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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문학, ‘닫힌 미래’와 싸우다

 

세계의 불안을 견디는 두가지 방식

 

 

한영인 韓永仁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문학과 정치’에 대한 단상」 등이 있음. jwhyi@naver.com

 

 

1. 들어가며

 

삶을 견디게 하는 것은 희망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유명한 책 제목처럼 ‘더 나은 삶에 관한 꿈’이 없다면 우리가 삶을 이어가야 할 필연적인 이유를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주체가 꽉 막힌 현실을 돌파하여 희망을 자신의 수중에 거머쥘 수 없는 형편이라면 얘기는 사뭇 달라진다. 이때 희망은 생()을 위한 자산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손쉽게 부패되어 이내 절망으로 변질되고 마는 치명적인 위험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게 되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절망의 위험을 감지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N포세대, 헬조선, 흙수저 따위의 유행어들은 어느새 우리가 냉소와 체념, 자조의 감각으로 충만해졌음을 보여준다. 문학 역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로부터 마냥 자유로울 수는 없다. 문학이 사회를 투명하게 되비추는 거울은 아니지만, 작가는 엄연히 사회 속에 존재하기에 작가들이 호흡하는 사회의 공기는 작품 속에 그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만약 우리가 근래의 문학에서 희망의 전언보다 묵시론적 파국을 쉽게 감지한다면, 그리고 폐쇄적인 골방에서 자신만의 유희에 골몰하는 인물에 좀더 익숙해졌다면, 그것은 작가가 (무)의식적으로 남긴 그 흔적들을 거듭 발견한 탓일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한 사회의 정치적/정신적 한계에 고여 있지 않으며 그 한계를 자신의 과제로 삼고 돌파해내려 고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미학적 충격과 감동의 출처가 바로 이러한 성공적인 돌파의 산물임은 말할 것도 없다. 성급한 절망이 습관적으로 발설되고 비루한 자조와 체념이 지루할 만큼 넘쳐나는 암울한 현실에서 절망을 과장하지 않고 의연하고 깊은 호흡으로 희망의 싹을 돋우어내는 작업의 소중함은 더욱 절실해지며 그러한 작업을 날카로운 감식안으로 응원해주는 비평 역시 긴요해지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현실을 적극적으로 돌파하려는 실천적 의지나 희망의 분위기로 채색된 미래에의 전망이 서사의 표면에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작품이 그저 현실을 체념적으로 수락했다거나 절망적인 현실에 짓눌려 있다고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삶이 때론 희망도 절망도 상관할 수 없는 자리에서 제 몫의 시간을 견뎌내는 것처럼, 문학 역시 희망이나 절망이라는 개념으로 포착되지 않는 비결정의 시간 속에서 삶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니 우리는 의연하고 깊은 호흡으로 희망의 싹을 돋우어내는 작업의 소중함을 인식하는 것과 동시에 어떠한 종류의 희망(의 생산)과도 무관한 자리에서 삶을 견딘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소설적 작업 또한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비록 겉으로는 희망과 무관한 듯 보이는 그 작업들 역시 세계와의 치열한 대면을 통해 생성된, 현재를 감당하는 문학적 작업의 일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실을 감당하고 견딘다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고쳐 생각할 필요가 있다. 흔히 감당한다는 것은 능히 견디어냄을 뜻하며, 견딘다는 것은 올바른 방향성을 지향하는 주체가 그것을 왜곡시키려는 외부의 압력에 맞서 싸우며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고 지켜냄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오랫동안 주체의 진정성은 견딤의 형식을 구성하는 내용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는 것은 참담한 부끄러움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변질(變質)이나 변절(變節)이란 단어가 모두 품고 있듯이 견딘다는 것은 ‘변()’함과의 투쟁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렇게 자신의 신념을 곧고 염결하게 지켜내는 것만을 진정한 견딤이라 할 수 있을까. 굳게 견디는 과정에서 발생한 온갖 변형(變形)들은 그저 부끄러운 흔적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견딘다는 것은 뒤틀림의 반의어라기보다는 그것조차 포함하는 생존의 형식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한 의지와 굳은 마음으로 미래의 희망을 차분히 직시하며 전진하는 것이라기보다 온갖 기형(奇形)으로 점철된 마음과 육체를 끌어안고 자신의 생을 겨우 밀고 나가는 일에 더욱 가까운지도 모른다.

 

 

2. ‘쓰레기’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조해진의 「산책자의 행복」

 

