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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 | 테러, 전쟁 그리고 그후

 

하나의 전쟁, 수많은 전쟁‘들’

여성주의 시각에서 본 보복전쟁

 

 

시타

델타페미니스트 회원.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회원. 전쟁을 반대하는 여성연대 회원. sita@jinbo.net

✽ 이 글은 많은 여성들의 이야기와 글에서 도움받아 씌어진 것이다. 특히 내가 참여하고 있는 ‘전쟁을 반대하는 여성연대’(Women Against War, WAW)의 회원들과 회원싸이트에 올려진 자료들이 없었다면 이 글은 씌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들에게 감사한다.─필자

 

 

누구의 입장에서 전쟁에 반대하는가?

 

할리우드 영화 장면보다 비현실적으로 보였던 9·11 테러가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을 때, 패닉 상태는 재빨리 해소되는 것처럼 보였다. 많은 국가들이 부시의 무력 사용을 ‘테러에 대한 정의로운 전쟁’으로 이름붙이는 데 전례없는 열정을 보여주는 가운데, 별다른 증거조차 없이 오사마 빈 라덴을 테러범으로 지목한 부시정부의 보복전쟁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금, 어떤 사람들은 전쟁을 지지하고, 어떤 사람들은 전쟁에 무관심하며, 또다른 사람들은 전쟁에 반대하고 있다. 굳이 셋 중에 선택을 하라면 나는 물론 ‘반전’을 주장하는 마지막 부류의 사람들에게 지지를 보낸다. 그들은 미국정부를 비난하고 아프가니스탄 민중들을 걱정한다. 그러나 반전의 목소리들 대부분을 채색하고 있는 이러한 어조에는 분명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물론 반전의 움직임들이 생겨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한때 적극적으로 원조했던 탈레반정권의 아프간을 이제 ‘테러국가’로 정의하고 그에 대해 전쟁을 감행하는 부시정부의 행태는, 이미 750만의 사람들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는 지뢰투성이 땅 여기저기에 얼마 안되는 구호식량을 떨어뜨리는 제스처로 가려지기에는 너무도 터무니없는 것임을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이러한 통찰 속에는 ‘미국 대 이슬람’이라는 이분법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어떤 것이 포함되어 있다. 전쟁은 국가와 국가 간에 일어나는 무력분쟁이라기보다는 소수의 지배집단이 다수의 민중들을 대상으로 행하는 폭력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또다른 함정이 존재한다. 도대체 ‘다수의 민중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폭력’이라고 부르는가?

국가 대 국가라는 구도의 선명함을 깨뜨리고 평화와 인권에 대한 인식을 진전시켜온 많은 진보운동들은 거의 예외없이 바로 이 ‘민중’이라는 단어 앞에 멈추어선다. 마치 ‘민중’은 모두 똑같이 억압받는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여성주의 운동과 많은 사회적 소수자들의 운동이 역사적으로 입증해왔듯이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전쟁은 여성과 남성에게,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에게, 장애인과 비장애인에게 똑같은 의미를 갖지 않는다. 결국 모두가 ‘하나의’ 전쟁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누구의’ 입장에서 전쟁에 반대하는가”이다.

 

 

“모든 전쟁은 여성에 대한 전쟁이다”1

 

그렇다면 전쟁은 여성들에게 무엇을 의미할까? 전쟁과 여성이라는 단어를 나란히 놓았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일본군 성노예의 참혹한 역사를 증언하는 정신대 할머니들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일본군 성노예의 역사는 그저 ‘사실’로서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남성들이 ‘우리 처녀를 강간한 일본놈들’을 비난할 때, 여성들은 그들이 ‘처녀’가 아닌 희생자들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과 그들 또한 강간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떠올리듯이 말이다. 보스니아·르완다·동티모르에서 자행된 집단강간의 사례에서 보듯이, 역사적으로 여성들은 언제나 전쟁의 약탈물로서 간주되어왔다. 이러한 역사적 예들이 보여주는 것은 전쟁시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강간·구타·학대와 같은 폭력들이 국가간 대립의 문제라기보다는 여성과 남성의 문제라는 점이다.

하지만 전쟁이 여성에게 의미하는 바가 이와같은 ‘직접적’ 폭력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9·11사태 이후 미국에서 항공사 노동자들에 대한 대량해고가 이루어진 이후 그 사회적 부담이 결국 누구에게 전가되었을까를 상상해보자. 해고당한 남성들의 ‘아내’들은 구멍난 생계를 위해 열악한 조건의 파트타임 노동이라도 찾아 거리로 나서야 할 것이다. 해고당한 ‘여성들’은 자신의 남성동료보다 더 일자리를 얻기 힘들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IMF사태가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큰 악영향을 주었듯이, 경제불안이나 사회적 위기는 여성들에게 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전쟁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군비증강은 사회복지예산의 전반적인 축소를 가져오는데, 이것이 빈곤층의 상당수를 형성하고 있는 여성들에게 치명적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부시 지지율 90%의 신화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전체화되고 획일화된 사회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여성과 소수자들의 목소리는 가장 먼저 발언권을 박탈당한다.2 사회적으로 필수적인 많은 써비스는 당연히 ‘집에 남은 여성들’의 몫으로 전가된다. 물론 폭격을 당한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여성들에게 이번 전쟁이 미치는 영향의 양상은 이와 다르다. 아프간 여성들은 해고당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예 직업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프간 여성들은 발언권을 박탈당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남성 직계가족의 동반 없이는 집 밖으로 나갈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아프간 여성들에게 이번 전쟁은 수십년간 지속되어온 전쟁의 계속일 뿐일지도 모른다.

