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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스탠리 카벨 『눈에 비치는 세계: 영화의 존재론에 대한 성찰』, 이모션북스 2014

전통예술로서의 영화

 

 

이정진 李廷進

서울대 영문과 강사 godard1@naver.com

 

 

167촌평-이정진_fmt영화서적으로 한정해 본다면, 저명한 미국 철학자 스탠리 카벨(Stanley Cavell)의 이 독특한 책은 무엇보다도 고전기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열렬한 예찬이다. 카벨은 고전기 할리우드야말로 영화라는 독자적인 예술매체의 본래적 가능성을 충실히 구현한 작품을 생산했다고 본다. 종종 각종 뉴웨이브 영화사조들에 대한 편견을 내비치기도 하지만, 그의 주장은 영화의 본질 자체에 대한 상당히 (도발적이면서도) 독창적인 이론적 가설에 근거하고 있다.

그의 논점 중에서 각별히 흥미로우면서도 전체 논의의 출발점이 되는 생각은 영화의 발명이 서구 정신사의 근본적 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이전 시기 예술가들에 의해 예고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발상을 뒷받침하기 위해 카벨은 시시때때로 여타 예술장르와 영화의 관계에 대한 정교한 사유를 제시하는데, 그의 논의는 끊임없이 장르 간 경계가 재조정되는 현대예술의 상황을 탐구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참조대상이 될 만하다.

그래도 이 책은 기본적으로 영화서적이다. 카벨은 이 책이 출간될 당시(초판은 1971년에, 보론을 포함한 이 번역서의 원본은 1979년에 출간. 한국어판 이두희·박진희 옮김) 막 제도화되고 있던 영화학을 강하게 의식하면서 그 주류입장을 논박하는 한편 영화사적으로 중요한 다수의 영화에 대한 자못 논쟁적인 비평을 제출한다.

카벨이 영화의 본질을 해명하는 키워드는 ‘오토머티즘’(automatism)이다. 흔히 초현실주의 계열의 창작자들이 시도했던 실험적 기법을 총칭하는 이 용어로 그가 가리키는 바는 영화의 물리적 기반인 사진 이미지가 생산되는 방식이다. 영화예술의 절대적인 성립근거가 사진 이미지라는 사실을 강조할 때 카벨은 (사진) 이미지의 회화적인 조작 가능성으로부터 영화‘예술’이 탄생한다는 영화이론의 지배적 입장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카벨의 입장이 영화이론의 또다른 전통이라 할, 바쟁(A. Bazin) 식의 리얼리즘에 대한 지지도 아니다. 그에게 사진 이미지의 의의는 현실의 특정 대상에 대한 재현적 진실이 아니라 현실 일반과 인간의 주관성 간의 안정적인 관계를 보장하는 데 있다. 카벨은 근대정신의 지배적 경향이라 할 회의주의로 말미암아 인간의 주관성이 세계로부터 소외되었다고 보며, 서구 근대의 온갖 지적·예술적 사조를 이 정신사적 위기에 대한 각기 다른 대응방식으로 정리한다. 그 귀결이라 할 모더니즘 예술의 전략은 표현매체 자체의 물질성에 집중하는 것인데, 카벨은 이렇듯 관여하는 ‘리얼리티’를 축소시키는 현대예술의 경향성에 공감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그런 현상을 예술의 상실로 본다.

그런데 사진과 사진의 확장인 영화가 출현함으로써 근대인의 의식을 일거에 주관성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 핵심 대목의 논의를 본 서평에서 충실히 전달하는 것은 무리이지 싶은데, 카벨은 사진 이미지가 주관성의 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기계적인 생산 메커니즘(오토머티즘)으로 인하여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세계의 현전(現前)에 대한 확신을 준다고 보는 듯하다. 이때 그는 이미 책의 제목이 강하게 시사하는바 창작자가 아니라 감상자의 입장에서 사태를 검토하며, 각별히 사진 이미지와 그 감상자 간의 시공간적 단절을 강조한다. 그리고 다른 예술, 특히 극예술과의 비교를 통해 사진과 영화에서 ‘보는 자’는 부재한다고까지 선언한다. 선명한 듯 들리지만 실상 상당히 모호한 이 테제가 함의하는 바는 사진 이미지가 마치 보는 자에 앞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연물처럼 여겨진다는 것이지 싶다.

