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논단과 현장 | 사회인문학 연속기획 ①

 

전통적 인문 개념과 문심혜두(文心慧竇)

정약용의 공부법

 

 

임형택 林熒澤

성균관대 명예교수. 저서로 『실사구시의 한국학』 『한국문학사의 논리와 체계』 『문명의식과 실학』 등이 있음. lim1767@skku.edu

 

 

우리 역사에 학문저술로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공부법은 어땠을까? 물음 자체가 흥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지만 21세기로 넘어와 10년을 경과한 지금 특히나 제기해볼 필요가 있는 주제로 생각된다.

요즘 인문교양을 강조하고 인문학의 부활을 외치는 소리가 학계의 범위를 넘어서 사회적 관심사로 떠올라 있다. 영국의 저명한 문학비평가 테리 이글턴(T. Eagleton)이 인문학의 위기와 관련한 질문을 받고 “자본주의가 발전된 사회에서 인문학의 위기를 해결할 출구는 없다”(교수신문 2010.9.13)고 답한 인터뷰 기사를 최근에 읽었다. 이글턴의 이 진단은 정곡을 찌른 것으로 보인다. 인문학은 서구주도의 근대, 자본주의체제하에서 주변화되었고 더욱이 시장만능의 자유주의 행보로 인해 폐기될 위기에 놓인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인문학으로 쏠린 관심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당초 인문학 분과에 속하는 당사자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호소하자 사회적으로 큰 반향이 일었다. 하지만 이런 현상적 사실로 그 원인이 설명되지는 못한다. 인문학의 위기의식이 인류적 문제로 느껴져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한바, 이는 요컨대 ‘문명적 전환’의 시대를 반영한 정신현상이다. 그렇게 보면 인문학의 존망은 실로 문명사적 과제와 직결된다고 하겠다.

지금 우리가 다시 찾는 인문학이란 과연 어떤 인문학일까? ‘두개의 문화’(two cultures)의 하나, 즉 과학과 인문학으로 분리된 상태의 인문학을 뜻하는가. 월러스틴(I. Wallerstein)은 “과학과 인문학 간의 인식론적 차이를 확고히함으로써, 보편적 진리는 인문학자가 아니라 과학자가 제시한 것”1)이 근대 지식구조의 특징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과학이 되지 못하는 인문학은 학문으로서 자격미달인 셈인데 이런 인문학의 위상을 그대로 감수할 것인가. ‘문명적 전환’이라면 서구주도의 자본주의적 근대로부터 획기적인 방향 전환을 의미할 터다. 21세기에 새로 불러일으키는 인문학이라면 학문의 중심적·주도적 지위를 자연과학에 넘겨주고 사회과학에도 밀려난 처지로 존속하는 식이어서는 큰 의의를 갖지 못한다. 그렇다면 르네쌍스 시대의 고전적 인문주의로 복귀하자는 뜻인가. 인문학과 과학이 분리되기 이전으로 인문정신 회복이 기대된다. 하지만 역사의 시간을 되돌리기는 불가능하겠거니와, 유럽적 보편주의의 극복이라는 주요 과제가 간과되기 마련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은 동서고금을 회통한 ‘제2 르네쌍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나는 ‘전통적인 인문 개념과 문심혜두(文心慧竇)’라는 제목을 잡아보았다. 동양 전래의 인문 개념은 다산의 공부법이 나온 곳이기도 하다. 이 인문 개념은 서구주도의 근대세계로 편입되면서 동아시아 전통체제와 함께 실종된 것이다. 다산의 공부법 역시 현실적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 ‘역사의 미아’를 굳이 찾는 뜻은 서구문명의 대립항으로서, 혹은 그 대안으로서 동양문명과 전통적 인문학을 불러오겠다는 것이 아니다. 사고의 발본적 전환으로 인문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고민해보자는 취지다. 학문이란 어디까지나 자료를 읽고 머리로 사고해서 글로 엮어내는 작업인데, 거기엔 주체의 창의적 활력이 필수요소다. 다산의 공부법이 이 고뇌에 찬 작업의 실천에 참조되기를 희망한다.

 

 

1. 동양 전래의 문명과 인문의 개념

 

아득한 옛날 중국에서 성립하여 동아시아의 한자문명권에 보편적으로 통용된 문명(文明)이란 술어는 인문(人文)이라는 말과도 상통하는 개념이었다.

본디 문명은 개념의 중심이 문(文)에 있었다. ‘문’이 본체이고 ‘명(明)’은 그 발현태에 해당하는 셈이다. 즉 태양의 광채가 지상을 밝게 비추듯 세상이 개명해지는 형국이다. 문이 고도로 실현된 상태, 그것이 다름아닌 문명이다. 따라서 중국적 문명의 특성은 ‘문의 문명’이라고 말해도 좋다. 문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인문이라는 개념과도 직접 관련되는 물음이다.

(文)이라는 한 글자가 포괄하는 범위는 천지와 만물·만사에 걸쳐 더없이 넓고 의미 또한 중층적이다. 얼른 떠오르는 뜻이라면 문자, 즉 한자가 잡히고 이는 글 혹은 문학으로 연계된다. 문은 원래 사물이 어울린 모습이나 무늬, 결을 지칭했다. 그래서 아름다운 상태를 문채(文采)라 이른다. 천연으로 조화를 이뤄 아름다운 문도 있고 인공이 가해져서 아름답게 된 문도 있다. 후자는 질(質, 바탕)의 반대말로 문식(文飾, 꾸밈)이라 한다. 질과 문이 적절히 어울린 상태를 미학적 이상으로 여겨서 그것을 문장(文章)이라고 일컬었다.

이와는 차원을 달리해서, 문은 예악제도(禮樂制度)를 뜻하기도 했다. 『논어』에서 공자가 “문왕(文王)이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으니 문(文)은 여기에 있지 않는 것이냐”라고 말한 대목에, 주희는 “도(道)가 표현된 상태를 일러 문이라 하는데 대개 예악제도를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풀이했다.2) 이 풀이에서 도와 문의 관계도 뚜렷이 드러난다. 도와 문은 둘이면서 하나다. 그런데 예악제도가 목적하는 바는 경세(經世), 즉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다. 경세를 우주적 차원으로 연계시키면 경위천지(經緯天地)라는 말이 된다. 천하의 질서를 세운다는 경위천지는 문의 의미 중 최상급에 위치한 것이다. 예로부터 공자를 칭송할 때 문이란 글자를 사용했던 바 바로 이 뜻이다.

