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서평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 비판

F.케언크로스 지음 『거리의 소멸ⓝ디지털혁명』, 세종서적 1999

A.기든스 지음 『질주하는 세계』, 생각의 나무 2000

 

 

김주환 金周煥

연세대 신문방속학과 교수.

 

 

1. 정보통신혁명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을 것인가? 수많은 학자들과 책이 이에 대해 저마다의 답을 내놓고 있으며 신문과 방송을 비롯한 많은 매체 역시 이에 대해 말한다. 정보통신혁명에 대한 담론은 그 외양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첫째는 과장인데, 디지털미디어 기술의 혁신이 경제·정치·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엄청나고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것이다. 둘째는 낙관주의인데, 이러한 모든 변화는 결국 좀더 편리하고, 효율적이고, 자유롭고, 살 만한 유토피아를 가져오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지구적 표준화를 의미하는 세계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됨으로써 결국 전지구적인 단일공동체가 형성되고 전쟁의 위험도 점차 감소해가리라는 것이다. 권력의 분산으로 인해 각국의 정부는 더욱 민주적으로 되고 자유로운 무역으로 모든 국가의 모든 사람이 좀더 풍요로워진다는 것이다. 물론 프라이버시의 침해 등 디지털정보화가 초래하는 약간의 부작용도 있겠지만, 그것은 그다지 우려할 만한 정도는 아니며 얼마든지 기술적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라는 것이다.

대체로 이러한 관점은 정보사회와 디지털통신혁명에 대한 논의의 주류를 이룬다. 이러한 논의들은 변화의 물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열심히 설명하고(하지만 그 설명이 근거 없는 추측이거나 사물의 한 측면만을 보는 근시안적 논의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변화의 근본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관심을 좀처럼 기울이지 않는다. 더욱이 정보통신혁명이라는 변화가 왜 일어나는가, 즉 디지털미디어의 혁명적 발전을 이끄는 근본적인 원동력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아예 질문조차 제기하지 않는다.

 

2. ‘정보통신혁명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을 것인가’ 하는 질문은 바로 프랜씨스 케언크로스(Frances Cairncross)의 저서 『거리의 소멸ⓝ디지털혁명』(원제 The Death of Distance: How the Communications Revolution Will Change Our Lives, 홍석기 옮김)의 부제이기도 하다. 이 책은 디지털정보혁명이 우리 삶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는지에 대해 폭넓게 다루는데, 역시 앞에서 말한 과장과 낙관주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전화·텔레비전·인터넷 등 각종 미디어와 경제·사회·문화·정부·국가 등 다방면에 걸쳐 정보통신혁명이 가져오는 변화를 꼼꼼히 살핀다. 하지만 각기 다양한 변화를 개별적으로 예측할 뿐, 디지털 정보통신혁명 전체를 꿰뚫는 하나의 기본 논리나 의미를 탐구하는 노력은 보여주지 않는다.

신문이건 방송이건 여기저기서 모두들 ‘디지털’이니 ‘인터넷’이니 떠들어대는데 도대체 무슨 소린지 잘 몰라 평소 답답해하던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궁금증을 상당부분 해소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정보통신혁명의 깊은 의미에 더 관심이 있는 인문사회학자라면 이 책에서 바브룩과 캐머론(Richard Barbrook & Andrew Cameron)이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라고 명명한 주류 정보사회론의 과장과 낙관주의의 전형을 읽어내는 재미(?)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케언크로스는 디지털 정보통신혁명은 궁극적으로 거리(distance)가 소멸된 유토피아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제 거리에 따라 통신비용이 더 증가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의 물리적 위치는 더이상 경영상의 의사결정에서 핵심요소가 아니다. 유·무선의 디지털 통신기기로 무장한 기업은 생산성과 효율성을 최적으로 하기 위해 지구 어디에든 존재하게 될 것이다. 전반적으로 세계화가 진행되고, 유동성은 증가할 것이며, 지구촌 사람들은 서로 더 잘 소통하게 되어 상대방 입장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전지구적인 유대관계가 개선될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정부간의 우수한 통신은 항상 평화의 기초가 되어왔다. 한 나라의 정부가 다른 나라 정부의 의도를 명확히 알지 못하면 그들이 서로 싸울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382면) 그리하여 “결국 거리의 소멸은 평화를 위한 강력한 동력이 될 것이다. 국가가 서로 싸우지 못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통신을 이용하는 방법일 것이다.(…)한 나라의 시민은 다른 나라의 시민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인류의 유대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358면)

하지만 국가간의 전쟁 가운데, 통신수단의 미비로 인한 커뮤니케이션 장애가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경우가 인류 전쟁사를 통틀어 과연 몇번이나 될까? 오히려 전쟁은 흔히 서로를 너무 잘 아는 인접국가끼리 더 빈번히 또 더 격렬하게 일어나지 않았던가?