여기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돌연 뿌리 뽑힌 후 밑바닥 삶으로 내쳐진 한 여자가 있다.1) 한때 대학 강사였던 그녀는작품 속에서는 ‘라오슈’(중국어로 ‘선생님’의 뜻)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철학과가 다른 비인기 학과와 묶여 인문학부로 통합되고 철학과 관련된 교양수업이 폐강되면서 (…) 대학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밀려나게”(254면) 되었으며 결국 어머니의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파산에 이르고 만다. 그녀는 “어디로든 발을 뻗어야 하지만 내딛는 곳이 곧 나락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분명하게 의식해야 하는 불안한 피곤”(253면)에 휩싸인 채 하루를 버텨가는데, 이십년 가까이 대학에서 강의해왔지만 현재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어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그녀에게 이러한 불안의 근거는 너무나 명확한 것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불안은 비단 그녀만의 것이 아니다. 그녀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는, 한때 그녀의 학생이었으며 현재는 독일에서 유학 중인 중국인 메이린 역시 비슷한 종류의 불안을 공유하고 있다. 물론 “부모님이 보내주는 돈”으로 “생산성과는 완전하게 무관한 산책”(252면)으로 하루를 소요하는 메이린의 처지는 라오슈의 그것에 비해 낫다. 그러나 라오슈가 편의점과 임대아파트로 상징되는 ‘속된 세계’의 이방인인 것처럼 메이린 역시 독일이라는 낯선 세계에서 철저히 이방인으로서의 감각만을 부여받는다. 물론 이것은 (라오슈의 경우와는 다르게) 메이린 스스로가 선택한 삶이지만 그렇다고 진정한 유대관계의 부재에서 오는 고독과 불안의 감각이 그녀의 삶에 깊이 스미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메이린은 자신의 삶을 “해변에 버려진 종이상자처럼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조금씩 무너지고 있”(252면)는 것으로 느끼는데 물에 젖은 종이상자의 흐물흐물한 질감은 그녀의 삶이 뿌리내리는 데 필요한 단단한 지반과 대비되면서 존재의 필연성을 상실하고 우연과 임의성으로 점철된 세계의 불안을 온몸으로 마주하는 현대인의 처지를 떠올리게 한다.2)

중국에서 한국으로, 그리고 한국을 거쳐 독일로 이어지는 메이린의 궤적은 국경 간 장벽을 허물고 자유로운 인구의 이동을 가능하게 한 세계화의 효과이리라. 하지만 메이린이 산책 중에 만난 청년 노숙자 루카스는 세계화가 자본의 세계화인 동시에 사회적 위험의 세계화이며 존재론적 불안의 세계화이기도 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민자 출신의 루카스는 독일에서 합법적으로 체류하고 노동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시민으로서 한때 독일 회사에 고용되어 일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모든 것이 일시적”(263면)일 뿐이었다고 말한다. 루카스의 모습은 일상(日常)이 단지 일시(一時)적인 것으로밖에 허락되지 않는 세계적 현실을 잘 보여주거니와 작품을 지배하는 전반적인 불안의 공포가 비단 한국사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넌지시 일러준다.

이렇게 등장인물들이 직면한 불안에 초점을 맞출 때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먼저 개인의 평범한 일상을 유지 불가능한 기획으로 만드는 동시에 삶의 확실성에 관한 일체의 소망을 한낱 미망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유동적인 현대성’(liquid modernity)에 대한 비판으로 읽힌다. 그러한 독법하에서 라오슈와 루카스는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이 말한 배제와 폐기의 운명에 놓인 자, 즉 ‘쓰레기’의 대표적인 형상이 된다.3) 하지만 이 작품은 라오슈나 루카스와 같은 이들을 끊임없이 쓰레기로 생산해내며 “궁극적 조화와 영원한 지속성을 추구하는 것”을 “단지 분별없는 관심사로 치부”4)하게 만드는 전지구적 시스템에 대한 고발이 아니며 바로 여기에 이 작품의 독특성이 있다. 작품은 시스템을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지 않으며 주인공인 라오슈를 시스템의 수동적인 피해자로 그리지도 않는다. 따라서 그녀가 마주한 비극적 현실로부터 평온한 일상을 보증하는 직업의 소중함을 읽어내고 그것을 일시에 파괴하는 해고의 잔악성을 비난하는 것은, 혹은 ‘사회국가’의 쇠퇴를 한탄하며 배제되고 폐기되는 인간들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그 독법이 가진 일말의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일면적일 수밖에 없다. 외려 이 작품의 특징은 구조의 폭력과 그것에 의해 수난을 겪는 개인을 다룰 때 흔히 빠지기 쉬운 이같은 도식을 벗어났다는 데 있다. 라오슈는 객관적으로 보아 명백히 시스템의 희생양이지만 어딘가 일이 이렇게 된 데 그녀의 책임이 전무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느낌을 준다. 오히려 작품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그녀가 지닌 인식론적 한계이며 그 한계에 직면한 채 삶을 견뎌나가야 하는 존재의 처연함이다.

라오슈의 한계는 그녀가 삶과 죽음을 포함한 일체의 세계를 그저 관념적으로 사유할 뿐이라는 데 있다. 삶에 대한 그녀의 관념성은 그녀가 인간의 실존과 자유에 대해 사유하면서도 노동자라는 자신의 사회적 존재조건에 대해서는 고민해본 적 없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 비정규 교수인 그녀야말로 “국가-자본-테크놀로지”라는 트라이앵글을 재생산하는 장치가 되어버린 대학의 모순을 체화하고 있는 존재지만,5) 이 모순은 그녀가 자본의 논리에 의해 대학 밖으로 쫓겨나기 전까지 그녀 안에서 철저하게 은폐된다. 그녀는 마치 자신은 노동자가 아니며 대학 역시 단순한 ‘직장’이 아니라는 듯이 대학 측의 처분에 대해 노동자로서 응당 가질 법한 어떤 억울함이나 부당함도 토로하지 않는다. 따라서 작품 속 그녀의 고통은 결코 ‘실업’으로부터만 유래한 것일 수 없다. 그녀가 잃은 것은 그저 직업이 아니라 추상과 관념만으로 안온함과 충만함을 보증받을 수 있던 세계이며 그녀의 고통은 바로 이 세계를 상실한 데서 기인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매우 극적인 구도를 갖고 있다. 대학으로 상징되는 고귀한 천상의 세계와 편의점으로 상징되는 속된 지상의 세계가 극명하게 대비되며 주인공은 천상의 세계에서 지상의 세계로 급작스럽게 추락한 뒤 고통스럽게 방황한다.