이렇듯 문의 의미망은 글자 하나하나를 가리키는 데서부터 우주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실로 중층적인데다 딱히 경계를 구분짓기도 모호하다. 그 다층구조는 분리된 것이 아니고 상통·상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문명과 관련해서 문제의 인문이란 개념이 도입된 경위를 살펴보자.

인문의 가장 이른 용례는 『주역』의 비괘(賁卦, )에 보인다. “文明以止, 人文也”가 그것이다. 비괘는 그 괘상(卦象) 자체가 불〔〕이 산〔〕 아래 있는 형국이어서 『주역』 64괘 중에 문명과 결부된 것이라 한다. 불은 문명을 표상하는바 그 불이 산 아래 그쳐 펼쳐지니 곧 인문이라고 이 구절은 해석된다. 인문에 대응되는 개념이 천문(天文)과 지문(地文)이다. 천상에 빛나는 태양을 비롯해 달과 별들의 찬란한 형상이 천문이고, 지상에 수놓인 산천과 초목이며 금수의 형형색색으로 어울린 형상이 지문이다. 천문, 지문, 인문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문’은 사물의 어울린 모습이나 무늬를 가리킨다. 천문과 지문의 경우 그야말로 천지자연의 현상을 뜻하지만 인문은 인간의 작위(作爲), 즉 인공이 가해진 문이다. 인문을 천문·지문과 일단 구분하면서도 관련짓고 있다. 그래서 앞서 지적했듯 문과 질이 조화롭게 어울린 상태를 최상의 경지로 생각했던 것이다.

 

“천문을 관찰해서 사시의 변화를 살피고 인문을 관찰해서 천하를 화성(化成)한다.(觀乎天文, 以察時變, 觀乎人文, 化成天下)(『주역 비괘)

 

비괘의 “문명이 그쳐 있으니 인문이라”고 한 그 구절에 바로 이어지는 말이다. 천문을 관찰하고 인문을 관찰하는 주체는 성인일 터다. 아득한 옛날 복희씨(伏羲氏)가 위로 천상(天象, 天文)을, 아래로 지법(地法, 地文)을 살피고 본떠서 팔괘를 그렸다고 한 경우다. 『문심조룡(文心雕龍)』은 이 일을 인문의 첫 출발로 인정했다.3) 인문의 목적인 천하를 교화하고 양성한다는 ‘화성천하(化成天下)’는 ‘경위천지’와 통한다. ‘문명화’를 뜻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는 천··인을 하나로, 통합적으로 사고하는 삼재(三才)의 논리구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인문은 미학적 개념이면서 정치적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인문이란 ‘인간의 문명’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겠으니 결국 문명과 일치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천문은 빛나는 태양과 반짝이는 별들에서 그 구체적인 형상을 눈으로 살펴볼 수 있겠지만 인문은 대체 무엇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것일까? 옛사람들은 대개 시서예악(詩書禮樂)을 인문의 정수로 생각했다. 시서예악은 성인의 정신이 담긴 것이므로 도이며, 그 표현형식이 문, 다름아닌 인문이다. 이는 ‘도본문말(道本文末)’이라는 논리구조다. 이것을 도가 근본이고 문은 부수적이라고 간주하기 쉬우나, 양자는 경중으로 따질 관계가 아니다.

여기서 다시 ‘문장’이란 개념을 거론하기로 한다. 인문의 미학적 이상형을 일러 문장이라 칭했음을 앞서 언급했다. 『문심조룡』에서는 요순(堯舜)을 찬미하여 “당우(唐虞)의 문장은 비로소 거룩하게 빛났다(唐虞文章 煥乎始盛)”고 말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복희씨에서 발원한 인문이 요순의 단계로 와서 크게 열렸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구절에서 문장은 종래 삼분(三墳) 오전(典)을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했다.4) 이때 문장이란 고전, 즉 경전을 의미한다. 문명-인문의 문은 어원적으로 글 혹은 글자를 뜻한 것이 아니지만 결국 글로 돌아온 셈이다. “도는 성인을 따라 문을 드리우고 성인은 문을 가지고 도를 밝힌다(道沿聖以垂文 聖因文以明道)”고 『문심조룡』은 천명한 것이다. 『문심조룡』이 「원도」편을 첫머리에 놓은 데는 깊은 뜻이 있다. 문학 내지 글쓰기는 근본을 도에 두어야 한다는 논법이다. 다시 『문심조룡』의 한구절을 인용해본다.

 

“心生而立言, 立言而文明.”(원도)

 

인간주체의 내면에 문심(文心)이 발동해서 ‘입언(立言)’을 하며, 입언을 해서 천하에 문명을 이룬다. 대략 이같이 해석되는 내용이다. 천지와 더불어 삼재(三才)의 하나로 참여한 인간은 만물 가운데 가장 빼어난 존재이기에 인간의 마음은 곧 천지의 마음이라고 여긴 것이다. ‘문심조룡’이라고 책이름에 올라 있듯, 문심은 글을 창작하기 위해 운동하는 마음이다. 인문 창조에 다름아니다.

이상에서 정리한 ‘문명(인문)→문심’의 도식은 다시금 ‘문심→문명(인문)’으로 확장되는 담론구조로 그려볼 수 있겠다. 과거의 문명을 학체득해서 미래의 문명을 창조한다는 뜻의 말이 계왕개래(繼往開來)인데, 이 계왕개래의 연결고리에 해당하는 개념이 다름아닌 문심이다.

 

 

2. 한국 전통사회 지식층의 문명의식과 정약용

 

중국에 이웃한 한반도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중국에서 발원한 문명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아왔다. 그래서 알려진 바와 같이 한자문명권에 속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분명히해둘 점이 있다. 중국적 문명이 한반도에 이입(移入)되어 정착하고 발전한 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아니면 약자가 강자에게 눌리듯 피동적으로 이뤄진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 주변의 동서남북으로 광막한 지역 가운데서 동방의 한반도와 일본열도, 그리고 동남방의 베트남에 한정해서 한자문명권이 형성된 현상을 보면 쉽게 확인되는 사실이다. 요컨대 그것은 수용자 측의 능동적인 자세와 창조적인 노력의 결과다.

