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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집에 대한 감상

김진애 『이 집은 누구인가』, 한길사 2000

 

 

전봉희 田鳳熙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집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의미로, 그러나 결국은 같은 의미로, 건축가들에게도 영원한 숙제이다. 집은 우리가 갖는 최소의 사회적 공간이면서 최대의 개인적 공간이기도 하다. 집은 인생에서 경험하게 되는 최초의 외부 공간이면서 또 마지막 이승의 공간이다. 물론 요즘은 둘 다 병원일 때도 많지만, 그렇다고 집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때문에 병원의 집다움에 대해서 연구한다. 건축가라면 대학에 들어와 배우는 최초의 실습과제가 집이지만, 어떠한 원로 건축가도 주택의 설계를 만만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집은 하나가 아니다. 한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아버지의 집이 다르고 어머니의 집이 다르며 아이들의 집과 할아버지의 집 역시 다르다. 집은 서민들에게 중산층으로 올라서는 목표지점이고, 중산층에게는 더 많은 재화를 생산할 수 있는 재테크의 수단이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에 지어지는 모든 건축물의 총량 가운데 절반이 아파트로 대표되는 집이다(그러나 이것은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인 현상은 아니다. 일간지에 매주 아파트의 시세를 게재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모든 사람은 집 없이는 살 수 없으며, 아니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나 집이 되며, 그렇기 때문에 집의 역사는 건축의 역사보다도 오래되었고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한 미래사회일지라도 집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109-369최근 김진애(金鎭愛)가 이러한 집에 대하여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냈다. ‘누구나 살고 있는 집, 누구나 알고 있는 집’에 대하여 ‘이 집은 누구인지, 몇시인지, 어떤 성인지’를 묻고 답한다. 다작으로 유명한 그가 ‘만 5년’을 붙들고 있었다고 하니, 집에 대한 글쓰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책 속에는 모두 열세 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그것들은 기억이나 체험, 자연이나 성(性)과 같은 낭만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신문에서 다루는 것과 정반대의 것을 다루고 있는 셈이다. 기억 속에 새로운 집, 일상생활 속에서 문득문득 살붙이로 여겨지는 집, 비와 바람과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집, 건강한 에로티시즘이 넘쳐나는 집을 그는 바라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들 “알고 있고 바라고는 있지만 차마 그렇게 살고 있지는 못한 이야기”(6면)라는 자기고백은 그래서 매우 정확하다.

건축사를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베스트쎌러 작가 유홍준(兪弘濬)의 집으로 유명세를 더한 학동 수졸당(승효상承孝相 설계)을 학문적으로 매우 높이 평가한다. 우리나라에 근대건축이 들어온 이후 콘크리트로 만든 최고의 집으로 손꼽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에 대한 강연을 마친 후 청중석에서 나온 ‘그런데 왜 그런 집이 많이 안 지어지고 다들 아파트에 살아요?’라는 질문 앞에서 좌절한다. 두 다리에 힘이 쭉 빠져 강단을 물러날 힘이 없을 정도이다. 핑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건설업이 국가의 기간산업인 나라, 수도권에 인구의 절반이 모여 사는 나라, 불과 몇년 만에 인구 60만의 신도시를, 그것도 동시에 여러 개를 만드는 나라에서 집의 정신적 가치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과연 정당한가. 주인집 아이에게 맞고 돌아온 아이를 나무라야 하는 지하 셋방의 ‘원미동 사람들’과, 창문을 열면 옆집 담벼락만이 보이는 ‘외딴 방’의 여공들과, 아침마다 공중변소 앞에 길게 줄지어 선 ‘어둠의 자식들’에게 낭만적인 ‘나의 집 체험’(263〜306면)은 공허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집을 포기할 수는 없다. 저자의 말대로 몇년 후에는 우리나라의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을 것이고, 그때가 되면 우리는 양보다는 질을 생각할 것이며, 또한 오늘 우리의 작업은 내일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집은 곧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 점을 강조한다. 물신화된 객체로서의 집을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식구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애정을 쏟는 기술을 가르쳐준다. 문짝을 조정하고 구석을 만들고 가구를 이동하고 물청소를 하면서 나와 집은 두 개가 아닌 하나가 된다. 비단 나와 집의 문제만이 아니다. 집을 통하여 붕괴된 가족공동체를 복원하고 잊혀진 신성을 회복하라는 충고도 잊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부엌에 대한 감상이 돋보인다. 그는 부엌이 가지는 여러 복합적인 성격에 대하여 주목하고, 전통 한옥에서의 마당과 아파트의 거실을 거쳐 부엌이 새로운 주거의 중심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78면). 그는 ‘예술성’을 지적하였지만 사실 음식을 조리하고 함께 먹는 일은 가장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생활의 모습이기도 하다. 음식을 대접하는 일은 신에게 희생을 바치는 일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것을 같이 나누어 먹는 일은 동류의식을 재확인하고 서로 배반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다른 모든 일은 혼자 해도 밥 먹는 것만큼은 아직까지 여럿이 같이 한다. 혼자 밥 먹는 일이 얼마나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지는 겪어본 사람은 다 안다. 반대로 다른 모든 것은 같이 할 수 있어도 여전히 혼자 하는 행위가 배설행위이다. 이것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모든 비밀을 밖으로 뽑아낸다는 점에서 일종의 신앙고백과 같고, 극단적 수치심으로 보호되는 최후의 개인이다. 따라서 가정이 해체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부엌은 집의 마지막 공동공간이 될 것이고, 다른 한편 가정마저 해체될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집의 중심은 변소와 욕실이 될 것이다.

알고 있고 바라고 있지만 그렇게 살지는 못하는 것이 역시 문제다. 이 책이 떠나온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명절에만 돌아가는 고향. 그 숨막히는 귀성행렬이 다음 세대에도 계속될까. 필자의 생각은 부정적이다. 때문에 이 책은 이 세대의 일부와 함께 지나가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함없는 힘을 가질 수 있는 메씨지가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개성있고 능력있는 집의 주인이 되기를 권하는 부분이다(261면). 우리는 수억원을 깔고 사는 것도 아니고 25.7평 속에서 사는 것도 아니다. 이 집은 내 집이고 나의 삶 그 자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