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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리얼리티 탐구의 문학적 형식들

 

육체성의 형식과 리얼리티

김엄지와 최은영의 소설들

 

 

정주아 鄭珠娥

문학평론가. 저서로 『서북문학과 로컬리티』 등이 있음. jjua@kangwon.ac.kr

 

 

1. 리얼리티, 형식, 시선

 

내전 중인 스페인 게르니까(Guernica)에 가해진 나치의 폭격으로 천오백여명의 시민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삐까소(P. Picasso)는 「게르니까」를 그렸다고 한다. 이 그림에는 스페인을 상징하는 황소부터 아이를 안고 절규하는 여인, 사지가 찢겨나간 병사 등이 등장한다. 살아남은 모든 것은 제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울부짖고 있다. 부서지고 불타는 잔해 위로 온전한 형태를 갖춘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이 그림에서 스페인내전과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생생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림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여기에 전쟁 ‘일반’의 참상은 있어도 ‘게르니까 폭격’의 참상을 한정할 만한 특수성은 없다. 그렇다면 이 그림의 실감 혹은 현장성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그것은 ‘게르니까’라는 제목에 의해 유도된 지식과 정보가 만들어낸 환상통의 일종일까?


이러한 일련의 질문은 대답을 얻기는커녕 단지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불편한 느낌을 준다. 누군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대체 ‘일반’과 ‘특수’를, ‘생생함’을 논한다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 리얼리티는 비단 현실을 꼭 닮은 모사물에 찬사를 보낼 때 동원되는 수사 따위가 아니다. 현실, 실재, 실제 등 리얼리티의 번역에서 파생된 말들은 많지만, 지금 이 글의 맥락에서 ‘리얼리티’(reality)는 우리가 놓인 세계와 그 재현이라 할 문학을 넘나들 수 있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만일 우리가 지금 리얼리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면 절망과 분노로 가득한 세계, 그 세계를 허구로써 재현해야만 하는 문학이 느끼는 무력감 때문은 아닐까. 다시 말해 생생한 고통으로 육박해오지만, 무엇이라 정확히 말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괴물을 응대하는 문학적 현실이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느냐는 자문 때문이겠다.


리얼리티는 정의하기 어려운 단어지만, 결국 리얼리티는 ‘리얼’(real)이 있어야 생겨난다. 문제는 리얼이란 다만 ‘있음에 대한 환상’일 뿐 결국은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의견이 대다수라는 사실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문학적 리얼리티를 구현하려면 자가당착에 빠진다. 알 수 없는 것을 향해 ‘실감’을 요구하고, ‘진짜 같은 것’을 따지니 말이다. 그러므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들고, 공백에 육체성을 부여하려 드는 리얼리티란 ‘모순’이거나 ‘조작’이다. 결국 문학적 리얼리티는 어떤 자기부정적 욕망이라 이해할 수밖에 없다. 가상, 관념, 거짓 등 타고난 자질이 부여한 존재방식을 거부하고 현실, 실재, 참 같은 정반대의 자질로 자신을 대체하려는 부정적 욕망을 지닌다는 뜻이다. 자기 밖에 존재할 현실을 움켜쥐게 되면 자신의 결핍을 채울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이다. 때문에 문학적 리얼리티의 창조는 언제나 형식에 대한 고민으로 연결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해줄 가장 유효적절한 형식에 대한 고민. 그래서 전통적으로 형식이란 무질서에 질서와 필연성을 불어넣는 작업으로 정의되어왔다.