중국이나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지식인이라면 사대부, 즉 문인관료층이다. 사대부라면 정신적 기초로 고전을 학습했고 문학은 그네들의 필수교양이었다. 이들은 속성상 문명의식을 소유하는 것이 당위였으며, 문명의식은 역사발전과 문화창조의 원동력이었다고 말해도 좋다.

한국 실학을 집대성했다고 손꼽히는 정약용에게 입력돼 있던 문명의식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이에 앞서 성호 이익(李瀷)의 문명관을 거론해본다. 성호는 학계에서 공인하다시피 반계 유형원(柳馨遠)을 이어 한국 실학을 확립한 존재이며, 다산은 성호학의 적통이다. 그의 주저 『성호사설(星湖僿)에 「동방인문(東方人文)」이라는 글이 있다. 제목이 의미하듯이, 짧지만 한국문명사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단군의 세상은 아직 홍몽(鴻)하여 미개한 상태였다. 천여년을 경과해서 기자(箕子)가 동토에 봉(封)을 받음에 이르러 비로소 파천황(破天荒)이 되었다. 그러나 한강 이남으로는 미치지 못했다. 다시 9백여년을 경과해 삼한에 이르러 지기(地紀, 지상의 질인용자. 이하 같음)가 열리고 이어 삼국의 영역으로 되었다. 또다시 천여년을 경과해 성조(聖朝, 자기가 속한 왕조를 지칭하는 말)가 개국함으로 해서 인문이 비로소 천명되었다. 중엽 이후로 퇴계(退溪)는 소백산 아래서 태어나고 남명(南冥)은 두류산(頭流山, 지리산) 동쪽에서 태어났으니 모두 영남지역이다. 〔경상도의〕 상도는 인(仁)을 숭상하고 하도는 의(義)를 위주로 해서 유화(儒化)가 바다처럼 펼쳐지고 기절(氣節)이 산처럼 높았다. 이에 문명의 지극한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자국의 4천년 역사를 요약하고 있다. 인문-문명을 주요개념으로 직접 쓰고 있듯 ‘홍몽’이니 ‘파천황’이니 하는 말도 문명론적인 어휘다. 그래서 이 글을 한국문명사의 골격을 잡은 내용이라고 본 것이다. 단군조선→기자조선→삼한→삼국→고려→조선으로 계통을 세웠는데 조선조에 이르러 인문이 활짝 열렸다고 한다. 성호 자신이 속한 왕조이기 때문에 미화한 것이라기보다 유가적인 문명관을 취하는 경우 당연한 결론이라 하겠다. 고려를 대체한 조선은 사대부국가로서 ‘문명의식과 동인(東人)의식의 혼성형식’으로 출범했던 것이다.

그런데 성호는 이 왕조의 중엽에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이 나옴으로써 동방의 인문이 드디어 정상에 오른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문명론적 한국사 인식의 체계는 동양의 보편적인 문명의식에 기초하면서 성호 특유의 입장으로 구도를 잡은 것이다. 문명사의 정점에 영남의 퇴계와 남명을 위치시킨 점이 매우 특이하다. 물론 당시 보편적인 문명이라면 유교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으며, 최상급의 유자(儒者)인 퇴계와 남명을 배출한 지역을 ‘문명향’으로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약용은 문명을 어떻게 사고하고 있었는지 본인의 발언을 들어보자.

 

중국은 문명이 습속을 이루어 아무리 먼 시골구석이라도 성인이 되고 현인이 되는 데 방해될 것이 없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해서 서울 도성의 십리만 벗어나도 벌써 홍황세계다. 하물며 먼 시골이야 말할 것 있겠느냐!(「시이아가계(示二兒家誡)」,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시문집 권18)

 

우리의 현실을 중국에 견주어 형편없이 미개한 상태로 치부하고 있다. 성호와 다산은 문명론에서 관점차를 현저히 드러낸 것이다. 성호는 한반도 최상의 문명을 영남 땅에서 발견하는 데 반해 다산은 서울 도성을 벗어난 전역을 싸잡아 ‘홍황세계’(=야만지역)라고 말한다. 성호가 ‘문명의 이상향’으로 동경한 영남 역시 ‘홍황세계’에서 제외하지 않은 것이다.

다산은 성호의 재전제자(再傳弟子, 제자의 제자)이다. 문명관에 있어서 성호와 다산의 사이에는 공통분모와 함께 서로 다른 점도 있다. 공통분모는 유가적 상고주의(尙古主義)다. 저 고대에 성인들이 등장해서 창조한 문명-인문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요, 돌아가야 할 원형으로 사고했다. 원형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복제품을 만들어내자는 뜻이 아닐 터이므로, 길은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성호는 농촌공동체적 사회상을 동경했으며, 따라서 퇴계와 남명을 이상형으로 상정한 것이다. 다산은 예컨대 국가개조의 마스터플랜이라 할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장인영국도(匠人營國圖)’를 제시하고 있는바 이는 수도 서울의 설계도다. 그 자신 『주례(周禮)』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치밀한 기획으로 신도시를 그려낸다.5) 다산은 성호와 달리 발전논리로 사고하여 기획도시에서 문명의 상(像)을 설정한 것이다. 양자는 ‘유가적 상고주의’를 공통분모로 지니고 있음에도 지향점은 이처럼 판이했다.

문명이란 개념 자체가 성인의 사업과 직결해서 성립한 것이었다. 성인이란 요순이나 문왕 같은 고대의 제왕에 해당했던바 그 위대한 승계자로서 성인 공자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들 성인의 존재를 다산은 특이하게 해석하고 있다. “내 보건대 분발흥작(奮發興作)해서 천하의 사람들을 흔들어 일으켜 줄곧 노동하고 역사해서 한시라도 편안히 있지 못하도록 한 것이 요순이었다.”6) 대단히 강렬한 논조다. 그야말로 ‘분발흥작’하여 문명 건설을 향해 일로매진하도록 한 것이 성인의 성인다움이었다는 주장이다. 명색 유교국가로서 4백년을 지내오면서 침체와 고식으로 떨어진 국가체제, 나태와 안일에 빠진 사회분위기를 진작하고 혁신하자는 다산 자신의 염원이 그의 성인관에 투영된 것이다.

