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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서정의 힘, 삶의 진실을 이끄는

 

전윤호 시집 『순수의 시대』, 하문사 2001

박성우 시집 『거미』, 창작과비평사 2002

채호기 시집 『수련』, 문학과지성사 2002

 

구모룡 具謨龍

문학평론가. 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평론집 『문학과 근대성의 경험』 『제유의 시학』 등이 있음. kmr@hhu.ac.kr

 

 

1. 서로 다른 글쓰기 경향을 보이고 있는 세 권의 시집을 읽었다. 전윤호의 『순수의 시대』, 박성우의 『거미』, 채호기의 『수련』. 모두 진지하고 성실하게 씌어진 시집들이어서 발상과 의도를 따라가면서 각자의 시쓰기가 드러내는 개성들을 만날 수 있었고, 특히 발화와 담론의 차이에 주목할 수 있었다. 전윤호의 시가 환상의 배후에 환멸의 묵시록을 깔아두는 이중적 전략으로 서정의 아름다움을 배가시켰다면, 박성우의 시는 낱낱의 사물들에 내재한 이야기들을 서로 겹쳐 서술함으로써 서정의 영역을 확장하고 그에 구체성의 살을 더했다. 시적인 것의 본질 탐구를 위해 ‘수련’이라는 하나의 시적 대상을 매개로 메타시(시에 관한 시)를 쓴 채호기는 시적 궁극에 이르려는 다양한 시도와 성실한 과정을 보였다. 이들은 모두 서정이, 여전하게 삶의 진실을 이끄는, 우리시대의 중요한 문학적 담론이라는 사실을 일깨웠다.

 

2. 전윤호(全潤浩)의 『순수의 시대』는 먼저 ‘도원’으로 명명되는 장소를 서정으로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는 데서 관심을 끈다. 1부 ‘도원 가는 길’을 구성하고 있는 풍경화들은 경험적 고향과 그로부터 상상된 이상적 삶에 대한 동경을 주로 담고 있다. 낭만적 동경이 그렇듯이 그의 동경 또한 이미 없거나 사라지고 있는 것에 대한 강한 집착과 구별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근대적 삶을 묵시록적으로 그리고 있는 2·3·4부가 또한 주목된다. 양적으로 보면 그의 시적 주제는 단연 근대의 역사와 도시문명적 삶에 대한 환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근대의 폭력으로 죽어가는 고향의 재생을 꿈꾼다. 여기에 두 개의 풍경, 이상적인 환상의 풍경과 묵시록적 환멸의 풍경이 공존하는 까닭이 있다.

전윤호의 시쓰기는 환상과 환멸이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으로 작용하는 가운데 생성한다. 따라서 그의 시는 환상과 환멸이 펼치는 진자운동으로 읽힌다. 그 한끝에 ‘도원-고향’이 있다면 다른 한끝에 ‘도시-폐허’가 있다. 이를 다시 진자운동의 흐름으로 그려보면 도원-고향-도시-폐허의 순서가 된다. 시인은 고향과 도시 사이의 현실적 위치에서 도원과 폐허를 상상한다. 도원은 과거로부터 상상된 미래이고 폐허는 과거가 될 미래이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시인의 현실 위치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시의 시점이 되기 때문이다. 현실 위치에서 시인은 근대와 도시문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견지한다. 이는 시인의 근대인식을 집약하고 있는 2부 ‘프랑스 혁명사를 읽다가’에 실려 있는 시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시인은 2부에서 근대 이후 근본적인 삶의 개선은 없었으며 오히려 악화일로의 도시문명만 번성하고 있음을 말한다. 가령 「프랑스 혁명사를 읽다가–감옥」에서 시인은 프랑스 혁명이 바스띠유 감옥만 열었을 뿐 진짜 감옥인 도시를 해방하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봉건시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혀 달라지지 않고 있는 ‘특권층의 학정’을 제기한다. 이러한 인식에 비춰 시인의 근대에 대한 ‘선전포고’는 당연한 것이 된다.