디지털정보혁명이 ‘평화를 위한 강력한 동력’이 되리라는 믿음은 너무나도 순진한 낙관주의이다. 미국의 대통령 클린턴(Bill Clinton)은 이미 수년 전 ‘싸이버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주요정보 하부구조 보호를 위한 위원회’를 창설했고, 미 중앙정보국(CIA)은 ‘정보전쟁쎈터’라는 부서를 신설했으며, 미 국가안보국(NSA)에서는 이미 정보전쟁 전담부서를 창설하여 싸이버전쟁에서의 방어와 공격에 대한 전문성을 확보한 약 1천여명에 이르는 직원을 둔 것으로 알려졌다. 미 국방대학은 이미 미군의 네트워크를 보호하는 기술을 전공한 정보전쟁 전문장교를 졸업시키고 있고, 미 공군과 해군도 모두 ‘템페스트’나 ‘코페르니쿠스’ 등의 독자적인 정보전쟁 관련 부서와 프로그램을 진행시키고 있다.

그러나 약소국가라 할지라도 일류 프로그래머 한둘만 있으면 효율적인 싸이버공격을 감행해볼 수 있다는 데 미국의 두려움이 있다. 이들이 미국 같은 강대국을 한번 공격해보려면 최소 수십억 달러 이상의 전쟁자금이나 최첨단 전투기 혹은 장거리미사일을 반드시 장만해야 하던 것은 이제 점차 옛날이야기가 되어가는 것이다. 이처럼 정보전쟁은 적은 비용으로 효율적으로 적국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특히 제3세계 국가들이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디지털정보혁명은 오히려 각종 테러와 전쟁의 위험성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디지털정보 기술이 인류에게 가져다줄 최대의 (어쩌면 유일한) 선물은 원격의료일지 모른다. 물론 이 기술의 개발도 다른 대부분의 디지털미디어 기술과 마찬가지로 군사적 필요 때문에 이루어졌다. 케언크로스에 따르면, “국방성의 관심은 의사가 안전하게 도달할 수 없는 전쟁터의 부상병을 수술하기 위한 더 좋은 방법을 찾는 것이다.(…)부상병에게 이것이 가능해지면 곧 민간인에게도 가능해질 것”(376면)이라고 한다. 올해 미국 피닉스에서 열린 원격의료학회에서는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해 조종할 수 있는 원격 수술장치는 물론, 몸에 항시 부착하여 의사에게 맥박이나 체온 등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무선송신할 수 있는 단말기 등 다양한 기술이 소개되었다.

원격의료는 의료써비스의 촛점을 진료와 치료(medicine)에서 진단과 관리(health care)로 바꿀 것이다. 예컨대 손목 등 몸에 항시 지니고 다니는 단말기가 송신하는 신체의 각종 정보는 병원의 거대한 의료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되고, 또 일종의 인공지능이라 할 수 있는 지능적 행위자(intelligent agents)에 의해서 실시간으로 분석될 것이다. 이러한 의료씨스템은 몸의 이상을 조기에 발견함으로써 결국 사회 전체의 의료비용을 절감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씨스템이 광범위하게 사용되면, 해킹이나 부정부패 등 각종 범죄에 의해 개개인의 의료정보가 누출되어 인권이 침해될 우려도 있다. 더욱이 씨스템 마비나 데이터베이스 고장은 어떤 환자들에게는 곧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으므로, 그러한 비상사태에 대한 대비도 요구된다.

케언크로스는 또한 디지털정보혁명이 각국의 정치권력을 좀더 민주적으로 재편성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국가 권위는 축소되고 권력은 “개인으로 하향이동”될 것이며 “이는 민주주의를 강화시키고 크게 변화시킬 것”이라는 것이다(356면). 또 역사적으로도 “세계에서 가장 권위적인 정부는 통신시설이 열악하고 시민의 절대 다수가 너무 가난해 데이터 흔적을 남길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같은 곳)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미래의 국가가 이러한 정부만을 갖게 될 것인가? 만약 나찌 같은 전체주의적이고 폭력적인 권력이 디지털데이터베이스를 장악한다면 로저 클라크(Roger Clarke) 같은 학자가 경고하는 데이터베일런스(dataveillance, database와 surveillance의 합성어)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디지털정보혁명은 전자민주주의를 가져올 가능성 이상으로 전자전체주의를 초래할 위험성을 내포한다.