다산의 한 세대 선배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지상에 문명을 건설하는 과제를 ‘독서지사(讀書之士)’, 즉 지식인의 일로 자부했다. 다산 또한 “인간된 본분은 범상한 것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우주간의 일은 나 자신의 일이요, 나 자신의 일은 우주간의 일”임을 역설한 바 있다. 자아를 우주적 차원에서 확립하고자 하는 의지로 읽힌다. 일찍이 맹자는 “사람은 누구나 요순이 될 수 있다(人皆可爲堯舜)”고 설파했거니와, 천・지와 함께 삼재의 하나로 참여한 인간 본연의 임무를 각성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연암도 문명 건설을 ‘독서지사’의 임무로 확인했지만, 다산은 주체 실현을 위해 독서의 방법론, 즉 학문을 설계한 것이다.

 

 

3. 문심혜두와 공부법

 

다산의 방대한 저작은 근대적 분류개념으로 문학과 인문학, 사회과학에서 의학 등의 기술학에 이르기까지 온갖 분야에 걸쳐 있지만, 이것은 하나의 체계로 구성된 전체이니 그 자체가 학문의 방법론, 즉 공부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다산의 공부법을 낱낱이 파악해서 그 전모를 이해하자면 역시 방대하고 지난한 작업이 될 터이다. 여기서는 당시 교육현장에서 통용되던 기초교재들에 대해 다산이 비평한 글 세편, 그리고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 내용이 바로 공부법으로서 워낙 핍진하기 때문에 다산 공부법의 진면목으로 들어가는 입구 내지 첩경이지 싶다.

다산은 교육의 단계로서 ‘동치독서(童穉讀書)’라는 과정을 설정한다.7) 8세에서 16세에 이르는 기간을 지칭하는바 오늘의 교육제도로는 초등학교에서 중학교까지의 시기다. 이 단계를 다산은 인간의 정신성장의 발육기로 보아 각별히 유의한 것이다. ‘독서’는 책을 읽는다는 본뜻에서 나아가, 현대 중국어에서는 한국어의 ‘공부’에 대응되는 말로 쓰이는데, 다산의 ‘동치독서’ 또한 공부의 의미로 읽힌다. 당시 조선사회는 일반적으로 주흥사(周興嗣)천자문(千字文)과 『사략(史略)』 『통감절요(通鑑節要)』를 교과서처럼 가르쳤다. 이에 다산은 「천문평(千文評)」 「사략평(史略評)」 「통감절요평(通鑑節要評)」 연작을 써서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이 세편의 교육평론은 대상이 되는 책을 겨냥해서 그것들이 각기 교재로서 어떻게 부적절한지를 통렬하게 지적한다. 종래에도 이들 책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없지 않았다.8) 그러나 다산은 차원이 다르다. 세편의 글에는 인문교육을 위한 방법론적 고민이 깃들어 있다. 물론 다산의 평론은 각기 책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으로 논리를 끌어가기 때문에 내용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지만, 세편을 관류하는 요지는 하나로 모아진다. 다름 아닌 ‘문심혜두(文心慧竇)’ 네 글자다.

 

‘아동을 깨우치는 방법’蒙之法은 그 스스로 지식을 개발하는 데 있다. 지식이 미치는 곳에는 한글자 한구절 다 족히 문심혜두를 여는 열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지식이 활발하게 나가지 못하면 아무리 다섯 수레에 실은 만권의 책을 독파하더라도 읽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사략평」, 앞의 책 권22)

 

아이들이 글자를 하나둘 익혀가고 글을 한두 구절 알아가는 그 자체가 곧 문심혜두를 열어가는 과정이라는 논법이다. 그렇게 되지 못하면 아무리 만권의 책을 독파하더라도 무의미하다고 본다. 공부의 요체는 문심혜두로, 즉 공부란 ‘문심의 슬기구멍’을 뚫는 열쇠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또한 누가 열어주는 것도 밖에서 들어오는 것도 아니요, “자신의 내면에서 저절로 개발되어, 문자활동에서 진진한 즐거움이 생겨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앞의 글)라고 자율적 창발성이 문심혜두의 요령임을 밝혀두고 있다.

공부의 제일 묘방이 문심혜두라는 관점에서 평가할 때 그 세가지 교재로 가르치는 당시의 방식은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이 다산의 지론이다. 한자를 학습하는 첫걸음인 『천자문』의 경우, 사물을 유추하고 체계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을 배양할 수 있도록 짜여 있지 않으며, 인류역사를 접하는 처음인 『사략』의 경우 허황하고 괴탄(怪誕)해서 합리성을 결여했으며, 『통감절요』의 경우 특히 한문의 문리를 터득하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몇년을 두고 계속 읽혔는데 지루하기 짝이 없어 활발한 기상을 잃게 만든다는 것이다.

‘문심’은 당초 『문심조룡』에서 표방했듯 인문전통을 계승하고 새로운 인문을 열어가는 연결고리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인간 내면의 창조성이 다름아닌 문심이다. 다산은 이 ‘문심’을 호출하고 거기에 ‘혜두’를 붙여서 공부법의 요체로 삼았다. ‘문심혜두’의 용례는 중국 최대의 총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검색해보아도 나오지 않으며, 한국의 문헌에서는 오직 다산의 이 용례가 확인될 뿐이다. 아마도 다산이 처음으로 쓴 것 같다. 그런데 문심 두 글자를 다산에 앞서 뜻깊게 호출한 사례를 연암에서 만난다. 연암은 글쓰기라는 행위가 원초의 생생한 감동을 잃어버린 현상을 탄식하여, “슬프다! 포희씨(羲氏, 복희씨)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 문장이 흩어진 지 오래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곤충의 더듬이, 꽃술, 석록(石綠), 비취(翡翠)에 그 문심은 변치 않고 그대로다”라고 덧붙인다.9) 연암이 촉구한 뜻은 우주의 삼라만상을 인식해서 기호로 표현한 저 인류 초유의 창조적 감동을 우리의 글쓰기에서 회복하는 데 있었다. 문심혜두를 들고 나온 다산 또한 문자 창조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사고한 점은 마찬가지인데, 인간의 정신활동의 능력을 좀더 폭넓게 과학적이고 구조적으로 개발하려는 의도를 담았다고 여겨진다.