 

우리의 목표는

이 지긋지긋한 도시를 떠나는 것

설혹 패한다 할지라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어리석음이 만든 이 거대한 도시는

밀림에 버려져

천년 후에나 발견될 것이다

–「선전포고」 부분

 

118-353

 

근대와 고향, 도시와 농촌, 문명과 자연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인식하는 것은 단순하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의 단순성이 진실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고향이 훼손되고 파괴되는 과정을 아프게 경험하고 있는 이라면 근대의 도시문명에 대한 적의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시인은 점령당한 고향을 탈환하기 위한 “테러리스트”(「내 마음의 쿠르드족 1」)를 꿈꾼다. 이 지점에서 두 가지 방향의 급진적 상상이 나타난다. 그 하나는 사막의 폐허로 바뀌는 도시에 대한 상상이고, 다른 하나는 시원의 유토피아인 ‘도원’에 대한 상상이다. 전자는 3부 ‘순수의 시대’의 시편들이 묵시록적인 미래의 싯점에서 “거대한 무덤”(「고분시古墳市–도굴범」)이 된 도시를 그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시인은 폐허로 변할지도 모를 미래에 대한 상상으로 물질의 문명, 자본의 도시에 적대적이다. 이처럼 도시적 삶에 대한 시인의 환멸은 크다. 또한 이러한 환멸의식이 시인의 귀향을 불안하게 한다. 고향이 종국적인 파멸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암울한 귀향도 예감된다.

 

오동나무 그늘진

옛집을 서성인다

몇가지 썩지 않은 기억들이

장독대에 옹관처럼 서 있다

강변에 앉아 부러진 손톱에 햇볕을 모으면

서산에서 날아오르는 까마귀

짐승 발자국 하나 없는 눈 속에서

옥수수 대들이 겨울바람에 몸을 말리는

사방 길이 지워진

무덤 위에 지은 무덤

–「귀향」 전문

 

이 시는 겨울 이미지에 기대어 도래할지도 모를 완벽한 고향상실을 예고하고 있다. 모든 자연 사물들이 마르고 죽고 썩어 마침내 그에 대한 기억마저 불안정한 미래의 고향이 그려진다. 이처럼 시인은 문명의 악몽에 시달리면서 궁극적인 고향소멸의 불안에 사로잡힌다. 또다른 급진적 상상인 ‘도원’은 이러한 불안의식을 뚫고 나타난다. ‘도원’의 상상은 가장 급진적인 유토피아 의식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근대와 도시문명에 전면적으로 반립(反立)하는 시인의 의식에 비춰 도원을 정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소지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를 과거로부터 미래를 상상하는 시인의 계보에 놓고 폭넓게 이해하고자 한다. 이럴 때 그의 귀향의지나 이상적 풍경인 ‘도원’ 서술은 퇴색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시세계의 전체적 맥락에서 ‘도원’의 의미는 깊다. 무엇보다 이는 전윤호의 시적 원천이어서 이를 제외하고 그의 시를 해명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한다. 또한 그의 가장 중요한 시적 성취나 그의 시가 주는 감동도 이것에서 비롯한다.

아름다운 장소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그의 시는 시원의 풍경을 재생한다. 그가 그린 시적 풍경화는 대체로 1부 ‘도원 가는 길’에 집중되어 있는데 모두 지금-이곳의 현실로부터 거슬러 되돌아가는 귀향의식의 산물이다. 원초의 고향을 마음에 품고 사는 시인에게 고향은 행복의 몽상을 부여하며 자기정화와 위안의 거처가 된다. 하지만 이로써 현실적 삶과의 불화는 커질 수밖에 없다. 전윤호는 이러한 불화를 시적 원천으로 삼는다.