대학이라는 성( 혹은 )의 세계로부터 뿌리 뽑혀 내쳐진 뒤 그녀가 당도한 곳은 “수치심은 사치가 되고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자유는 최후의 보루조차 될 수 없는”(253면), 그녀가 예전이라면 “관성과 습관에 복종하며 (…) 심연을 모른 채 표면만을 훑는 가짜의 방식”(265면)이 지배한다고 생각했을 속()된 세계다. ‘쓰레기’가 되어 속된 세계로 전락한 자는 자신의 존엄을 더는 유지할 수 없기에, 과거 자신이 했던 말들은 그저 부끄러움과 모멸로 그녀 자신에게 되돌아올 뿐이다.

 

생존은 스스로 해결하되 세상이 인정하고 우대해주는 직업에 연연하지 말라고, 눈 가린 말들처럼 정해진 트랙을 달릴 필요 없다고, 종강 즈음이면 한 학기를 정리하며 그녀는 학생들에게 말하곤 했다. 속된 세계로의 편입을 선택하지 않는 자유를 지키는 한 어떤 형태의 가난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킬 수 있다고도 했다. 그렇게 말할 때 그녀는 늘 확신에 차 있었고 그 말의 무게를 책임질 준비도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에게 남은 선생으로서의 마지막 말은 존재와 신념을 모두 부인하는 배교자의 언어였다.(256면)

 

‘배교자’라는 단어에서 드러나듯 지금 그녀가 마주하는 고통은 단순히 경제적 곤란이라기보다는 예전의 그녀를 현재의 자신이 배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유래한다. 그녀가 과거에 자신이 지녔던 철인(哲人)적 신념을 너무나 쉽게 배반한 것은 앞서도 지적한 것처럼 인간의 실존이나 자유의지 등을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허술하게 파악한 탓이다. 인간의 자유는 관념이나 추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체제의 동학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그녀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 아무런 선택의 여지 없이 사회의 밑바닥으로 떨어지게 된 후에야 어렴풋이 깨닫는다. 그러므로 그녀의 배반은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없는 환경이 강제한 결과인 동시에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라오슈는 마침내 시스템에 의해 ‘쓰레기’로 내몰리고 나서야 나약한 관념에서 벗어나 비로소 동시대인들이 감당하는 생의 무게를 핍진하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를 라오슈라는 인물의 내면적 성장서사로 읽기는 어렵다. 모험담과 성장담의 플롯과는 달리 작품 속에서 그녀가 경험하는 추락은 성장을 위해 예비된 고난이 아니다. 이는 그녀의 깨달음이 철저한 배반과 변절(變節), 그리고 부정직한 욕망들이 혼란스럽게 중첩되어 진행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전통적인 의미의 성장서사(growth-narrative)란 세계의 확실성과 영속성을 보증받을 수 있던 시기에 비로소 그 유의미성을 획득할 수 있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모험담은 되돌아올 고향을 전제하고 성장담은 도달할 미래를 상정한다. 그렇기에 종종 성장은 강철의 단련 과정에 비유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것은 우리를 강철로 단련시키는 시련이 아니라 쓰레기로 폐기시키려는 노골적인 폭력이며 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어떻게 강철처럼 단련될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쓰레기’로 만드는 세계의 폭력 속에서 어떻게 생을 견뎌나갈 것인지에 가깝다. 단단한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자본의 가공할 열기 속에 강철은 이미 형해화된 지 오래다. 오직 쓰레기로 생산될 위험과 공포에 떨고 있는 인구(人口)들이 있을 뿐이다. 이 쓰레기들은, 과연 어떻게 단련되는가.

