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탈민족주의, 탈근대의 관점에서 본 한국현대사

윤해동 외 엮음 『근대를 다시 읽는다』 1~2, 역사비평사 2006

 

 

유재건 柳在建

부산대 사학과 교수 jkyoo@pusan.ac.kr

 

 

135-294책이 출간되고 처음 언론에 소개되었을 때 눈길을 끈 것은 해방전후사에 대한 ‘제3의 인식’ 혹은 ‘제3의 길’이라는 문구였다. 『동아일보』는 세 관점의 핵심주장을 비교하는 도표를 선보이기도 했는데, 특히 세 관점을 설명하는 용어가 주목을 끌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민족주의·민중주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은 ‘탈민족주의·현실주의’, 『근대를 다시 읽는다』는 ‘탈민족주의·탈근대주의’. 이런 규정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표방하는 이 책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현대사에 관한 관점들의 지형을 그런대로 잘 나타내주는 것이다. 요컨대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민족주의 민중사관은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민족주의에, 대안으로 나선 『재인식』은 대한민국 국가주의에, 그리고 양자 모두 근대주의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곧 『재인식』과 『근대를 다시 읽는다』를 요약한 용어에 대해서 두가지 의문이 생겨났다. 하나는 과연 탈민족주의가 현실주의적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특히 분단국가의 독자적 발전을 높이 평가하고 민족담론 자체를 백안시하는 『재인식』의 기묘한 탈민족주의는 이상이 너무 커서가 아니라 이미 전개되고 있는 현실의 과정을 볼 때 비현실적인 것은 아닌가? 또 하나는 『근대를 다시 읽는다』의 탈민족주의가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탈근대 혹은 근대극복에 실질적으로 크게 기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탈민족주의는 현실주의적이지도 않고 탈근대에도 크게 기여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계속 들었고, 그래서 이 책의 전체적인 관점에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이 책의 수록논문들은 저마다 참신하고 지적 자극을 주는 훌륭한 글들로서, 배우는 바가 많았다. 모두 두권에 논문 28편, 무려 1250면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인데, 일관된 논점은 한국현대사를 민족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에 가둔 채 도덕적인 이분법으로 구체적 실상을 단순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고, 깊이 공감이 갔다. 논문 필자들은 약간의 편차를 보이기는 하지만 민족을 주체로 한 거대담론이 아니라 인간의 복잡한 양상에 섬세하게 다가갈 것을 요구하면서 현실의 ‘복합적·중층적 관계’를 강조하는 점에서 일치한다. 가령 우리에게 낯익은 ‘친일’이란 용어를 ‘협력’이란 용어로 바꿀 것을 제안하는데, ‘친일’ 개념 자체가 민족주의 감정에 기반을 두고 있어 당대 사람들의 저항과 협력 사이에 있는 일상적 ‘회색지대’의 복합성을 간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권 46면). 그래서 여러 논문들이 민족단위로 환원되지 않는 다수 대중의 실제 ‘일상’과 ‘경험’을 자상하게 그려내고자 한다.

거시적 세계와 일상적 경험세계를 연결시키고자 하는 노력도 엿보였는데, 이따가끼 류우따(板垣龍太)의 「식민지의 우울」은 이 점에서 자각적인 편이고 꽤 흥미로웠다. 그는 1930년대 경상도 상주의 한 농촌청년의 일기를 통해 ‘일상’과 “‘평범함’ 가운데 스며 나오는 ‘근대’‘식민지’를 부상시키는 작업을 함으로써 ‘일상생활’이 어떻게 해서 보다 큰 역사에 대해 열려졌던가를 구체적인 수준에서 확인”하고 있다(1권 127면). “‘경험된 식민지’를 생각할 때 바로 떠오르는 근심은 그것이 거시적인 모순과 대립을 모호하게 한다든지 덮어 가린다든지 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라 하면서 “오히려 모순을 다른 방향에서 조명하는 방식으로”(1권 126면) 일상세계를 추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일기의 주인공이 이런저런 정체성 고민을 하고 있지만 일제시대에 태어났음에도 ‘일본’의 범주에 ‘조선’을 포함시키고 거기에 ‘내지(內地)’를 대치시키는 당시 국가적 개념조작에 순치되지 않았다는 견해도 제시한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현실을 ‘복합적·중층적 관계’로 본다는 문제의식하에 낯익은 이분법적 개념구도를 해체해 새로운 성찰을 유도하는 논리였다. 특히 1권 전체에 걸쳐 한국현대사에서 지배와 저항, 민족과 반민족, 민주와 독재, 민주화세력과 산업화세력, 좌파와 우파, 식민시대와 해방이후 시대 등 온갖 이분법적 구분에 근원적인 회의가 제기되고 있는데, 도발적인 문제제기와 과감한 주장이 돋보였다. 이런 여러 대립항들이 종종 ‘동일한 지평’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 바로 여기서 기존 민족·민중사학과의 대치점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필자들은 해방후 국가건설이 식민지배질서의 토대 위에서 가능했기 때문에 식민과 탈식민을 관통하는 국민국가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특히 ‘대중의 경험’ 차원에서 해방공간은 식민질서의 연장 내지는 변형의 시공간이었을 뿐이고 국가의 지배체제는 연속적인 것이었다(김영미 「해방직후 정회를 통해 본 도시 기층사회의 변화」). 대한민국과 북조선의 국민국가 형성이 식민유산과 연결되어 있고 국민 동원체제를 이어받고 있듯이, 좌파와 우파 역시 동일한 한계를 갖고 있다. 그렇다고 이것을 식민잔재라 하기도 어려운 것은 이를 식민지 이전 대한제국에서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고 따라서 근대가 갖는 억압성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오성철 「조회의 내력: 학교규율과 내셔널리즘」). 또한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민주화세력과 산업화세력 모두 개발주의적 근대주의 논리 아래 하층대중을 억압, 포섭하는 데 일조했고, 지금 우리 사회도 박정희체제의 지속일 뿐이다(황병주 「박정희체제의 지배담론과 대중의 국민화」).