 

 

부시의 보복전쟁이 아프간 여성들을 해방시킬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전쟁은 나쁜 것’이라는 명쾌한 도덕심을 가졌던 사람들이 처참한 상황에 놓여 있는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존재를 보면서 곤혹스러워한다는 점이다. 전쟁은 나쁘지만, 탈레반만큼 여성억압적인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그나마 좋은 면도 있지 않겠냐는 식이다. 정말일까? 정말 이 전쟁이 아프간 여성들을 해방시킬까? 이미 20년간 지속된 내전의 피해자인 아프간 여성들을?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이번 전쟁과 관련된 몇가지 역사적 사실들만 되짚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애초에 아프가니스탄에 탈레반정권이 들어서도록 원조한 것이 바로 미국정부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집권한 탈레반세력은 여성들을 집안에 가두고 그녀들의 모든 법적·경제적·사회적 권리를 박탈했다. 교육받을 권리와 취업의 권리를 박탈당한 전쟁 미망인들은 거지가 되어 구걸을 하고, 진료받을 권리가 없는 영아 및 여성들의 사망률이 세계 최대치를 기록했으며, 큰 소리를 내거나 옷 밖으로 손이 보였다는 이유로 여성들이 죽도록 구타당하는 일이 거리 곳곳에서 벌어졌고, 연애 상대나 결혼 상대를 자율적으로 결정한 여성들은 아버지와 남동생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러나 세계는 탈레반의 잔혹한 여성억압정책에 무관심했고, 미국정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상황이 바뀌자, 이번에는 미국이 탈레반정권을 비난하면서 ‘여성억압’ 문제를 끼워넣기 시작했다. 아프간에 있는 또다른 정치세력인 ‘북부동맹’ 또한 이러한 정세에 발맞추어 스스로를 ‘탈레반보다 덜 여성억압적인 대안세력’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북부동맹의 전사들은 자신들이 정권을 잡았던 1992〜96년의 기간 동안 여성의 권리를 억압하고 수많은 강간과 잔혹행위를 자행했던 바로 그 자들이다. 결국 부시정권도, 탈레반정권도, 빈 라덴도(그가 한때 미국 CIA의 조직원이었다고 주장하는 외국문헌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북부동맹도 여성들에 대한 ‘전쟁’을 자행하거나 그것을 묵인하고 지원해왔다. 이 전쟁에서 ‘여성인권’이라는 말은 각자 편의대로 자기 정당화를 위해 끼워넣을 수 있는 수사학에 불과한 것이다.

부시정권은 정의의 편에 선 강한 남성이 악당의 손아귀에서 여성을 구해준다는 진부한 슈퍼맨 씨나리오를 늘어놓고 있다. 그러나 여성들은 이것이 거짓말임을, 즉 자신들이 악당들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슈퍼맨에 의해서도 억압받고 있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부시의 편도, 빈 라덴의 편도 아니다”라고 말했던 한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말처럼. 그렇다면 부시정권의 슈퍼맨 이야기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혹시 그들 역시 슈퍼맨 이야기의 신봉자들이기 때문은 아닐지?

 

 

무엇을 ‘전쟁’이라고 부를 것인가?: 일상적 폭력과 전쟁 폭력

 