강철은 뜨거운 망치질에 의해 단련되지만 쓰레기는 그저 폐기의 운명밖에 남은 것이 없는바, 거기에는 단련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러한 모순적인 질문의 형식을 취해본 것은 현재의 시스템에서 “‘쓰레기’로 지정되는 것은 이제 더이상 과거처럼 일부 분리된 인구만의 문제가 아니며 모든 사람의 잠재적 전망이” 될 만큼 보편적인 삶의 조건이기 때문이다.6)처지가 이러하다면 우리에게 더없이 적대적인 세계 속에서 삶을 견딘다는 것은, 어쨌거나 스스로 생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나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단련’의 과정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통과해야 하는 이 단련의 과정은 무엇보다도 생 그 자체를 놓지 않으려는 절박한 동기에 의해 추동되는 것처럼 보인다. 생을 향한 이러한 절박함이야말로 뿌리 뽑힌 삶 이후에도 우리가 미래의 시간 속에 기거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유일한 끈이며 어떻게든 그 끈을 부여잡고 끝내 놓지 않는 한에서만 우리의 삶은 그저 배제되고 폐기되어야 하는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주체성을 탈피해 새로운 미래에 대한 조그마한 희망에 접속할 근거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라오슈가 삶의 밑바닥에서 외려 유례없이 정직하고 강렬한 생의 의지를 보여주는 장면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녀는 수치와 모멸에 직면하여 “사는 게 원래 이토록 무서운 거니”(256면)라고 묻지만 그 두려움 앞에 그저 주저앉지 않는다. 죽음을 “구체적인 단절이 아니라 존재를 완성하고 성숙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추상적인 과정”(260면)으로 인식했던 예전의 관념성과도 단절한다. 과거의 관념성이 소거된 빈 공간을 새롭게 채운 것은 목숨에 대한 강렬한 집착이다(“미치도록……/미치도록 살고 싶어”, 268). 집착이라 했지만 여기에는 현실을 피상적으로 거부하거나 운명처럼 체념하는 주체에게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정직함과 투명함이 깃들어 있다. 물론 그것은 비명과도 같은 절규이며 그곳에서 어떤 긍정적인 삶의 방향성을 감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생을 향한 이같은 절박한 절규는 ‘쓰레기가 되는 삶’에 허락된 유일한 견딤의 형식일지도 모른다. 생을 견딘다는 것이 그 자신의 온전함을 유지하며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세계마저 품어내는 승리의 도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온갖 뒤틀림에도 생을 향한 의지를 이어가는 처절하고 지난한 과정이라고 할 때, 라오슈의 뒤틀린 절규는 또한 현 시대를 살아가는 뭇 존재들의 견딤의 형식을 핍진하게 환기시키는 바가 있다. 생을 향한 이 투명하고도 원초적인 열망이야말로 ‘쓰레기’로 밀려난 존재들이 새롭게 삶을 이어갈 수 있게 하는 시작점일지도 모른다.

 

 

3. 목숨을 건 상품들의 존재론 : 윤고은의 소설들

 

하지만 과연 그 투명한 절규로 충분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생의 의지를 절박하게 포지(抱持)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견딤의 자원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알 수 없는 곤경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그러한 일이 벌어진 원인을 찾고자 애쓴다. 그저 불어오는 바람을 막막하게 맞아야 하는 나무와는 달리,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해석하고 자신의 삶을 통어(統御)하는 요인들을 규명하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언제나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삶은 명확한 인과관계의 사슬로 연결된 것이라기보다는 온갖 우연과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공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우연과 불확실성에 짓눌려버리면 삶은 우리에게 그저 신비한 힘으로 나타날 뿐이며 불가해한 외부의 폭력을 체념적으로 수락할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우리를 불안정한 조건 속으로 내모는 외부의 힘에 대한 분석이라 할 것인데, 조해진(趙海珍)의 「산책자의 행복」에는 인물들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구조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가 보이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7) 세계를 이해하는 일은 세계를 견디기 위해 인간이 발전시킨 하나의 방편이기에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 작업과 세계를 견디는 일은 별개의 과정일 수 없다. 절박하고 투명한 절규만큼이나 세계의 원리를 인식하려는 작업이 중요한 이유다. 제대로 견디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불안을 생산해내는 시스템의 정체를 탐문할 필요가 있다.

윤고은의 소설은 현재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시스템의 성격과 동학을 검출하는 작업의 문학적 실례(實例)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그녀는 재기발랄한 상상력의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 상상력은 현실을 지배하는 자본의 논리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 탈현실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그녀의 작품이 종종 강한 현실성을 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녀는 자주 사실주의적 기율을 훌쩍 뛰어넘어버리지만, 그럴 때조차 그녀의 소설은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컴컴한 터널”(진은영)의 세계임을 ‘리얼’하게 환기시킨다. 그런 점에서 불안은 윤고은의 소설에서도 핵심적인 화두다. 하지만 그녀의 소설에서 불안의 담지자는 인간이 아니라 차라리 인간마저 포함하는 일군의 상품들이다. 거기서 인간은 상품들이 시장 한가운데서 화폐와의 교환(불)가능성에 직면한 채 놓여 있듯 불안 속에 떨고 있다.

맑스는 어떤 생산물이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그 생산물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교환을 통해 이전되어야 함을 강조한 바 있다.8) 상품경제에서 화폐와 교환되기 이전의 상품은 그것이 가진 고유한 사용가치와 관계없이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또한 자본가는 화폐축장자일 수는 있어도 결코 상품축장자일 수는 없기에 화폐로 교환되지 못한 상품은 폐기의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다. ‘쓰레기’로 내몰린 인간들이 배제와 폐기의 운명을 피치 못하는 것처럼 상품 역시 ‘목숨을 건 도약’에 성공하지 못하면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노예제 사회와 달리 인간 자체를 상품으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간의 노동력이 특수한 종류의 상품으로 거래될 뿐이다. 그러나 윤고은은 마치 이러한 구별이 추상적인 차원의 것이며 자본은 인간을 완벽한 하나의 상품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고 보는 듯하다.9) 그녀의 소설에서 상품으로의 존재이전을 강요받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가령 유명 그림책 캐릭터 월리로 변신한 아르바이트생 제이를 보라.10) 제이는 소장에 의해 단순히 월리로 분()하는 것을 넘어 월리로 변()할 것을 요구받는다(“누가 봐도 감쪽같이 월리여야 해”, 77; “이번에는 최대한 진짜처럼 준비해야 했다”, 78).