케언크로스는 그러나 중요한 관점 하나를 제시한다. 정부의 기능이 단속과 규제에서 시민의 자율적인 단속으로 점차 변해가리라는 것이다. 즉, 한 나라의 정부는 각종 법률과 검열로 전세계적인 정보유통을 규제할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되며, 따라서 개인의 책임을 증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싸이버공간에서의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과 정부 규제 최소화의 근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디지털 정보통신혁명의 지나친 낙관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테크노리얼리즘의 원칙(자세한 사항은 www.technorealism.org 참조)에서도 천명된 바와 같이, 정부는 정보통신혁명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아울러 인정해야만 한다. 작은 정부와 규제의 부정만을 지향하다가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는 (따라서 공룡 같은 마이크로쏘프트사가 마음껏 활개치도록 방치하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자민주주의에 대해 케언크로스는 또 한번 그의 순진함을 보여준다. “1996년 미국인 9천 280만 명이 대통령선거에서 투표했고 9천 4백만 명이 슈퍼볼을 시청했다. 만일 투표하는 것이 슈퍼볼을 시청하는 것만큼 간편하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투표했을 것이다”(363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투표행위는 정치참여의 가장 기본이며, 매스컴과 개인간 커뮤니케이션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여론의 표출이다. 원격투표는 텔레비전 시청과는 전혀 다른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할 별도의 정치적 행위여야만 한다. 그렇게 이해하고 그렇게 교육해야 한다. 투표행위와 정치적 참여를 순전히 개인의 선택(마치 소비자가 물건 하나 살 때 선택하듯이)으로 파악하는 근저에도 역시 ‘싸이버자유주의’라 불리기도 하는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는 것이다.

 

3. 세계화, 리스크(risk), 전통, 가족, 민주주의라는 다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기든스(Anthony Giddens)의 『질주하는 세계』(원제 Runaway World: How Globalisation Is Reshaping Our Lives, 박찬욱 옮김)는 그가 1999년 BBC방송을 통해 다섯 차례에 걸쳐 강연한 내용을 묶은 것이다. 현대 인류사회의 보편적 변동을 ‘세계화’라고 이해하는 기든스의 기본입장을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전반적으로 낙관주의와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넓게 보아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그들의 입장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기든스는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의 외연이 얼마나 넓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셈이다.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는 정보통신기술이 사회변동의 근본적 원인이라 전제한다. 기든스도 마찬가지로 정보통신기술과 미디어의 급격한 발전을 세계화를 포함한 여러가지 사회변동의 원인이라고 파악한다. 정보통신기술은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간에 마찬가지로 우리들 삶의 짜임새 자체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45면). 예컨대 “텔레비전은 베를린장벽의 개방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또한 “동유럽의 1989년 변동에 있어서도 그와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136면) 또 케언크로스와 마찬가지로 민주화는 초국가적 맥락에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민주국가에서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 그 자체의 심화”이며, 이는 또한 “초국가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145면)

기든스는 정보통신기술과 미디어의 발전에 의해 촉발된 세계화라는 추세가 결국 사적 영역에서는 좀더 나은 가족관계와 공적 영역에서는 좀더 진전된 민주주의를 가져오리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개념은 ‘정서의 민주주의’(democracy of emotions)이다. 이것은 동등한 권리와 의무, 상호신뢰, 대화를 통한 의사소통에 근거한 그야말로 ‘순수한 관계’이다.

 

순수한 관계는 (…) 능동적 신뢰의 과정에, 곧 자신을 남에게 활짝 여는 것에 의존한다. 털어놓는 것이 친밀성의 기본조건이다. 순수한 관계는 은연중에 민주적이다. (…) 좋은 관계는 각 당사자가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고 있는 동등한 사람들의 관계이다. (…) 순수한 관계는 상대방의 관점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의사소통에 바탕을 둔다. (…) 즉 상호신뢰가 있어야 한다. (…) 민주주의에서 모든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평등하며 (…) 상호간의 존경이 따라온다. 열린 대화가 민주주의의 핵심적 속성이다. (125〜26면)

 

이렇게 볼 때, 민주주의와 연애는 동등한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원리를 일반적 인간관계에 적용하자면 ‘일상생활에서의 정서의 민주주의’야말로 21세기 민주주의의 필수조건이 될는지도 모른다.

