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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코맥 매카시 『로드』, 문학동네 2008

길, 혹은 어떤 사랑에 관하여

 

 

정은귀 鄭恩龜

인하대 영문과 교수 echung@inha.ac.kr

 

 

촌평_로드현대문명에 대한 묵시록적 비전이나 대재앙을 그린 작품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폐허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이 지구를 지키기 위해 싸워나가는 과정을 선악의 축으로 보여주는 식상한 이야기들이 많은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급변하는 세상에서‘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취향 탓도 크지 싶다. 그래 그런지 시절이 유난히 하수상한 올가을, 시대의 풍경이 크게 바뀌어 우리 삶을 받쳐주던 뿌리들이 어이없이 뽑혀나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위기의식 가운데 만난 작품,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의 『로드』(The Road, 정영목 옮김)에 그리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윌리엄 포크너, 허먼 멜빌,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비견되는 작가,‘성서’에 비견되는 소설, 2007년 퓰리처상 수상작 등 책장을 열기도 전에 압박해오는 찬사에도 나는 그저 “어디 한번 볼까?” 하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책장을 덮고 난 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어떤 감동으로 압도되었는데, 그 감동을 글로 갈무리하는 시간도 여느 작품보다 좀 길었던 듯하다.

깜깜한 숲에서 잠을 깬 남자가 자기 곁에서 자는 아이를 더듬어 숨소리를 애틋하게 확인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대재앙이 휩쓸고 간 폐허의 땅 미국을 배경으로 실로 단순한 이야기 구조에 따라 진행된다. 등장인물도 많지 않다. 모두 죽음 너머로 사라졌으니까. 메마른 잿더미의 세계를 무작정 걷는 두 사람, 한 남자와 그의 어린 아들. 세계는 이미 생명의 흔적을 모조리 거두어간 무채색의 땅, 어디에도 희망은 없다. “모든 것이 자신의 버팀목에서 떨어져나온 상태”(16면)인 폐허의 공간은 그래서 무지막지한 공포 그 자체다. 장편소설에 대개 있기 마련인 장(章) 구성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덩어리로 이어지는 이 소설은, 두 사람이 걷는 길 위의 여러 풍경들, 죽음과 부패, 위험과 불안이 시적인 짧은 문장으로 나열되어 있다. 간간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남자와 아이의 대화가 삽입되어 있는데, 절망 너머의 상황에 대한 건조한 묘사와 서로의 존재에서 생을 버티는 법을 안간힘으로 익히는 이들의 간결한 대화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이 책에는 “환경론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라든가 “미국 패권주의에 대한 반성” 등 여러 수식어가 따라다니지만, 나는 이 책을 우리 살아가는 한생, 길, 혹은 사랑에 대한 가장 정직하고 지난한 보고서라 하고 싶다. 남자와 아들이 지나가는 도시와 강, 숲은 어떤 구체적인 지명을 가진 공간으로서 의미를 갖기보다는 모든 것이 파괴되고 소멸된, 어떠한 희망도 사라진 디스토피아일 뿐이다. 만물의 덧없음이 드러난 땅, 수의 같은 옷을 입고 거리를 배회하던 난민들마저 모두 죽고 사라진 그 공간은 그러므로 미국이면서 동시에 이 세상 전체이다. 세계 곳곳에서 꿈을 찾아 떠나온 사람들로, 지상에서 가장 이상적인‘신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열망으로 가득했던 땅, 시인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은 그 땅의‘열린 길’에서 세계시민이 어깨를 나란히하고 부르는 평등의 노래, 자유의 노래를 시로 만들었고 그 노래는‘미국의 꿈’이 되었다. 하지만 그‘열린 길’에서의 합창은 사라졌다. “열(熱)의 나라에 이주한 사람들처럼 비틀거리며 인도를 걷는 신념 없는 껍데기 같은 사람들”(35면), 아니 그런 사람들마저 사라지고 좀비들만 남은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휘트먼의‘열린 길’위의 노래가 미국의 꿈이었으되 다만 미국만의 꿈은 아니었듯이, 매카시가 그리는 문명의 마지막 행로 또한 미국이면서 동시에 또‘지금 여기’의 공간이라는 보편적·세계사적 의미를 포착할 수 있을 것 같다.