 

관속에 누웠다 깬 밤이면

돌아가고 싶다

뒤통수나 잘 치는

강 하류배들과 싸우다 지친 귓전에

젖은 디젤기관차 소리

밤 두시 별어곡 역에 내려

민둥산을 올라가리라

키보다 높은 억새들이 별빛도 가린 밤

내가 아직 나라면

무릉 약수에서 한번만 쉬고

입구를 찾을 것이다

돈 먹은 심판과

피에 주린 관중이 없는 곳

초등학교 단짝이

첫사랑과 사는 곳

그곳에서 매 맞던 세월을 잊고

아라리 한소절로 남고 싶다

–「도원읍」 전문

 

시집의 처음에 실려 있는 이 시가 전하는 의미는 강렬한 귀향의지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의지를 강화하는 것은 악몽과 같은 현실이다. “관 속에 누웠다 깬 밤이면/돌아가고 싶다”는 구절이 이를 말한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환멸에서 비롯한 귀향의지를 실행하기란 쉽지 않다. 이미 완전한 귀향이 불가능한 삶의 조건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듭된 희망을 키우면서 삶을 변화시킬 방도를 궁리하게 된다. 만일 이 시의 1, 2행을 ‘관 속에 누웠다 깬 밤이면/돌아간다’라고 표현했다면 시적 긴장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시인은 ‘돌아가고 싶다’라는 원망(願望)의 술어로써 서정의 현실성을 담보한다. 이러한 원망의 술어는 마지막 행에서 다시 반복되면서 정서의 구체성에 육박한다. 이처럼 원망의 수미상응으로 시적 긴장과 의미를 심화하는 이 시는, 기승전결의 전통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다. 1〜2행/3〜7행/8〜11행/12〜17행의 네 부분의 의미단위로 분석되는 이 시에서 의미의 전환이 일어나는 것은 셋째 단위이다. 여기서 자아정체성 확인과 자아확대의 의지가 나타난다. “내가 아직 나라면”이란 구절은 반성과 자책인 동시에 자신과 자부의 의미를 포함한다. 이러한 과정이 있어 마지막 의미단위에서 ‘아라리’는 구체적인 몸을 갖게 된다. 서정의 힘은 이처럼 환멸을 희망으로 바꾸고 환상을 현실의 문맥으로 이끌어올 때 생긴다.

 

3. 박성우(朴城佑)의 『거미』는 그 표제작에서 보듯 사물(事物)에 대한 섬세한 이해를 글쓰기의 바탕으로 삼고 있다. 「거미」에서 그는 허공에 길을 내며 사는 거미의 생리를 줄을 매고 자살한 한 사내의 생과 대비한다. 이 시의 의도는 이러한 대비의 담론이 만드는 효과에 있다. 미리 말하자면 이 시는 ‘거미보다 못한 인생’을 말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 시의 특징은 이러한 의미에 있기보다 시적 담론을 구성하는 방법에 있다. 전체 4연인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한 사내의 자살사건을 2, 3연에 배치하고 거미의 생리라는 사물 현상을 1연에 제시한다. 이 시에서 글쓰기의 과정은 재료습득 과정의 역순일 듯하다. 옥탑에서 줄을 달아 목을 맨 사내의 모습에서 “거미줄에 걸린 끼니”, 그물에 걸린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을 떠올린 것이다. 이러한 순서는 시제의 변화에서 잘 나타난다. 거미의 생리를 말하고 있는 1연이 현재형 서술이라면 이에 대비되는 사내의 자살사건을 전달하고 있는 3, 4연은 과거형 서술이다. 이러한 시제의 차이에서 과거 사건과 현재의 사물이 병치되고 대비된다. 이러한 병치와 대비의 과정에서 화자의 개입은 극도로 자제되고 객관적인 서술이 지속된다. 화자의 개입은 마지막 4연에 나타난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이로써 거미보다 못한 인생이라는 이 시의 의미가 명료해진다.(「거미 2」에서 시인은 거미의 시점을 선택하여 「거미」의 의도를 극대화하려 한다. 하지만 의도에 비해 의미관계가 만드는 긴장이 무너져 시적 효과는 크지 않다.)

