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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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배 申榮培

1972년 충남 태안 출생. 2001년 『포에지』로 등단. 시집 『기억이동장치』가 있음. namoo1029@hanmail.net

 

 

 

비누가 닳다

 

 

소리없는 그가 뒤에 와 있을라치면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바지주머니 속에는 늘 조각칼이 들어 있었지 그가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보는 구멍 속을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았네 그는 없다가도 뒤에 있고 있다가도 거기 없는 조용한 걸음의 여자였어

 

조각가 K는 우선 거대한 비누를 만들었지 자신과 똑같은 모양과 크기로 그 비누를 조각했어 작품 K—B107은 욕실에 세워졌네 벗은 여자가 향기로워라

 

그녀는 어디부터 닳았을까?

 

그는 매일 손에 물을 발라 그녀를 만졌다 살굿빛 거품들이 피어났다 포옹은 미끄러워 유방이 물고기처럼 두 사람 사이를 빠져나갔다 수천억개의 거품 속에 수천억개의 포옹이 맺혔다 키스는 짧고 그가 수천억개의 거품을 입에 물고 쓰러졌다 타일이 경련을 일으켰다 동그란 거품 속에 네모난 창이 틀어박히고 소녀가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자살이 수천억번 재현되었다 거품들이 한순간 물에 씻겨 수챗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몸이 닳았다

 

오늘의 거품은 어제의 거품보다 소규모다 오늘의 작품은 어제의 작품보다 닳아 있다

 

비가 무섭게 내렸어 욕실의 천장을 뚫고 빗줄기는 검은 수챗구멍을 향해 달렸지 거품들을 데려갔지 사람들은 K의 바지주머니 밖으로 삐져나온 조각칼을 조심조심 피했다네 그들과 K 사이에는 비가 굵어졌어 빗줄기만으로 그는 간단히 가려졌지 녹아내렸지

 

그가 욕실문을 열었다 오늘의 작품은

 

살구비누만한 종양

 

 

 

상상임신

 

 

시큼한 과일이 먹고 싶어요 월경도 없이 흰 날짜들이 페이지로 넘어가요 검은 글자들에 코를 대면 헛구역질이 나요 어머, 사내들과의 날짜를 세어보아요 입덧이에요 달빛을 쬐어요 당신의 머리맡에 누워 배를 스스스스 문지르면 달의 출렁거림 초음파사진을 좀 보아요 머리와 꼬리 푸른 심장 둥근 달 속에 물고기가 자라고 있어요 내 배를 만져보아요 태동이 느껴지죠 당신은 나를 펼쳐 얼굴을 묻고 잠이 들었어요 점점 부풀어오르는 내 가슴으로 당신을 감싸요 눈물을 감싸요 나는 당신의 책이에요 당신은 없던 자궁이 생기고 그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