을 통해 풀어놓는 억압된 무의식들은 특정의 울타리에 갇혀 있는 셈이다. 이는 우리 코미디 장르를 짓눌러온 현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