월리로 변한 제이가 할 일은 그를 찾은 사람들이 붙여주는 ‘좋아요’ 스티커 백장을 모으는 일이다. 제이는 처음에 그 일을 별로 어렵지 않게 생각하지만 곧 사정이 여의치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곳에는 메텔, 뽀로로, 해리포터 등 수많은 ‘경쟁상품’들이 우글거리고 있으며 육십명밖에 없다던 월리들도 곳곳에서 떼로 출몰하기 때문이다. “저 앞에서 사백명의 군중이,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월리였다.”(95면) 이 ‘월리들의 무한증식’은 “그 안에서는 아무것도 판매하지 않”(78면)는 곳으로 설정된 리버씨티가 실은 시장의 은유적 공간임을 지시한다. 물론 거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상품은 없다. 다만 상품으로 전신(轉身, metamorphosis)한 인간들이 벌이는 악다구니의 무한 투쟁이 있을 뿐이다. 윤고은의 소설에서 인간은 인격의 담지자가 아니라 의인화된 상품의 형상으로 자주 출몰한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리버씨티는 문면과는 달리 아무것도 판매하지 않는 곳이 아니라 ‘인간상품’으로 가득 찬 거대한 시장에 다름 아님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제이는 과연 이 ‘인간 시장’에서 ‘목숨을 건 도약’에 성공할 수 있을까?

시장이라고 했거니와 우리는 학교에서 시장을 일러 자유로운 교환과 경쟁의 원리가 지배하는 곳이라고 배운다. 하지만 실제의 경험을 통해 구축한 우리의 암묵지(暗默知, tacit knowledge)는 이와 조금 다르다. 우리는 그 공간을 지배하는 원리가 차라리 사기와 협잡 그리고 폭력이 아닌가 의심한다. 「월리를 찾아라」는 그런 점에서 명료하게 공식화되거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시장에 관한 우리들의 암묵지를 명쾌한 필치로 그려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작품 속에서 월리들끼리 벌이는 악다구니에 가득 찬 싸움을 보라. 제이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척 친절하게 다가온 월리에게 뒤통수를 맞고 교활한 늙은 월리에게 심한 구타를 당한 뒤 스티커를 몽땅 갈취당하고 만다. 이 유치한 싸움은 얼핏 실소를 자아내지만 목하 하나의 상품처럼 놓여 시장에서 교환되길 고대하며 불안에 떨고 있는 우리로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월리가 득시글대는 ‘리버씨티’와 무엇이 다른지 알지 못한다.

끝내 처참한 몰골로 도망쳐 나온 제이처럼 윤고은의 소설에는 유난히 ‘목숨을 건 도약’에 실패한 ‘인간상품’들이 자주 등장한다. “어떤 물건도 사용대상이 아니고서는 가치일 수 없다”는 맑스의 말11)은 정확히 인간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작품 속에서 인간은 이미 사물화되어 자본의 유용한 사용대상이 되는 것 이외에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길이 막혀버린 존재들이다. 예순일곱번 면접에 떨어진 「해마, 날다」의 주인공 ‘나’와 같이 말이다. ‘나’는 대학을 졸업한 지 일년이 지났지만 번번이 면접에서 떨어지면서 백수 상태로 지내고 있다. 그러자 그녀의 존재가치 전반이 의문시된다. “내가 다음 소속을 정하지 못한 채로 대학을 졸업하자 아버지는 이력서의 규격에 맞춰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140면) 그러던 그녀는 예순여덟번째 면접을 본 회사에 덜컥 합격해 일을 시작하게 되는데, ‘해마005’라는 이름의 그 회사에서 하는 일이란 술 취한 이의 전화를 전문적으로 받아주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연애와 결혼 이야기를 취업과정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한 여성 고객과의 대화 장면이다. 그녀는 만나는 사람은 거래처, 결혼은 정규직, 이별은 사표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물론 ‘취집’이라는 말이 널리 유행하는 요즘 이러한 재치는 그리 새로운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럼에도 구직과 노동 과정을 서술하는 용어가 자연스럽게 삶을 소묘하는 용어로 활용되는 장면은 우리의 주목을 끈다.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군사용어들이 군사 파시즘이 남긴 깊은 외상의 증거이듯 이는 현재 우리 사회가 자본(기업)에 의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식민화된 공간임을 지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에 의해 식민화된 이와 같은 사회를 우리는 ‘기업사회’라고 부른다.12)