다산이 두 아들에게 보낸 서한집은 오늘날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10)라는 이름으로 번역, 발간되어 국민적 교양서로 읽히고 있다. 귀양살이를 하면서 멀리 있는 두 아들을 편지로 가르치고 깨우친 것으로, 그 내용이 워낙 곡진하고도 적확해서 지금도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다. 이 내용을 공부법으로 볼 때 당시 그의 두 아들은 청장년이었으므로 ‘동치독서’에서 단계가 훨씬 높아진, 박사과정이나 연구과정쯤에 해당하는 셈이다.

다산은 자기 가문을 폐족(廢族)이라고 표현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단자로 낙인찍혀 네 형제 중 한 형은 사형을 당했고 다른 형과 자신은 유배형에 처해져 언제 집으로 돌아갈지 아득했다. 이런 상태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도는 독서라는 것이다. “독서는 인간세상에서 제일의 맑은 일(讀書是人間第一件淸事)”임을 다산은 두 아들에게 강조하고 있다.11) 옛말에 “책 가운데 만종(萬鍾)의 녹(祿)이 담겨 있다”고 일렀듯 종래 공부의 목적은 오로지 과거시험을 보아서 벼슬을 하는 데 있었다. 벼슬할 가망이 없는 처지에서 공부에 매진하라고 역설한 그 뜻은 음미해볼 소지가 있다. 출세주의와는 다른, 순수한 학문의 길을 개척한 의미를 갖는다.

이 서한집의 내용은 독서지도뿐 아니라 가정사를 언급한다든지 생활을 지도하는 등이 포함되어 있다. 다산의 공부법은 생활지도와 독서지도를 아우른 개념이다. 다만 독서지도에 해당하는 쪽이 비중이 크고 자상하다. 독서지도는 참으로 자상해서 그때그때 읽어야 할 책의 목록이며 읽는 방법까지 꼼꼼히 제시한다. 지금 대학원에서 교수가 박사과정 학생에게 이런 식으로 논문지도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특히 주목할 점은 저술을 권장해서 주제를 제시하고 목차까지 잡아주는 것이다.

문심혜두에서 출발한 공부법이 진전하여 학문연구로 구체화되고 있다 하겠다. 따라서 이 서한집을 공부법으로 읽을 때 긴절하고 유익한 내용이 풍부한데, 다음에 몇가지 표제를 잡아 소개하기로 한다.

 

공부법의 총체

앞서 다산이 남긴 저술은 여러 분야에 걸쳐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했거니와, 그가 제기한 공부법 또한 총체적이다.

 

반드시 먼저 경학(經學)으로 기반을 확고히한 다음, 전대의 역사서를 두루 읽어서 득실(得失)·치란(治亂)의 근원을 알아본다. 또한 모름지기 ‘실용학’에 유의하되 고인들의 ‘경국제세의 문자’經濟文字를 즐겨 보아, 마음을 항시 만민에 은택이 미치고 만물을 양육하는 데 두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바야흐로 ‘독서군자’가 될 수 있다. 이와같이 한 연후에 가다가 안개 낀 아침, 달 뜨는 저녁을 만나거나 짙은 녹음에 비가 살짝 뿌려 발랄한 마음이 일고 표연히 생각이 닿아, 자연스럽게 읊고 자연스럽게 이뤄지면 천뢰(天)가 맑게 울리는 격이라. 이야말로 ‘시인의 활발한 경지詩家活潑門地’라 하겠다. 내 말을 오활(迂闊)하다고 여기지 말라.”(「기이아」, 『여유당전서』 시문집 권21)

 

주체 확립의 공부는 경학을 근본으로 강조하면서 동시에 사학(史學)을 필수로 삼는다. 경경위사(經經緯史, 경학을 날줄로 사학을 씨줄로 한다는 의미)의 방법론을 채용한 것이다. 위 문맥에서 ‘실용학’이란 “만민에 은택이 미치고 만물을 양육하는 데” 유의하는 학문, 경세학에 다름아니다. 곧 당시 발흥한 실학과 통하는 개념이다. 다산의 학문체계는 경학(주체의 이론적 정립)과 경세학(經世學, 주체의 사회적 실천)으로 구축되어 있는바, 공부법을 이미 그 두 방향으로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눈여겨볼 대목은 ‘시인의 활발한 경지’를 공부법에서 챙겨놓은 점이다. 시 창작은 학문과 구분지으면서도 주체의 내면에서 통일을 이룬다. 총체적 공부법에 의해 문학까지 아우르는 통합적 형태의 인문학을 그려낸 것이다. 당시는 아직 지식의 분화를 거치기 전이었으므로 재통합이란 표현은 당치 않지만 그렇다고 미분화 상태의 연장이라고 볼 것도 아니다. 자기 나름대로 하나의 학문의 틀을 세우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식의 보편성과 자국에 대한 관심

다산학의 기반은 경학에 있다. 경학을 보편적 진리 내지 원론으로 접수한 것이다. 가령 『목민심서(牧民心書)』는 중국의 사례를 많이 원용해 나열한다. 자국의 지방행정을 다루면서 왜 굳이 그랬는지 의아한 느낌도 든다. 이런 부분들은 북한에서 펴낸 번역본에는 대개 빠져 있다. 다산은 지식의 보편성을 매우 중시했으며, 어떤 문제건 원리원칙에 입각해서 해법을 찾았다. 그렇다고 자국의 문헌이나 역사를 소홀히 취급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금년 겨울부터 내년 봄까지는 『상서(尙書)』와 『좌전(左傳)』을 읽어라”(「기연아(寄淵兒)」, 앞의 책 권21). 이처럼 경전 공부를 당부하고 한편으로는 『고려사(高麗史)』 『반계수록(磻溪隨錄)』 『서애집(西厓集)』 『징비록(懲毖錄)』 『성호사설』 등 자국의 문헌도 살펴보라면서 “그중에서 요긴한 부분을 초록(抄錄)하는 작업은 그만두어서는 안될 일이다”라고 덧붙이길 잊지 않는다.

 

요즘 수십년 이래로 일종의 괴이한 의론이 있다. 동방문학을 대단히 배척하여 선현들의 문집에 눈을 붙이려고도 하지 않으니 이는 큰 병통이다. 사대부 자제들이 국조고사(國朝故事)를 알지 못하고 선대 학자들의 의론을 보지 않는다면 그의 학문은 고금을 관통하더라도 거친 것이 될 수밖에 없다.(「기이아」)

 

실학을 규정짓는 특징의 하나로 자아인식을 들지만 다산은 제 나라의 구체적 실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옳은 학문을 이룰 수 없다고 강한 어조로 일깨운 것이다.