이 ‘슈퍼맨 이야기’의 상황설정에는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한 이슬람문화권을 야만 그 자체, 절대악으로 묘사하는 흑백논리가 도사리고 있다. 한쪽을 악당 그 자체로 만듦으로써 다른 한쪽은 도덕적 선(善)의 지위를 얻는다. 그러나 이러한 설정 속에서 악당과 슈퍼맨은 모두 남성이며, 여성은 억압받거나 구해지는 대상일 뿐이다. 여성의 입장에서 ‘반전’을 말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와같은 함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탈레반 치하의 여성억압을 단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우리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어떤 야만적 상황으로 치부해버림으로써 얻게 되는 손쉬운 도덕적 위치를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남성들을 유혹한다는 이유로 여성들에게 하이힐 착용을 금지하고 온몸을 검은 천으로 휘감게 하는 아프간의 규율은, 성폭력 피해자들의 ‘품행’을 문제삼는 한국사회의 인식을 생각나게 한다. 탈레반이 한때 우리 사회보다 여성에 대한 교육률이 높았던 아프간의 여성들에게 교육을 금지시킨 것은 1세기 전만 해도 한국사회에 역시 적용된 관습이었다. 아버지나 오빠, 심지어 아들의 동행 없이는 외출조차 불가능한 아프간 여성들의 상황은 한국사회에 온존하고 있는 호주제의 논리와 닮아 있다. 여성이 오직 가사노동을 하고 남편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며 아이를 낳는 도구에 불과한 상황이 아프간에서만 벌어지는 특수한 일이라고 과연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아프간이나 이슬람문화권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회가 여성을 남성, 가족, 국가나 인종, 아니면 특정 종교의 소유물로 정의해왔는데 말이다. 탈레반정권의 이슬람 원리주의가 문제인가? 그러나 기독교나 유교 같은 우리에게 좀더 친숙한(?) 종교들 역시 여성억압적이다. 전쟁이 문제인가? 분명 전쟁이 여성들에게 더욱 커다란 재앙을 가져오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화시에 여성들이 폭력에서 자유롭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볼 수 있다. 여성들에게 전시와 평화시의 명확한 구분은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전쟁’이라는 단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이제까지 전쟁이라는 용어는 언제나 가부장적 공/사 분리 속에서 ‘정치적’ 혹은 ‘공적’이라고 불리는 남성집단들 사이의 무력갈등만을 지칭해왔다. 그러나 여성의 시각에서 본다면, 전쟁은 단지 국가의 선포에 의해 시작되고 끝나는 어떤 것만은 아니다. 부시가 전쟁을 선포하기 이전부터 아프간 여성들이 이미 ‘전쟁 상황’에 놓여 있었듯이 말이다. 많은 여성주의자들은 전쟁시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일상적 폭력과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해왔다. 탈레반정권이 자행하고 있는 여성억압에 경악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러한 폭력의 상황에서 자신을 분리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하여 자신의 일상 속에 있는 여성폭력에 더욱 둔감해지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하나의 전쟁, 수많은 전쟁‘들’:

여성과 소수자의 입장에서 전쟁에 반대하기

 

죽이는 자들과 죽임을 당하는 자들을 구분해내는 것, 그리고 특히 죽임을 당하는 자들의 ‘성별’을 구분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보복전쟁을 감행하고 있는 미국에도 성조기의 물결 뒤켠에 군비증강으로 인해 삭감된 복지예산으로 생존의 위협을 당하게 될 빈민여성들이 있다. ‘광신도들’이 차지한 야만의 땅 아프가니스탄에도 손톱을 물들였다는 이유로 손가락을 잘리는 이슬람교도 여성들이 있다. 전쟁은 나쁘다. 그러나 ‘무엇이’ 전쟁인지, 그리고 그것이 ‘왜’ 나쁜지를 질문해야만 한다. ‘누구의’ 입장에서 전쟁에 반대하는지를 물어야만 한다. 반전운동이 의미와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전제하에서이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전쟁의 최대 피해자였던 여성들과 사회적 소수자들의 입장에서 그러한 질문들, 그러한 행동들이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입장에서 ‘평화’와 ‘반전’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군대에 간 아들을 걱정하는 모성의 실현이나 ‘아무것에 대해서도 싸우지 않겠다’는 타협의 표현이 결코 아니며, 반대로 전쟁 폭력과 일상적 폭력의 연관성을 간파하고 맥락화함으로써 양자 모두에 급진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들과 정신대 할머니들, 전쟁시의 집단강간 피해자들과 아프간 여성들에게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며, 많은 여성들에게 ‘전쟁’은 일상적이고 다중적으로 발생하고 있다.3 모든 전쟁이 여성에 대한 전쟁일 뿐만 아니라, ‘전쟁’개념 그 자체가 국가와 국가간의 대립과 같은 ‘공적인’ 영역에 한정된 것이 아닌 일상적 폭력과 연관된 어떤 것으로 다시 사고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미국의 보복전쟁을 바라보는 지금, 여기의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은, 전쟁이 여성과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것, 그리고 일상적 폭력을 포함한 모든 여성과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전쟁들’에 구체적으로 반대하고 그러한 수많은 ‘전쟁들’을 없애기 위해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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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쟁을 반대하는 여성연대’ 성명서에서 인용. http://www.freechal.com/kwaw.
  2. 미국 개신교 우파교단의 제리 폴웰 목사가 9월 13일 미국기독교방송네트워크 CBN에 출연해서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은 그 극단적인 예를 보여준다. “화요일의 대참사는 페미니스트, 임신중절권 지지자들, 동성애자들, 이교도들 때문에 일어났다.”(조이여울 「“우리는 부시편도, 라덴편도 아니다”」, 『여성신문』 645호에서 재인용)
  3. 창비사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불과 몇달 전에 벌어진 ‘전쟁’을 상기해보라. 그것은 한 여성에게 가해진 명백한 ‘폭력’이자 ‘테러’였다. 그 사건이, 여성인권을 외치며 시위대에 합류한 여성을 불태워 죽이는 아프간에서의 ‘여성에 대한 전쟁’과 얼마나 다를까? 이것은 『창비』의 지면에 실릴 이 글이 반드시 언급해야만 하는 사건이며, 동시에 ‘반전’에 관한 기획을 마련한 『창비』 편집진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