윤고은은 「P」에서 기업사회에 관한 흥미로운 알레고리를 제시한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P사는 “P시 면적의 삼분의 이를 차지”하는 곳으로, 타이어 모양을 본뜬 거대한 회사 부지 내에는 “은행이나 우체국, 종교시설과 시청”까지 들어서 있다(172면). 금융, 행정, 종교 기능까지 한데 아우르고 있는 P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도시이며 주인공 장이 삼년 전에 입사한 이래 한번도 회사를 벗어날 필요가 없을 만큼 완전히 자족적인 ‘사회’다. 따라서 P사와 P시가 같은 이름을 공유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여기서 기업은 단순히 사회의 경제적 부분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 그 자체로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체현하고 있다. 하지만 장은 그러한 완벽함에서 어딘지 모를 “찜찜함”(172면)을 느끼는데, 이러한 미심쩍은 불안은 장의 몸에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면서 서사의 표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장은 P사에 위치한 한 병원으로부터 별로 내키지 않는 캡슐 내시경 검사를 받게 되는데, 24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배출되게끔 설계된 내시경 해파리가 장의 소장 점막에 붙은 채 그대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장은 의료사고임을 주장해보지만 병원은 “이만명 중에 딱 한분 문제가 생긴”(174면) 거라며 장의 항의를 일축해버린다. 기대했던 회사도 별 도움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회사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PP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174면)이기 때문이다. “유기적인 관계”라는 중립적이고 부드러운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이미 P시는 자본의 전횡에 반발하며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운동하는 ‘사회’의 기능이 완전히 소거된 자본의 식민지에 불과하다. 따라서 “위험한 이물질을 품은”(178면) 장은 P사로부터 추방당하는 동시에 P시로부터도 배제당할 위험에 처한다. 기업사회에서 실직은 시민권의 상실과 직결된다.

그런데 사실 장이 지닌 위험은 어딘가 모호해서 과장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독자들은 몸속에 달라붙어 있는 해파리가 어떻게 “공해 유발 가능성 80퍼센트, 소음 유발 가능성 45퍼센트, 수질 오염 가능성 20퍼센트, 토양오염 가능성 21.5퍼센트”(179면)를 높이는지 그 근거를 작품 속에서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장의 몸속에 자리잡은 해파리가 끼치는 실질적인 위험이 아니라 일단 장이 다른 사람과 달라졌다는 점이다. 입만 열면 차이를 강조하고 거침없는 도전을 이야기하지만 실은 기업만큼 차이와 불확실성에 적대적인 공간도 없다. 장은 어느날 갑자기 발생한 순수한 차이, 시스템의 안정을 위협하는 불확실성으로 변화했기에 마땅히 제거당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장의 업무가 “표준규격에 어긋나는 것들을 베어”(168~69면)내는 일이었음을 떠올리면 이는 자못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자신을 추방시키려는 ‘음모’에 맞서 장은 P사로 복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이때 우리는 소설의 도입부에 장이 P사를 가리켜 “거대한 시장”(166면)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P사가 거대한 시장인 한 그곳 역시 윤고은이 ‘월리’를 통해 드러냈던 시장의 진짜 ‘원리’가 지배하는 공간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장은 같은 처지에 놓인 송이 회사를 고소하려 한다는 사실을 밀고함으로써 복직에 성공한다. 시장은 여기서도 배신과 사기, 협잡이 난무하는 곳이지만 「월리를 찾아라」의 제이가 그 시장의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어리숙한 존재였다면 장은 영악하게 그 시장의 논리에 충실히 복속되는 편을 택한다. 장의 배신은 ‘시장 원리’를 삶의 규칙으로 내면화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동시에 기업사회가 요구하는 규격화된 틀에 자신을 맞추겠다는 맹세의 서약이다. 결국 그는 스페어타이어를 트리밍(trimming)하는 것과 똑같은 장치에 자신의 몸을 우겨넣은 후 “Y 자 모양의 칼”(192면)에 의해 표준화된 상품으로 탈바꿈(metamorphosis)된다. 이렇듯 윤고은의 소설은 자본이 써내려가는 ‘변신 이야기’(Metamorphosis)의 연쇄로 구성되어 있다.

윤고은의 ‘변신 이야기’는 상품화에 대한 맑스의 부연설명을 뒤집은 채 진행된다. 맑스는 “어떤 생산물은 상품이 아니면서 유용할 수 있다”13)고 말했지만 윤고은은 현실을 가리키며 ‘유용한 것은 무엇이든 상품으로 전화될 것이며 심지어 어떤 생산물은 유용하지 않아도 상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소설적 특징으로 공인받는 이색적이고 기발한 직업들은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좋은 예이다. 술 취한 사람의 전화를 받아주는 회사(「해마, 날다」)에서 혼자 밥 먹는 법을 알려주는 학원(「1인용 식탁」)과 재난을 관광상품으로 만들어 파는 여행사(『밤의 여행자들』, 믿음사 2013)를 거쳐 지하철에서 책을 읽으며 그 책을 광고하는 인간 입간판(「요리사의 손톱」)에 이르기까지, 윤고은의 인물들은 이토록 화려한 ‘창조경제’의 향연 속에 살아간다. 이러한 직업들은 기존에는 “사회적 사용가치”14)를 지니지 않았던 대상조차 유용한 상품으로 만들어버리는 자본의 포식력이 낳은 새로운 사회관계의 표현이다.

「프레디의 사생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거기에도 기발한 ‘창조경제 컨설턴트’가 등장하는데 바로 유명인들이 살던 집에 거주하는 세입자로 하여금 그 집을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전문가 블랑이다. 그녀는 향수 사업을 위해 빠리로 거처를 옮긴 ‘나’의 집에 파편처럼 존재하는,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흔적(처럼 보이는 것)을 엮어 하나의 매끈한 서사로 탄생시킨다. 프레디의 노랫소리와 머리카락, 프레디의 연인 메리가 보낸 걸로 추정되는 메모는 그 자체로는 진위 여부조차 불확실한 ‘더미’의 일부일 뿐이지만 블랑의 작업을 통해 공신력있는 상징자본의 지위를 획득한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작업은 「Q」에서 소설가가 행하는 소설쓰기와 다르지 않다. 이제 상품의 사용가치는 중요치 않은 시대다. 중요한 것은 상품을 둘러싼 스토리(story)이며 이는 얼마나 그럴싸한 허구(fiction)를 구축해내느냐에 달려 있다. “향수 자체보다도 하나의 향수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이미지와 표현들을 읽는 게 더 중요한 시대였다.”(20면) 상품은 온갖 기호의 그물망에 포획된 물신적 환상으로 떠오른다.