 

비판적 지식추구의 길

공부란 학습하는 행위요, 독서는 지식을 확충하는 과정임은 말할 것도 없다. 다산은 이를 전제하고 나아가 ‘비판적 독서’의 시범을 보인다. “옹담계(翁覃溪, 옹방강翁方綱)의 경설을 한두편 읽어보았는데 성글고 명료하지 못해 보인다. 그의 제자인 섭동경(葉東卿)은 학문이 또한 고거(考據)를 위주로 하는바 (…) 해박하기로 말하면 모서하(毛西河, 모기령毛奇齡)에 못지않고 정밀한 연구로 말하면 그보다 윗길이다.”(「시이아(示二兒)」, 같은 책 권21) 이렇듯 자기와 동시대 중국학자들을 거론하여 평가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선배학자의 업적인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日知錄)』과 이익의 『성호사설』을 놓고도 비판적인 논의를 주저하지 않는다. 『일지록』은 “사전(史傳) 중의 말을 초록한 것과 자기가 입론한 바를 뒤섞어서 내용이 견고하지 못하고 거칠다”고 비판한 다음, “나는 일찍이 『성호사설』은 후세에 전할 정본이 되기에는 만족스럽지 못한 것으로 여겼다. 고인들의 기성의 문장과 자기의 의론을 뒤섞어 책을 만들어 의례(義例)를 갖추지 못한 때문이다. 지금 『일지록』 또한 바로 이와 같은데다가 예론(禮論)은 특히 오류가 많다”고 지적한다. 가장 존경하는 학자의 위대한 저술을 두고도 자신의 안목으로 비판할 부분은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 쪽의 학술동향에도 비상한 관심을 둔다. “일본은 요즘 큰 학자들이 배출되는데 물부쌍백(物部雙柏, 오규우 소라이荻生徠의 본명) 같은 이는 해동부자(海東夫子)로 일컬어지고 있다. (…) 강소(江蘇)·절강(浙江)지역으로 직접 교류하고부터는 중국의 좋은 서적을 온통 구입해가는데다가 과거제도의 폐단이 없다. 이제 저들의 문학은 우리나라보다 월등히 앞섰다. 심히 부끄럽다.”(「시이아」, 같은 책 권21) 무릇 우리가 추구하는 학문은 회의와 비판에서 시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다산은 학문의 진로를 엄정하고도 개방적인 방향으로 안내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특히 비판적 지식 추구가 동아시아의 발견으로 통하는 점이 주목된다. 우리가 알다시피 전통적인 동아시아는 중국중심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조선은 은근히 ‘소중화(小中華)’를 자부하면서도 문명의 중심부에 대해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안목을 결여한 상태였다. 반면 중심부로부터 먼 일본을 다분히 야만시했다. 지금 다산의 글에서 일본의 학술 수준에 대한 평가, 중국의 당대 학자들에 대한 비판적 언급을 보면 그의 머릿속에 동아시아의 새로운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던 것 같다.

 

실용적 공부에 대한 착안

여기서 ‘실용적’이란, 오늘날 쓰이는 뜻처럼 인간의 삶에 직접 유익한 일을 도모하는 것을 가리킨다. 다산의 공부법은 ‘생활지도’의 측면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앞서 지적했거니와, 가족의 삶을 향상시키고 풍요롭게 가꾸기 위한 방안을 종종 적어 보내고 있었다. 양계(養鷄)를 권유하면서 한 말을 들어보자.

 

양계 경험을 얻은 다음에 모름지기 백가의 서적에서 닭에 관한 설들을 발취, 편찬하여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이나 유혜풍(柳惠風, 유득공)의 『연경(煙經)』처럼, 『계경(鷄經)』과 같은 책을 저술하면 아주 좋은 일이다. 속무(俗務)에 임해서 맑은 지취를 띠는 이런 방식, 모름지기 매사에 이것으로 준례를 삼아야 할 것이다.(「기유아(寄游兒)」, 같은 책 권21)

 

이처럼 다산은 생계를 위해 닭을 키우되 경험을 살려서 양계에 관련한 저술을 하도록 지도한 것이다. 이를 “속무에 임해서 맑은 지취를 띠는 방식”으로 규정지어, 그 방식을 준례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일반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른바 ‘속무’는 인간이 먹고사는 문제다. 이 문제가 중차대하기 때문에 응당 실용·실리를 소홀히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거기에 빠져서 속물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여겼음이 분명하다. 또한 원예농업이나 약초재배 등을 해볼 만한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정방형으로 구획해서 (작물을) 반듯반듯 배치해야 자라기도 잘 자라고 보기에도 좋다”12)고 가르친다. 생산성의 증대와 미학적 고려를 함께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다산 특유의 사고는 그야말로 과학적이며 기술을 중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문의 문명’은 실용적 측면이나 과학기술 쪽에 소홀해지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다산 특유의 실용성에 대한 착안은 실학의 실천적 측면이겠는데, 그 의미를 문명론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4. 인문학의 총체성을 회복하는 길

 

인문학의 총체성은 ‘하나의 인문학’을 의미하는바 이를 굳이 요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진정 주체적 자세로 현실에 대처하는 학문을 하면 총체성은 따라오기 마련이다. 총체성은 인문학에서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 본래적 속성이다. 하지만 인문학 본연의 총체성 회복이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어려운 과제라고 답하는 편이 현상황에 맞는 것 같다.

지난 세기말 이래 상황을 주도하고 우리의 삶을 바꿔놓은 것은 신기술의 놀라운 발전이다. 근래 진행되는 대학제도의 강도 높은 개혁이나 지식체계의 개편 또한 그 진원지는 바로 여기다. 신기술과 신산업이 어우러진 가운데 학문이 참여한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지식생산의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여겨진다. 학문이 신기술·신산업과 융합하는 여러 유형에서 전통적 인문학은 작은 부분에 불과한데, 이런 국면에서는 문화콘텐츠로서 기여하는 방안이 그나마 최선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설령 인문학의 보호육성책이 효과를 발휘하더라도 ‘반인문적 인문학’으로 전락할 우려를 떨칠 수 없다. 더욱 난감한 것은 이 상황 자체가 불가역적 형세라는 사실이다.