기댈 것 하나 없는 메마른 잿빛의 세계에서 소년은 “남자와 죽음 사이의 모든 것”(36면)이다. 소설을 휘감고 있는 완벽한 절망의 풍경에서 독자로 하여금 진저리치며 책을 놓지 않게 하는 힘은 대체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작가의 도저한 현실인식과 이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한겹씩 드러나는 생의 비의가 아닐까 한다. “있지도 않았던 세계나 오지도 않을 세계의 꿈을 꿔서 네가 다시 행복해진다면 그건 네가 포기했다는 뜻이야”(215면)라는 말의 무게. 그건 아마 우리 시대에 하릴없이 반복되는 서로 속이고 속아온 삶의 방식, 즉 싸구려 희망을 손쉽게 꿈꾸는 방식에 대한 엄중한 경고인지도 모른다. 이들이 걸어가는 길 위의 스산한 풍경이‘열린 길’의 끝자락, 현대문명이 가닿은 어떤 지점에 대한 가장 정직한 보고서라고 한다면, 이 끝자락을 버텨내는 힘 또한 그 현실을, 현실의 불안과 부패를, 있는 그대로 응시하면서 걸어나가는 정직함에 있다는 것이다.

소설이 골짜기 냇물에 살던 송어 이야기로 끝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힘차게 헤엄치는 송어의 등에는 “생성되어가는 세계의 지도”가 새겨져 있고 “송어가 사는 깊은 골짜기에는 모든 것이 인간보다 오래되었으며, 그들은 콧노래로 신비를 흥얼거렸다.”(323면) 이 기묘한 풍경을 마주하며 책장을 덮는 독자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평온해진다.

이처럼 끈질기게 독자를 죽음 혹은 소멸과 대면시키는 책도 또 없을 것 같고, 이처럼 이상한 방식으로 독자를 위무하는 책도 만나기 힘들 것 같다. 송어가 헤엄치던 골짜기를 떠올려보면 어쩌면 인간이 없어도 괜찮을 것 같고, 우리 생을 휘감는 불안을 견디는 방식은 오늘도 어제와 같은 발걸음으로 그저 묵묵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임을 알게 된다. 그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이미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죽느냐 사느냐” 결단을 내릴 단계는 이미 지나온 생. 그저 길 위의 묵묵한 잠과 이야기만이 이 생을 버티게 해주는 유일한 위안일 터. “지금까지 해본 가장 용감한 일이 뭐예요?”라는 아이의 질문에 남자는 대답한다. “오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거”(307면)라고.

“자신이 신이라면 세상을 바로 이렇게 만들었지 절대 다르게는 만들지 않았을 것”(249면)이라고 말하는 남자는 지독한 현실주의자인 작가를 대변한다. 허상이 조금도 깃들지 않은 이처럼 맵디매운 현실인식이 벼랑 끝의 존재들에게 현실을 안간힘으로 긍정하는 힘을 주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 힘이 바로 길이요 사랑은 아닌지. 단순히 부자간의 사랑이 아니라 존재의 원형, 생을 버티게 하는 힘으로서의 사랑 말이다. 이 강렬한 비가(悲歌)에서 소름 끼치는 두려움을 달래는 알 수 없는 위안을 받은 이유는 바로 이 묘한 연결고리 때문일 것이다.

영어 원작을 먼저 읽고 번역본을 나중에 읽은 평자에게는 원문의 특징들을 맞춤하게 잘 살린 한글판 『로드』의 미덕 또한 눈에 들어왔다. 원작 자체가 간결한 문체이긴 하나 우리말로 옮기기 까탈스러운 문장도 적지 않은데, 서로 호흡이 다른 두 언어 사이를 오가며 그 호흡들을 적절히 끊고 이어가면서 역자는 한국어의 옷을 잘 입혀놓았다. 제목을‘로드’가 아니라‘길’이라고 했다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을 얼핏 했지만 그것도 글쎄,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