이렇게 신비한 대상으로 떠오른 상품이야말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나’는 마치 자본가가 자본의 담지자인 것처럼 상품의 담지자일 뿐이며 혹여 향수가 팔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나’의 불안은 단지 ‘향수’의 불안이 의인화된 것에 불과하다. ‘나’가 수동적인 조연에 불과하다는 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프레디의 삶을 연기(혹은 모방)하게 되는 상황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그것이 비록 ‘쇼’인 걸 알지만 그 ‘쇼’를 멈출 수는 없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향수’라는 상품이고 그 주인공을 움직이는 힘은 결코 정지를 모르는 자본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운동은 빨간구두 소녀의 괴로운 춤처럼 결코 멈출 수 없으며 ‘나’의 ‘쇼’도 어쩔 수 없이 계속되어야 한다(“Show must go on”, 38면).

윤고은의 소설은 이처럼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각종의 상품들이 직면하는 존재론적 불안을 재치있게 소묘해낸다. 상품으로 변신하길 강요받는 인간들은 그 안에서 저항하기도 하고, 조용히 동참하기도 하며 적극적으로 투항하기도 한다. 작품 속에서 인간은 구조로부터 자유로운 행위자나 그 구조에 맞서 투쟁하는 주체라기보다 차라리 끊임없이 물화되는 하나의 상품으로 등장한다. 이를 통해 그녀는 인격적 차이를 지워버리며 오로지 교환가치만을 셈하는 자본의 폭력적인 성격을 그 누구보다 예리하게 드러내지만, 독자들은 그 세계에 기거하는 인물들에게 여하한 종류의 감동도 받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말했듯 인물들은 대개 상품의 의인화된 형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고은의 소설을 읽을 때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서는 곤란하며 차라리 상품들을 생산해내고 유통시키는 자본의 운동을 읽어내야 한다. 그녀는 이 운동이 빚어내는 파동을 섬세하게 포착함으로써 우리가 견뎌야 하는 세계의 모순을 지성적으로 전달한다.

물론 우리는 자본의 폭력이 현재 우리가 당면한 세계의 폭력을 야기하는 유일한 원천이 아니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토대에 대한 분석만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결정적인 모든 것에 대해 다 말했다는 환상에 굴복”해서도 안될 것이다.15)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불가해한 세계의 운명적 원리인 양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우리가 마주하고 견뎌야 하는 세계의 기본적인 면모를 파악하려는 데 있어 자본주의는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아포리아임은 말할 것도 없다.

 

 

4. 나가며

 

이 글을 시작하면서 의연하고 깊은 호흡으로 희망의 싹을 돋우어내는 작업의 소중함을 인식하는 것과 동시에 어떠한 종류의 희망(의 생산)과도 무관한 자리에서 삶을 견딘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소설적 작업에도 주목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여기서 다룬 것은 그것의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예일 뿐이다. 앞에서 살펴본 작품들은 어떤 희망의 말을 전달하기보다 우리를 둘러싼 절망감의 출처를 핍진하게 심문한다. 그것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삶의 지반에 대한 절망이며, 폭력적인 세계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구축하려 했던 주체의 기획이 그저 기만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절망인 동시에 삶의 영토가 자본에 의해 식민화되어 인간이 그저 상품처럼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이 가져온 절망이다. 하지만 이 소설들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절망에 대한 인식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가로막는 것으로만 기능한다면 그 절망을 핍진하게 그려내는 작업이 성공을 거듭할수록 우리에게는 실패의 경험만이 축적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까지 살펴본 소설들은 그 절망이 희망의 “아주 없음”의 상태를 뜻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있지 않음”의 상태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16) ‘아주 없음’이 완료형이라면 ‘있지 않음’은 진행형이다. ‘아주 없음’이 텅 비어버려 어떠한 희망의 기미도 찾아볼 수 없는 닫힌 상태에 대한 진술이라면 ‘있지 않음’은 비록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지금 있지 않을 뿐이며 가까운 미래에 다시 희망으로 채워질 수 있으리란 잠재성을 내포한다. 가령 「산책자의 행복」에서 라오슈가 처한 절망적 상황은 그 자체로 희망의 ‘아주 없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정직한 절망이야말로 기만적인 희망에 의해 덧입혀진 허위의 당의(糖衣)를 깨부수어버림으로써 삶을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생성시킬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라오슈의 처절한 절규는 희망의 ‘아주 없음’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을 미래로 열어놓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의 상품으로 변해 시장 한복판에 던져진 인간의 모습을 알레고리적으로 그려낸 윤고은의 작업 역시 자본주의의 힘을 절대적인 것으로 과장함으로써 인간의 저항 가능성과 체제의 변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시켰다는 한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비록 작가가 적극적으로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자본의 논리가 전일적으로 지배되는 양상을 세밀하게 그리면 그릴수록 자본주의는 더욱 완벽하고 거대한 체계로 나타나며 그 안에서 인간은 극단적인 수동성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이는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사회는 ‘아주 없다’는 식의 절망과 연결되기 쉽다.