그 때문에 인문학 본연의 총체성은 기대하기 쉽지 않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되면 좋고 안되어도 그만인 일은 아니다. 여기에 인류사적 명운이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글 서두에서 “인문학의 위기의식은 ‘문명적 전환’의 시대를 반영한 정신현상”이라고 말했다. 문명전환시대란 위기시대의 다른 표현이다. 지금 극점에 달한 자본주의적 근대문명은 어떻게 바뀔 것이며, 미국 주도의 세계체제는 이제 어떻게 바뀔 것인가? 더구나 한반도의 민족현실은 위태롭기 그지없다. 이런 거대주제만 종합적 고찰과 통일적 사고를 요하는 것은 아니다. 당면한 사태로 예를 들자면 4대강사업이나 천안함사건은 물론, 일상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우리가 체감하는 이상기후, 생태계 변화도 다 총체적인 공부를 필요로 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이 대목에서 학문의 운동성(비판성)을 거론하려 한다. 창조적 학문은 운동성에서 비롯된다고 보아도 좋다. 우리의 학술사가 증언하는 바다. 조선후기 실학은 재야학자들의 학술운동이었으며, 1930년대 식민지하의 위기상황에서 일어난 조선학운동은 우리 근대학문의 본격적인 출발이 되었다. 21세기 인문학의 활로는 운동성을 떠나서는 열리기 어렵다. 제도권에서 수행하는 학문이라도 운동성을 상실하면 ‘죽은 학문’이 되고 말 것이다.

『창작과비평』은 올해 ‘창비사회인문학평론상’을 제정했다. ‘사회인문학’이라는 개념이 다소 생소하게 들리는데, “분과학문의 틀을 벗어나 인문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을 포함하는 새로운 ‘탈분과학문적’ 연구를 지향”한다고 밝히고 있다. 사회인문학은 “‘인문학의 사회성’ 회복을 통해 인문학 본래의 모습인 ‘하나의 인문학’ 곧 통합학문으로서의 성격을”13) 살리려는 것이며, “새로운 인식론적 패러다임을 개발”14)하는 데 역점이 두어진 것이다. 종래 학술적인 성격의 현상공모는 흔치 않은 일이지만 좋은 전례가 하나 있다. 한국근대학문의 건설자의 한사람인 김태준(金台俊)의 「『춘향전』의 현대적 해석」은 획기적인 논문으로 연구사적 의의가 큰데, 당초 조선학운동을 진작시키기 위한 행사로서 동아일보가 신춘문예와 함께 현상공모하여 193511일부터 동 지면에 10회 연재된 것이었다. ‘창비사회인문학평론상’ 역시 창조적 학술담론을 촉발하는 계기가 될지 지켜볼 일이다.

방금 인문학 총체성 회복의 어려움을 외적인 상황을 들어 말했지만, 내적인 학문작업으로 실현하기도 용이한 일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실감하고 있다시피 전공의 세분화가 계속 진행되어 동일 분야 내에서도 전공이 다르면 상호불통이 된 형편이다. 하물며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하나의 인문학’(사회인문학)으로 포괄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이 과제를 제기한 백낙청은 전분야를 한 사람이 모두 통달해야 한다는 주문이 아니며, “각자의 능력과 처지에 맞는 만큼의 지식을 습득하되 항상 ‘총체적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을 지향하는 자세를 갖”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15) 전적으로 동감이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상황을 큰 틀에서 장악하고 주도할 수 있는 인식능력, 인문역량의 배양이 긴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다산 공부법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다산학은 경학과 경세학으로 체계를 구축한 것이다. 이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유학의 기본틀이다. 그런데 다산경학의 내용은 도덕적 자아확립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적 실천(경세학)의 이론적 근거로서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갖고 있다. 경학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경세학은 국가제도 및 국방·강역(彊域)·의학 등등 그야말로 지식의 총화이다. 다산학은 하나의 자기완결적인 형태의 학문세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을 근대학문에 맞춰보자면 경학은 인문학(철학)에, 경세학은 사회과학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으나, 분할된 성격이 아니고 총체적인 하나의 체계임은 말할 나위 없다. 한국학술사에서는 ‘하나의 인문학’을 일찍이 성취한 모범사례로 다산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개별적인 저술 또한 각기 총체성을 지향하고 있다. 예컨대 앞서 거론했던 『경세유표』를 보면 국가개조의 이론적 기반을 『주례』의 해석을 통해 도출하고 제반 제도와 국정운영 및 수도 건설, 국토구획 등의 세부까지 기획하고 있다. 다산 자신은 이 국가개조안이 실현될 가망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낡은 이 나라를 새롭게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연구하고 저술한 것이다.16) ‘문명국가 건설’이라는 열정적인 저술의식이 총체성을 가능케 했다고 하겠다.

『경세유표』에서 이를 가능케 한 방도는 ‘주제적 집중’에 있었다. ‘주제적 집중’은 다산 공부법의 요령이다. 그런데 우리가 학문의 총체성을 추구한다 해서 전문적 심화와 수련을 소홀히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잠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말을 경청해보자. 추사는 실사구시의 방법론을 수립한 학자이자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가치를 창출한 예술가다. 그는 5천권의 책을 독파한 인문교양과 함께 금강역사의 쇠몽둥이 같은 필력의 연마가 필수임을 역설했다. 그러면서도 한폭의 난(蘭)을 치더라도 전심하공(專心下工, 마음을 오롯이 해서 공력을 들임)이 있어야 한다면서 이 또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학이라고 보았다. “군자의 일거수일투족 어딘들 도 아닌 것이 없다”는 주장이다. 각고의 노력과 고도의 진정성, 그 과정상에 도는 자재(自在)한다는 생각이다. 추사의 이 논법은 본말(本末)의 논리를 세워 도와 기(/技)로 이원화시킨 전통적인 패러다임을 해체하는 굉장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겠거니와, 공부법으로서도 요긴하다. ‘전심하공’은 우리말로 곧 공부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지금 통용되는 인문학 개념은 서구에서 유래한 것이다. 문명이 ‘civilization’의 번역어인 것과 같다. 동양 전래의 ‘문명’이나 ‘인문’과 문자 표현은 동일하지만 의미 내용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현상적으로 보면 그렇다. 동서양의 역사과정이 상이했던 만큼이나 문명 개념도 동서가 상이했다. 위로 그리스・로마에 뿌리를 두고 근대라는 시대조건에서 성립한 서양의 문명 개념에서는 중국 고대의 성인과 연계된 문명 개념에서 중심을 이룬 문(文)의 의미는 어디 붙여보기조차 어려운 것 같다. 그럼에도 상통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문명은 야만의 반대 개념이라는 점에서 동서양이 마찬가진데 인류의 지향이 다름아닌 문명이다. 동서에 상통하는 문명 개념에서 인류적 보편성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한다.