이처럼 박성우는 사물들의 현상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이를 서술한다. 그는 새·달팽이·개구리밥·단풍·감꽃·망둥어·누에·콩나물·두꺼비·취나물·깨꽃 등의 자연물, 마이산·어청도·소록도·정읍역·강천사·내소사·망해사 등의 장소,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시한 가족과 자기의 역사 등 모든 사물들을 시적 원천으로 삼는다. 그의 시쓰기는 그가 만난 사물들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이를 서술하는 것이다. 앞서 표제시 분석으로 박성우의 시쓰기가 지닌 개성의 일면을 접할 수 있었는데, 그는 우선 하찮은 사물과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주류적인 것을 좇는 현실에서 주변적인 것을 발굴하여 그 나름으로 사물의 질서를 새롭게 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일에 있어 그는 어떤 주장이나 이념의 전제 없이 사물의 현상 그 자체에 다가가는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태도는 먼저 스스로 주변에 속한다는, 주변적인 것과의 동류의식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 난 떨어져나가야 했을 귀퉁이에 불과해”(「귀퉁이」)와 같은 주변인 의식이 그것이다. 다음으로 사물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그의 정직성을 들 수 있다. 그는 “내가 조교로 있는 대학의 청소부인 어머니”(「찜통」)라는 구절처럼 자신과 가족의 삶의 역사를 진솔하게 서술한다. 자기의 모든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말할 수 있기에 그 또한 다른 사물들의 이야기들을 진실되게 이해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물들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박성우의 시쓰기가 지니는 또다른 개성은 그의 시가 이야기를 억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시인들은 사물의 이미지를 포착하려 하며 그 이면에 놓인 이야기를 은유로 함축한다. 이럴 때 감각주체의 입장이 강화되고 사물의 역사는 억압되게 마련이다. 이와 반대로 박성우는 사물들의 역사를 은유로 추상하기보다 이야기로 풀어놓는다. 주체를 낮추고 사물의 구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지적이 박성우가 특별히 서술시(narrative poem)를 지향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표제시에서처럼 그는 사물간의 병치와 대비, 화자의 다양한 어조와 태도 등을 통하여 시적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이파리 무성한 등나무 아래로

초록 애벌레가 떨어지네

사각사각사각,

제가 걸어야 할 길까지 갉아먹어서

초록길을 뱃속에 넣고 걸어가네

 

초록 애벌레가 맨땅을 걷는 동안

뱃속으로 들어간 초록길이 출렁출렁,

길을 따라가네

먹힌 길이 길을 헤매네

등나무로 오르는 길은 멀기만 하네

 

길을 버린 사내가 길 위에 앉아 있네

–「길」 전문

 

이 시에서 사물 사이의 병치와 대비는 뚜렷하다. 크게 등나무의 초록 애벌레의 길과 그 아래 앉은 사람의 길이 병치되어 대비된다. 전자의 길은 세심하게 서술되고 후자의 길은 은유로 그 함축적 의미가 이해될 수 있어 서술의 불균형이 오히려 시적 긴장을 만들고 그 의미를 확장한다. 또한 애벌레와 사람 사이를 가로지르는 초록길의 존재는 더욱 큰 생명의 길에 대한 함의를 지니게 한다. 이처럼 사물 사이 또는 사물과 사람 사이의 의미연관을 만드는 시적 서술은 시적 의미의 진폭을 크게 한다. 또한 서로 다른 사물들의 이야기를 같은 문맥에 놓음으로써 언어의 구체성을 확보한다. 가령 「민달팽이」에서 ‘민달팽이’의 생태를 포장마차를 빼앗긴 노점상의 실업(失業)에 견주거나 「망둥어」에서 ‘망둥어’의 생태를 ‘정리해고된 박과장’에 비할 때 이들 이야기들은 매우 구체적인 실감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병치에 의한 서술은 개구리밥-‘나’의 생활사(「개구리밥」), 단풍-길손다방 늙은 여자의 삶(「단풍」), 땅콩-지하방 생활(「방」) 등 여러 제재로 변용되면서 시적 효과를 얻고 있다.