그럼에도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 형상화를 끊임없이 시도하는 윤고은의 작업이 새로운 세계가 ‘아주 없는’ 게 아니라 아직 ‘있지 않은’ 것일 수 있다는 인식에 적대적인 것만은 아니다. 자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무한한 선택지를 제시하며 각종 휘황찬란한 상품들로 풍요의 환상을 고취시킨다. 윤고은은 그러한 선택과 풍요의 댓가가 무엇인지 그려냄으로써 자칫 기만적으로 체제에 만족해버리기 쉬운 우리의 의표를 날카롭게 찌른다. 이는 독자들을 자본의 전일성에 대한 절망으로 이끌기보다 자본에 의해 식민화된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환기시키는 데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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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해진 「산책자의 행복」, 『창작과비평』 2016년 봄호. 이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기.

2) 하지만 메이린의 불안이 이방인이라는 그녀의 존재조건에서 오롯이 유래하는 것은 아니다. 메이린은 친구 이선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계기로 죽음에 관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되는데 그녀가 느끼는 삶의 불안은 상당부분 이러한 트라우마로부터 유래한다. 맹정현은 “이 세상의 무대에서 누군가가 그냥 퇴장해버리는 것만큼 남아 있는 자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도 없다.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살아 있는 것에 죄의식을 느낄 뿐만 아니라 살아 있음, 살아남아 있음의 의미를 납득하지 못하기도 한다”라고 적고 있는데, 친구 이선의 갑작스런 자살 이후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무력한 절망”에 휩싸이는 메이린의 모습은 그녀의 불안이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생긴 트라우마의 증상임을 알려준다.(맹정현 『트라우마 이후의 삶』, 책담 2015, 19면, 146~47면)

3)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정일준 옮김, 새물결 2008, 32면.

4) 같은 책 223면.

5) 강명관 『침묵의 공장』, 천년의 상상 2013, 12~13면.

6) 지그문트 바우만, 앞의 책 133면.

7) 물론 ‘쓰레기’로 내몰린 사람들은 “자신이 설계 때문에 고통받는 것인지 아니면 태만 때문에 비참해진 것인지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구별하기 위해 깊이 생각하고 음미할 이유가” 없다는 바우만의 말을 떠올려보면, 거론한 작품의 한계는 쓰레기로 내몰린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지니는 어떤 특징을 핍진하게 형상화한 데 따르는 댓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우만은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판결에 굴복한다면 (…) 효과적인 행동으로 재창조할 수 있는 길을 찾기는 너무나 어렵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지그문트 바우만, 앞의 책 81~82면)

8) 칼 마르크스 『자본론 I(상)』,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03, 51면.

9) 물론 인간(노동자)을 상품화하는 것에 대한 비판은 산업화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가령 박노해는 일찍이 「바겐세일」에서 “에라 씨팔/나도 바겐세일이다/3,500원도 좋고 3,000원도 좋으니 팔려가라/바겐세일로 바겐세일로/다만, 내 이 슬픔도 절망도 분노까지 함께 사야 돼!”라며 상품화되어 팔려나가는 노동자의 슬픔과 분노를 표출한 바 있다(『노동의 새벽』 풀빛 1984). 그런데 윤고은의 소설에서 주목할 것은 거기에는 이러한 “슬픔” “절망” “분노”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박노해의 시에서 노동자는 상품으로 취급되는 자신의 상황을 반성적으로 인식하고 그에 대해 절망하고 슬퍼하고 분노하는 감정을 드러내고 있지만 윤고은의 경우에 인간은 거의 완벽한 상품으로 변했기에 더는 그러한 인간적인 감정을 표출하지 않는다. 이는 박노해의 시간보다 현재 우리의 시간이 더 자본에 의해 강하게 침윤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징후라고 볼 수 있다.

10) 윤고은 「월리를 찾아라」, 『알로하』, 창비 2014. 이하 이 책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기.

11) 칼 마르크스, 앞의 책 51면.

12) 기업사회에 관해서는 김동춘의 『1997년 이후 한국 사회의 성찰기업사회로의 변환과 과제』, 도서출판 길 2006 참조.

13) 칼 마르크스, 앞의 책 51면.

14) 칼 마르크스, 같은 면.

15) 미하엘 하인리히 『새로운 자본 읽기』, 김강기명 옮김, 꾸리에 2015, 21면.

16) 한기욱은 「문학의 열린 길」(『창작과비평』 2016년 봄호)에서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의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문학뿐 아니라 사랑을 포함해서 삶의 가장 소중한 것들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인 일종의 아토포스의 상태에서 이루어진다”(77면)라고 적은 바 있다. 이는 소설에 등장한 “아주 없음”과 “있지 않음”의 구분이 지닌 묘미를 적실하게 포착한 진술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을 위에서 살펴본 소설들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비록 그 소설들이 문면에서는 희망과 더 나은 세계를 도래하게 할 의지가 ‘아주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그것은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