상식적으로 대립된다고 생각한 것들을 ‘동일한 지평’에 놓는 기준은 근대화와 국가형성의 억압성일 것이다. 근대가 목표가 아니라 극복대상이기에, 근대화와 국민국가 발전이라는 틀에 묶여 있는 것들은 같은 지평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대중의 국민화’ 과정에서 공식역사가 지워버린 ‘하위주체’(subaltern)의 기억을 복원해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근대화에 내재한 폭력성에 대한 우리들의 감수성을 일깨우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것이 바로 필자들이 경계해온 단순화와 동일화의 횡포는 아닐까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이 책의 관점은 근본적·급진적(radical)이다. ‘머리말’에서 윤해동(尹海東)은 “국가와 시장의 폭력에 의해 지배되는 근대적 삶에 대한 성찰”(1권 16면)이 필요하며 “근대국가는 자본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이기에 “시장을 적군으로 국가를 우군으로” 보는 것은 환상이라고 말한다(1권 25면). 또 “식민지는 근대 세계체제의 가장 중요한 축이었으며, ‘근대’의 고유하고 중요한 현상의 일부”였다고 본다(1권 20면). 어찌 보면 맑스주의와 세계체제론이 연상되기도 하는 발언들이다. 그렇다면 탈근대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국가와 시장 혹은 민족과 계급이 세계사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자고 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필자들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 오히려 국가·민족·계급을 통한 역사인식을 전형적인 근대주의 역사관으로 생각한다. 왜 이렇게 서로 생각의 방향이 다른 것일까?

내 생각엔 필자들이 현실의 복합적·중층적 관계를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막상 ‘국민국가’와 ‘계급’이 자리하는 복합적·중층적 구조만큼은 시야에 두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근대의 사회적 적대와 갈등의 문제가 국민국가를 매개로 ‘상상의 공동체’를 통해 해소되어버렸다는 진술(황병주, 1권 269면)도 아주 급진적이긴 하지만, 그래서 국가는 비판대상일 뿐 더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국민국가가 위치한 복합적·중층적 관계를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레 근대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형성과 작동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 책 전체에서 세계자본주의는 어렴풋한 배경막으로 존재할 뿐, 국민국가 자체를 규정하면서 특정한 추동력을 발휘하는 구체적 작동기제로는 파악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필자들이 강조하듯 근대를 세계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탈근대 역시 한국이나 한반도 단위가 아니라 세계사적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 자체를 근대의 핵심 문제로 설정하고 극복대상으로 보기보다는, 민족주의와 국민국가에 대해 세계사의 맥락에서 좀더 해체주의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세계사의 탈근대에 어떤 민족적 과제의 수행이 도움이 될지, 혹은 어떤 폐해를 가져올지 그때그때 지혜롭게 돌아볼 일이지 그것을 무슨 실체처럼 볼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산업화를 예로 들더라도, 거기에 내재한 폭력성과 억압성을 세심하게 성찰함과 동시에 대한민국이 이만큼 진보함으로써 세계사적 탈근대에도 좀더 기여할 수 있는 위치에 다가갔다고 할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다. 가난한 독재국으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세계사에의 기여가 가능해진 점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간 탈민족, 탈근대주의에 대해서는 아직 근대적 과제가 끝나지 않았다든가 민족의 깃발을 내릴 때가 아니라는 반론이 있어왔다. 이런 반론은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이 시대에 나름의 설득력을 갖고 있지만, 상대방에 의해 으레 근대주의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했고 거기엔 그럴 만한 소지도 있었다. 내가 갖는 의문은 좀 다른데, 탈민족주의야말로 오히려 세계사적 탈근대에 기여할 지역적·민족적 과제를 외면하다가 진정한 탈근대에 무기력할 우려는 없는가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