 

어둠 돌돌 말아 청한 저 새우잠,

 

누굴 못 잊어 야윈 등만 자꾸 움츠리나

 

욱신거려 견딜 수 없었겠지

오므렸던 그리움의 꼬리 퉁기면

어둠속으로 튀어나가는 물별들,

 

더러는 베개에 떨어져 젖네

–「초승달」 전문

 

이 시에서 초승달을 새우잠에 병치시킨 시적 감각이 놀랍다. 이러한 병치는 기상(奇想)을 얻어 새로움을 더하려는 기교적 노력과 무연하다. 이보다 이것은 존재와 사물에 곡진하게 다가가려는 시인의 태도의 산물이다. 이처럼 박성우는 사물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그는 크고 화려한 이야기에 눌려 있거나 풍문과 이데올로기의 바람에 움츠러든 보잘것없고 작은 이야기들을 들춰낸다. 사물들의 이면에 묻혀 있는 진실들을 발굴하는 그는 매우 성실한 이야기 수집가이다. 또한 매우 진지한, 시의 고고학자이다. 뜻모를 이미지들이 부유하고 허황한 말들이 횡행하는 시대에 그는 가려지고 묻혀 있는 진실을 발굴할 시적 장비들을 보유하고 그 근거지를 마련했다.

 

4. 채호기(蔡好基)의 『수련』에서는 무엇보다 시인의 놀라운 시적 집중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이 시집에서 ‘수련(睡蓮)’이라는 하나의 제재를 두고 동어반복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60편을 상회하는 시적 진술을 감행하고 있다. 물론 사계와 나날의 흐름을 감안하고 이에 따른 수련의 생장 변화나 주변의 물·공기·햇빛 등이 빚는 생명적 관계를 고려하고 이에 접근하는 시적 주체의 다양한 태도를 전제할 때 하나의 제재라고 하나 다각의 변주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탐구가 일정한 시적 성취를 담보하지 못할 때 호사가의 단순한 취향을 반영한 것이라 비판받을 가능성도 많은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면서 왜 이러한 시적 선택을 한 것일까? 다음은 이에 대한 시인의 답변이다.

 

나는 시를 쓰기 시작하던 무렵부터 몸과 언어에 대한 관심을 줄곧 시로 표현해왔는데, 수련은 형태적으로 그런 나의 관심을 촉발시키기에 충분했다. 다시 말하면 뿌리와 줄기를 물속에(보이지 않는 곳에) 감추고 꽃만 물 밖으로(보이는 곳으로) 내미는 수련은 언어를 몸으로 하고 느낌이나 생각을 그 언어로 표현하는 시와 형태적으로 동류의 것으로 내게는 받아들여졌다. 수련이 수중세계의 신비를 알려주는 메신저라면 시는 바로 우리 몸이 부딪치며 겪는 세계를 의미화하여 알려주는 메신저이다. 나는 몸과 정신(혹은 감각과 의식)이 겹쳐지는 접점을 시로 표현할 수 있기를 열망하여왔는데, 수련 연작들을 통해서는 시와 수련(언어와 실물)이 겹쳐지는 접점을 시로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수련』 뒤표지)

 

이러한 시인의 말은 한마디로 시의 본질 탐구를 위한 노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시인은 이를 시와 수련의 형태적 상동성에 착안하여 “시와 수련(언어와 실물)이 겹쳐지는 접점을 시로 포착하려는 노력”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시와 수련의 형태적 상동성은 단순한 비유에 불과하므로 그리 중요한 문제가 되지 못한다. 다만 언어와 실물이 겹쳐지는 접점의 포착 노력이라는 문제는 고래로 항상적인 시적 과제였다. 두보(杜甫)가 “시어가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도 그만두지 않겠다[語不驚人, 雖死不休]”라고 했을 때 그는 시어의 문제를 목숨을 건 작업에 견주었다. 채호기는 『수련』을 통하여 시적 언어에 대한 본질적 탐구를 도모한다. 이래서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이미 시에 관한 시, 메타시를 전제하고 있다.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

사랑의 피부에 미끄러지는 사랑의 말들처럼

 

수련꽃 무더기 사이로

수많은 물고기들의 비늘처럼 요동치는

수없이 미끄러지는 햇빛들

 

어떤 애절한 심정이

저렇듯 반짝이며 미끄러지기만 할까?