확실히 카벨이 전개하는 영화의 존재론은 영화에 예술의 지위를 부여하기 위해 주로 동원되어온 작가주의 비평담론에 정면으로 배치될 뿐 아니라 복잡한 영화제작 과정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에도 어긋난다. 우호적으로 보자면, 카벨은 한동안 모더니즘이라는 근대예술의 일반적인 운명에서 벗어나 있었던 영화의 대중예술적 성격을 옹호하기 위해 일종의 ‘이론적 픽션’을 창안해냈다고 할 수도 있다. 자신을 대성당의 건축을 지휘하는 대목장(大木匠)에 비유하는 베리만(E. I. Bergman)의 발언이 중요하게 언급되기도 하는바 카벨에게 할리우드 고전기 영화는 예술적 자의식에 갇혀 협소해진 선배 예술들을 대신해 문명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을 누구나 몰입할 수 있는 강렬한 방식으로 극화한 현대의 ‘전통예술’이었다. 어쩌면 이 책의 백미는 한때 오락거리로 치부된 장르영화의 대표작들에 담긴 이런 신화적 차원에 대한 탐구이지 싶다. 지면관계상 내용소개는 어렵겠지만 카벨 스스로도 보론에서 신화적이라고 명명한 그의 비평 접근법이 대번에 로런스(D. H. Lawrence)나 피들러(L. A. Fiedler)를 연상시킨다는 것을 언급할 필요는 있겠다. 카벨 또한 미국영화에 거듭 나타나는 ‘애매함’(inexplicitness)을,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나름껏 말하는 방식으로 옹호하는 것이다.

한편 흔히 영화에 대한 학적인 탐구를 정당화하는 데 동원되는 대표적 영화작가들에 대한 카벨의 평가는 몹시 박하다. 예컨대 영화를 지적인 매체로 탈바꿈시키고자 했던 고다르( J. L. Godard)는 지적인 과시 뒤로 심각한 냉소와 윤리적 무관심을 감추고 있으며, 고전적인 풍모를 띠는 듯한 히치콕(A. Hitchcock)의 영화는 실상 고전기 할리우드에 대한 노련한 패러디로서 인간심리를 몇몇 패턴화된 트라우마의 작용으로 환원함으로써 남녀관계에서 열정을 제거해버렸다는 것이다.

이렇듯 저자는 상당히 편벽된 면이 있고 바로 그래서 재미있는 의견들을 내놓지만 이 책의 전체적인 논의구조는 불안정한 편이며 때로는 자기모순으로 치닫기도 하는데, 그 모든 문제는 앞서 요약한 영화의 존재론에서 비롯된다. 예리한 독자라면 이 서평만으로도 카벨이 규정하는 영화의 본질과 고전기 할리우드의 신화적 경향 간에 필연적인 내적 연관성을 설정하기 어렵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사실 저자도 이 문제를 의식해서 피사체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는 ‘배우의 존재론’을 전개하는 한편, 그가 ‘전형(type)’이라고 부르는, 미국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유형과, 근대성의 부담을 예리하게 의식한 보들레르 같은 19세기 작가들을 매혹시킨 모티프 간의 유사성을 밝히면서 이 허점을 감추려고 한다. 그 와중에 사물과 인간을 평등화하는 사진의 논리가 버스터 키튼(Buster Keaton)의 코미디 영화에서 관철되고 있다는 설득력있는 통찰이 제시되기도 하지만, 그의 복잡한 논의는 ‘당신이 말하는 영화의 존재론은 결국 영화 간의 차이를 무화시키는 게 아니냐’는 단순한 반박 앞에서 무력해진다. 이런 반박이 무식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카벨 본인이 철학자다운 성실함으로 이런 자기 가설의 논리적 귀결과 대면한다. 사실 그 문제를 회피할 경우 이 책에서 그가 하는 작업, 즉 개별 영화에 대한 평가가 부정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책의 후반부에 가면 오토머티즘은 (예술 일반에서 기본적인 관습의 숙련이 중요하다는 논의와 더불어) 창작‘행위’의 측면까지 포괄하는 방향으로 의미가 조정된다. 더 나아가 그는 보론을 통해 이 책을 둘러싼 논쟁에 성실히 대응하고자 하지만, 애니메이션처럼 사진적인 이미지에 기반하지 않는 영화를 자신의 이론 내에 어떻게 위치지을 것인가 하는 곤혹스러운 문제에 대해서는 끝내 얼버무리고 만다는 것이 나의 관전평이다. 영화든 뭐든 예술의 ‘일반이론’이라는 게 존재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 새삼 확인되는 순간이다. 그렇지만 영화철학자가 아니라 열렬한 영화애호가로서의 카벨은 신선하고 흥미로운 생각들로 독자를 자극하는 저자임에 틀림없다.

번역에 대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원문의 의미 자체를 잘못 파악한 경우가 심각할 정도로 자주 눈에 띈다. 예컨대, “어떻게 해서 내가 「스테이지 도어」의 캐서린 헵번에 대한 참조를 생각해냈는지”(10면)라고 옮긴 대목은 “어떻게 해서 내가 캐서린 헵번이 「스테이지 도어」를 언급한다고 생각하게(지어내게) 되었는지”라고 옮겨야 한다(원문: “How I could have made up Katharine Hepburns reference to Stage Door”). 현재의 번역상태로는 그 자체로 이해하기 어렵기에 조속히 전면적인 개정판이 나오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