기든스는 디지털커뮤니케이션 기술혁명이 과연 이러한 정서의 민주주의에 도움이 될지 아니면 해가 될지에 대한 논의는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나는 디지털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는 정서의 민주주의를 현실적으로 구현할 충분한 잠재력을 지녔다고 본다. (나 자신도 어느새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그가 되어버렸는가?) 민주주의 과정에서의 핵심은 여론의 형성과 표출이며, 이에는 매스커뮤니케이션 씨스템뿐만 아니라 개인간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인적 네트워크도 중요한데, 유·무선의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특히 개인간의 ‘정서적’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효과적인 도구라 믿기 때문이다.

사실 정서의 민주주의는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일찍이 바흐찐(Mikhail M. Bakhtin)은 웃음의 중요성을 역설했으며, 철학자 정화열(Jung Hwa Yol)은 정치세계의 축제화(festivalization of the political world)를 주장했다. 바흐찐의 말대로, 민주주의의 적인 폭력의 가장 큰 특징은 웃음을 모른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흐찐이 이야기하는 웃음은 ‘웃는 웃음’(laughing laugh)이며, 즐겁고 열린 웃음이다. 이것은 냉소적이고 부정적이며 닫혀 있는 비웃음과는 다르다. 비웃음은 비(非)웃음이다. 정화열은 심각함과는 달리 웃음은 우리를 고양시키며 해방시킨다고 지적한다. 바흐찐이 옹호하는 웃음은 모든 사람과 전체 세계에 울려퍼지는 사회적이면서 함께 합창하는 형태의 웃음이다. 분노는 우리를 분리시키지만 웃음은 우리를 한데 묶어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디지털 정보통신혁명이 과연 기든스의 ‘정서의 민주주의’나 바흐찐의 ‘웃으며 같이 대화하는’ 민주주의를 가져올 것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정서와 웃음을 가치없는 것으로 폄하하고 심각함과 분노(분노는 폭력의 원동력임에도 불구하고)를 더 가치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대중문화’에 젖어 있다. 가령 텔레비전에서도 분노와 심각함과 관련된 뉴스와 시사프로는 가장 높은 대접을 받고, 가장 천대받는 것이 바로 웃음과 관련된 코미디 프로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희망이 있다고 본다. 디지털매체는 대중매체가 설정한 이러한 정서의 서열을 파괴하면서 웃음과 가벼움을 제대로 대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인터넷과 문자메씨지를 통해 ‘썰렁한 농담’을 수없이 주고받고, 그들의 담론은 계속 가벼워지며 따라서 폭력의 그림자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있다. 비장하고 심각한 얼굴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겠다는 폭력적이고도 전체주의적인 태도가 잘 먹혀들지 않는 곳이 바로 전자게시판과 채팅싸이트라 할 수 있다.

나는 자신이 믿는 바를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로 신념에 가득 찬 사람이 많은 나라일수록 민주화가 덜 되어 있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러한 신념은 폭력과 전쟁만을 일으킬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소설 『장미의 이름』의 윌리엄 수도사는 이렇게 말한다.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일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가 웃게 하는 일일 듯하구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리가 아니겠느냐?”(움베르또 에꼬, 홍윤기 옮김, 열린책들 1986, 553면)

 

4. 새로운 정보통신기술에 대한 과장과 낙관주의로 특징지어지는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를 비판한다고 해서 정보통신기술이 가져올 변화를 별것 아닌 것으로 폄하하거나 그 부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해서는 안될 것이다. 문자의 발명, 인쇄기술의 발전, 전자대중매체와 영상매체의 발명 등 미디어의 발전이 인류사에 미친 영향에 비추어보면, 현재 진행중인 디지털매체의 혁명적 발전도 분명 우리 삶의 여러 측면을 변화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에 대한 지나친 호들갑이나 낙관이 정보통신기술에 관한 우리의 담론을 지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케언크로스나 기든스의 책을 비롯해 요즈음 쏟아져나오는 미래예측에 관한 책들을 대할 때, 우리는 그러한 글들이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얼마나 받고 있는지 가늠하면서 좀더 차분히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