 

영원히 만나지 않을 듯

물과 빛은 서로를 섞지 않는데,

푸른 물 위에 수련은 섬광처럼 희다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 전문

 

첫번째로 실려 있는 이 시는 시인의 ‘수련’ 탐구의 조건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사물들 사이의 미끄러짐, 사물과 언어의 미끄러짐이 수련에 의해 해소되고 있다는 문제 설정이다. 이 시에서 시적 의미를 전달하는 기본 의미축은 1연과 4연이다. 2연과 3연은 1연의 의미를 부연하고 있을 뿐이다. 우선 1연은 두 가지 의미연관성을 말한다. 그 하나는 수면과 빛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의 피부와 사랑의 말의 관계이다. 1연은 이러한 두 가지 의미관계, 수면/빛, 피부/말의 대립쌍들이 미끄러짐의 관계에 있음을 말한다. 4연은 이러한 대립쌍들의 미끄러짐의 관계가 수련에 의해 해소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래서 이 시는 앞서 시인이 말한 대로 “언어와 실물이 겹쳐지는 접점”을 ‘수련’을 통해 찾고자 하는 시적 의도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의도에 따라 시집에 실린 시들은 ‘수련’이라는 사물에 가닿으려는 언어의 모험을 거듭한다. 이러한 모험은 물과 수련, 빛과 수련, 주변 사물과 수련이 서로 미끄러짐 없는 관계로 기술되기를 갈망한다. 이러한 갈망은 “운율의 꽃과 리듬의 풀,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 움직이는 공기, 글자와 글자들이 부딪쳐 내는 빛…… 글자의 소리들이 흐르는 물로 생긴 연못”(「모네의 수련 2」)을 그리려는 시적 지향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모네의 수련과 같은 사물시는 가능하지 않다. 거듭되는 언어회의는 시적 완전주의(poetic perfectionism)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손끝에 만져지는 언어”(「물에로의 끌림」)나 “물결 없는 종이 위에 피어 있는 글자”(「글자」)는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시인은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독자에게 다음처럼 말한다. “당신이 관람객으로 왔다면 이 종이 위를 떠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느낌, 날아가버리는 향기, 어렴풋한 감촉들, 감춰져 있는 불씨들, 그리움의 이미지, 꿈들. 수련으로 인한 그러한 것들. 떨쳐버릴 수 없는 그러한 것들이 당신과 함께 한다면, 당신도 수련의 많은 조각들처럼 이 종이 위에 남아 있을 것이다.”(「수련을 위한 몇몇 말들의 설치」) 그러나 이러한 호소로써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시적 지향을 대신할 수는 없다.

“저 흰 수련이 종이 위에서 필 수 있을까?”(「물과 종이」) 이에 대한 답은 시인 스스로 만들고 있다. “너무나 분명해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수련, 너를 백지 위에 옮기려면/너를 죽여야만 한다.”(「수련」) 그렇다면 시인은 도로(徒勞)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수련을 매개로 사물에 닿으려는 시적 방법에 대한 탐구의 과정만 남는다. 시집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8월」은 탐구과정의 성실성에 상응하지 못하는 허탈감마저 던져주고 있다.

 

8월의 정오

수련이 그 하얀 입술을 벌렸을 때

나비가 날아올랐다.

 

기차가 빠르게 쏟아져 나오는 터널 입구처럼

수련이 애타게 소리쳤지만

아무도 수련의 말을 듣지 못했다.

 

천천히 나비가 날아오르고

한순간, 심장은 멎고 영상은 고정되었다.

엔딩 타이들이 흐르는 가운데

그 절규하는 하얀 수련,

 

나비를 놓쳐버린 그 하얀 손이

8월의 정오가 남긴 마지막 장면이었다.

–「8월」 전문

 

만일 편집의 의도를 따라 이 시를 『수련』이 진행한 탐구의 결론으로 삼는다면, 이것이 전하는 메씨지는 허망하다. “아무도 수련의 말을 듣지 못했다”라는 진술에 결국 모든 의미가 모아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채호기는 이 시집을 통하여 시적 탐구의 과정이 지닌 성실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스스로 감동을 전할 수 없는 메타시의 운명을 이 시집 또한 고스란히 떠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