지난 20세기 전후 신구문명이 갈등·교차한 시점에서 서구적 문명에 동양적(전통적) 문명이 밀려난 결과로 문명적 단절 현상이 뚜렷이 나타났다. 그로부터 백여년이 경과한 지금 다시 문명적 전환의 시점에 서 있다. 나는 이 시점에서도 문명-인문을 서구적인 개념으로만 인정하면서 동양 전래의 개념과는 무관하다고 사고하는 태도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서구중심주의의 근대문명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문명의 틀을 어떻게 짜나갈 것인가는 인류사적 과제다. 이 인류사적 과제 앞에서 전통적인 인문 개념을 호출할 필요가 있다. 인문은 ‘인간적 문명’을 의미했다. 인간을 소외시키고 인류를 위협하는 문명을 ‘인간적 문명’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인문 개념이 유효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다산이 중시했던 ‘문심혜두’를 오늘의 인문교육의 키워드로 제의한다.

 

 

--

*이 글은 두차례 개작을 거친 것이다. 처음 제목은 「동아시아 문명전통과 교양교육 문제」로 2009년 6월 11일 서울대 기초교육원이 주최한 국제학술대회 ‘아시아 대학 교양교육의 정체성과 방향을 묻는다’에서 기조발제를 했는데, 이를 고쳐서 「전통적인 人文개념과 정약용의 공부법」이란 제목으로 2010년 11월 11일 제7회 다산학 학술회의 ‘다산 정약용의 교육사상과 공부법’에서 발표했다. 이번에 또 손질을 크게 했다.

1) 이매뉴얼 월러스틴 『유럽적 보편주의: 권력의 레토릭』, 김재오 옮김, 창비 2008, 134면.

2) 『논어』의 「자한(子罕)」 편에서 공자가 광(匡)이란 곳에서 신상이 위기에 처했을 때 부르짖은 말로 기록되어 있다. 원문은 “子畏於匡, 曰 ‘文王旣沒, 文不在玆乎?’”이다. 주자 해석의 원문은 “道之顯者謂之文, 蓋禮樂制度之謂.”

3) “인문의 으뜸은 태극에서 시발되었다. 심오하게 신명을 밝히되 오직 역상이 우선인데 포희는 처음에 팔괘를 그렸고 공자는 나중에 십익(翼)을 지은 것이다.(人文之元, 肇自太極, 幽贊神明, 易象惟先. 其始, 仲尼翼其終)”(『문심조룡 「원도(原道)」)

4) 『문심조룡의 「종경(宗經)」에는 “皇世三賁, 帝代典”이라고 해서 삼분(三墳)은 삼황(三皇) 때의 문적이고 오전(典)은 오제(帝) 때의 문적을 가리키는 것으로 표현한다. 후세에 ‘삼분 오전’은 전적류 일반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5) 『경세유표』의 「천관(天官)」편에서 전도사(典堵司)의 업무와 관련해 영국(營國, 수도 건설・경영)의 문제를 논하고(『경세유표』 권2 장38~39), 따로 또 장인영국도의 치밀한 설계를 제시하고 있다.(같은 책, 권3 장24~33) 안병직(安秉直)은 「다산과 체국경야(體國經野)」(『다산학』 제4집, 2003)에서 장인영국도를 다룬 바 있다.

6) 정약용은 『경세유표』의 서문에서 “以余觀之, 奮發興作, 使天下之人, 騷騷搖搖勞勞役役, 曾不能謀一息之安者, 堯舜是已. 以余觀之, 綜密嚴酷, 使天下之人, 虁虁遫遫瞿瞿悚悚, 曾不敢飾一毫之詐者, 堯舜是已.”라고 강조한 다음, 그럼에도 성인의 형상을 정반대로 마치 무위(無爲)로 다스렸다거나 철저하고 치밀하지 않았던 것처럼 왜곡시켜 혁신의 길을 가로막아 천하가 침체와 부패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변파(辨破)했다.

7) 「통감절요평」, 『여유당전서』 시문집 권22 장29, “童穉讀書, 槪用九年, 自八歲至十六歲是也.”

8) 『통감절요』와 『사략』 및 주흥사 『천자문』에 대해 서술하고 그 문제점을 적시한 것으로 홍한주(洪翰周)의 『지수염필(智水括筆)』 중 「사략·통감」 조와 「주씨천문(周氏千文)」 조를 들 수 있다.

9) 박지원 「종북소선서(鍾北小選序)」, 『연암집』 권7. 필자는 「박지원의 인식론과 미의식」(『한국한문학연구』 11집, 1988)에서 이 글을 인용하여 그 인식론적 의미를 논한 바 있다. 『실사구시의 한국학』(창작과비평사 2000)에 재수록.

10) 박석무 편역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개정2판, 창비 2009. 초판은 시인사에서 1979년에 나왔는데 1991년부터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되면서 개역·증보작업을 거듭해왔다.

11) 「기이아(寄二兒)」, 『여유당전서』 시문집 권21 장3.

12) 「기양아(寄兩兒)」, 앞의 책 권21 장6, “園圃·桑麻·蔬果·花卉·藥草之植, 位置正正, 陰可悅.”

13) 백영서 「사회인문학의 지평을 열며」, 『동방학지』 149호, 2010.

14) 백낙청 「사회인문학과 비판적 잡지에 관한 몇가지 생각」, 『동방학지』 152호, 2010.

15) 백낙청, 앞의 글.

16) 「자찬묘지명 집중본(自撰墓誌銘 集中本)」, 앞의 책 권16 장18, “經世者何也? (…) 不拘時用, 立經陳紀, 思以新我之舊邦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