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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권보드래 외 『지식의 현장 담론의 풍경』, 한길사 2012

사회인문학, 학술의 사회적 소통을 말하다

 

 

류준필 柳浚弼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HK교수 pilsotm@inha.ac.kr

 

 

7942‘사회인문학’은 근자에 새로이 떠오르고 있는 신흥 ‘브랜드’다. 창비가 주관하는 ‘사회인문학평론상’이 벌써 두차례 수상자를 배출했고, 한국학 분야를 대표하는 연구소(연세대 국학연구원)도 학술적 어젠다 및 학술총서의 명칭으로 사회인문학을 표방하고 있다. 사회인문학이라는 그 이름만으로도 함의를 대략 가늠할 수 있듯이, 사회인문학은 인문학의 사회성과 비판적 본래성을 회복하자는 특정한 학술적 경향이다. 그 구체적 내포와 지향은 복잡하기 마련이지만 사회인문학이라는 표제어의 대두는 인문학의 위상과 정향에 대한 반성을 요청하는 저간의 사회적・역사적 상황의 산물이다.

인문학의 사회적・학술적 위상에 커다란 동요가 찾아온 건 꽤 오래된 일이다. 여러가지 대안과 실험이 이어졌지만, 현재 시점에서라면 ‘힐링・치료・위안’을 관형어로 앞세운 인문학의 역할이 가장 대중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다. 애당초 인문학에 이런 기능이 없던 것도 아니므로 뜬금없지는 않다. 그만큼 삶이 팍팍하고 세상살이가 고달픈 형편이라 이런 요청에 제대로 응답할 수 있다면야 충분히 보람찬 사업이 된다. 그러나 ‘힐링・치료・위안’이란 아무래도 사후적 위치에서 생겨나는 현상이다. 더 까칠하게 굴자면, 길 나서는 두려움에 주저하는 이들을 달래듯 등 떠미는 역할에 가깝다. 이런 탓일까. 이미 벌어진 상황을 잘 추스르는 일에 투여하는 노력 이상으로, 진단・처방・예방의 선순환 구조 창출이 더 근본적 소임이라는 다짐은 자주 망각된다.

‘사회인문학’이라는 신조어가 큰 울림을 동반하는 맥락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인문학의 사회적 성격을 본래면목으로 규정하고, 그 사회적 소통방식과 실천적 개입에서 무게중심을 찾으려 하는 학술적 경향이 바로 사회인문학이기 때문이다(5~8면). 그렇지만 ‘사회’라는 접두어를 달고 있다고 해서 여러가지 인문학 가운데 하나라는 분류적 이해는 적절하지 못하다. ‘사회(성)’란 인문학과 불가분리의 본래성으로 인식되는 까닭에, 기실 ‘사회인문학’은 바로 인문학과 등치관계이기 때문이다(사회인문학총서 1 『사회인문학이란 무엇인가』, 한길사 2011). 이러한 기본 입장을 출발점으로 삼아 사회인문학으로서의 한국 인문학이 형성되어온 역사와 현재를 검토하는 작업은 자연스런 절차이다. 학술적 제도와 담론에 중심을 둔 『한국 인문학의 형성』(사회인문학총서 2, 한길사 2011)을 잇는 자리에, 『지식의 현장 담론의 풍경』(이하 『지담론』)이 세번째 성과로 제출되었다. 이 책의 부제 ‘잡지로 보는 인문학’을통해 알 수 있듯이, 학술과 사회 담론의 상관성을 잡지-매체에 초점을 맞추어 검토한 결과물이다.

『지식・담론』은 세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구화를 시대적 조건으로 지식과 매체의 변동을 다룬 1부, 1950~70년대를 중심으로 사회인문학과 잡지의 관련 구조를 해명한 2부, 그리고 80년대 민주화 이후 등장한 여러 분야의 진보적 학술지를 되짚어보는 3부. 목차만으로도 사회인문학과 잡지・학술지의 관련성을 거시적으로 조망하는 데 손색이 없다. 다양하고 풍성한 논의들이 도처에서 출몰하지만, ‘잡지로 보는 인문학’이라는 주제를 감안할 때 2부가 이 책의 간선(幹線)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모두 네편인 2부의 글들이 각각의 개성과 특장을 보이고 있지만 그 기저에는 하나의 계보가 뚜렷하게 전제되어 있는 듯하다.

50~70년대를 사회인문학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결과 등장하는 잡지의 계보는, ‘『사상계』 → 『청맥』 → 『창작과비평』’이다. 결국 이 계보가 부각하는 바는, 사회인문학적 지향이 뚜렷한 학술적 경향을 사회적 담론으로 전환하고 동시에 그 담론이 학술적 경향을 재추동・강화하는 운동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민족주의・근대화 담론은 물론이고 민족・민중문학론(205~19면, 275~83면)과 한국사의 인식구조(238~60면)가 창출되었기에, 그것은 모태이자 양육의 장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3부에 등장하는 문학・역사・철학 분야 진보적 학술지의 세대적 재생산을 가능하게 한 밑거름 역할도 한 것이다.

『지식・담론』의 필자 대부분은 이미 학계에 적잖은 명성을 쌓은 소장학자이다. 그런 만큼 글 한편 한편이 다 치밀하고 정연하다. 그럼에도 일독 후의 전반적 인상을 굳이 말하자면 ‘기시감(旣視感)’에 가깝다. 이 책의 기획 의도상 불가피한 일이겠으나, 새로운 제안보다는 불명료한 상태를 좀더 명료하게 다듬는 데 주력한 것 같다. 3부에서 진보적 학술지의 만족스럽지 못한 현재를 넘어서는 미래가 잘 예감되지 않는 것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1부의 ‘지구화’라는 시대적 조건이 사회인문학도 공유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사회’에 대한 규정적 함의 또한 갱신의 대상인지 모른다. 무엇보다 현실적으로나 학술적으로 깊은 영향 관계에 있었고 또 있는 ‘미국・일본・북한(・중국)’이 사회인문학의 정립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궁금해진다. 인용이나 각주에서가 아니라 학문적 구조 속에 내재화되는 경로와 형상을 보여주는 일은 피하기 어려운 과제다. 사회인문학이 보여줄 다음 성취가 궁금할뿐더러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