그러나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눈앞에 육박해오는 개별자들의 고통만이 난무하는, 그야말로 무질서와 우연성으로 가득한 세계 어디에서 질서와 필연성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난제에서 벗어날 탈출구를 찾기 위해 다시 한번 「게르니까」로 돌아가보기로 하자. 이 그림은, 자신이 놓인 현재를 사실적으로 재현해야 한다는 강박을 짊어진 작가가 겪는 내적 모순이 곧 작품의 형식과 동의어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너무나 명백하게도, 자기 스스로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때문에 저 절단된 신체와 감기지 못한 눈은, 전체의 형상을 그려내려는 외부의 눈에 의해 그려진 것이다. 그러나 다만 그 신체들이 파편으로밖에 그려지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이러니하게도 파편성은 외부의 눈이 되기를 거부하려는 의지의 결과다. 작가는 참극의 현장을 관망하듯 굽어보는 태도, 즉 전체를 포괄하는 시선을 얻으려면 필연적으로 확보해야만 하는 시선의 높이를 포기하고 만다. 현장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태도가 파편을 만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를 그려내야 한다는 의무감이 파편의 배치를 완성한다.


형식은 무질서와 우연성 속에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자리를 잡느냐(positioning)의 문제다. 현실을 보는 태도의 정립 문제고, 어떤 육체로 존재할 것이냐의 문제다. 이 때문에 형식에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기까지 방황을 거듭한 작가의 시선이 담기게 마련이다. “형상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판결하는 힘”이고 나아가 “윤리적인 것”이 된다는1) 단언은, 작가의 시선이 왜 의식적인 행위가 되는지를 설명해준다. 만일 시공간을 초월하여 저 그림으로부터 어떤 ‘생생한 현실’을 느낀다면, 어떤 죽음도 ‘일반’이라는 범주로 보편화될 수는 없고 개별자가 처한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선이 그 참극의 현장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대상을 향한 시선과 그 시선에 담긴 의지가, 시공간을 넘어 찢긴 육체의 고통을 느끼고 원망에 찬 절규를 듣게 한다. 관객의 시선과 의지를 맞받는 작품의 자리에는, 형식을 통해 관객의 시선을 이끌고 시야를 제공하는 작가의 시선과 의지가 놓여 있다.


이 글은 우리 시대의 젊은 작가들이 그려낸 현실을, 이들이 만들어낸 형식과 그 형식을 낳은 시선의 의지라는 맥락에서 이야기한 것이다. 2010년 이후 등단한 작가 중 특히 김엄지와 최은영(崔恩榮)의 소설들을 다룬다. 두 작가의 이력을 평균 내보면 나이는 서른, 등단 햇수로는 5년 정도가 된다. 생물학적 연령 면에서나 등단 경력으로 보아 이들은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가 직면한 현실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특히 이들 두 작가의 작품을 고른 이유가 있는데, 이들이 완전히 상반된 창작 스타일을 지녔기 때문이다. 김엄지는 구성이나 표현 면에서 인위적인 조형감각을 보여주는 작가다. 반면 최은영은 주인공의 삶에 얽힌 사연으로 서사를 진행하는 스토리 중심의 작가다. 요컨대 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김엄지는 ‘어려운 소설’을 쓰고 최은영은 ‘쉬운 소설’을 쓴다. 아마도 두 사람의 소설을 통해 우리는 리얼리티란 현실을 그대로 모사하는 데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수한 기교를 동원해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만들어낸 시선과 형식이 어떤 자기부정적 욕망 속에서 탄생하고 육체를 갖게 되는가에 있다. 물론 서로 상반된 스타일을 지닌 두 작가를 통해 우리 문단이 보유한 시선의 스펙트럼과 현실감각의 외연을 가늠해볼 수도 있겠다.

 


 

2. ‘살덩어리’의 침묵: 분노 이후의 분노

 

언제부터인가 서사의 약화 혹은 파괴는 젊은 세대의 소설이 지니는 특권이자 특징이 된 것처럼 보인다. 세상의 부조리를 향한 분노와 조롱을 격정적인 감정 그 자체로 표현하거나, 도무지 방향이 없는 사유의 흐름을 고스란히 문장으로 담아내는 가운데 플롯이나 사건은 부차적인 것이 되기 일쑤였다. 이 가운데 젊은 세대의 창작 경향을 좀더 전형적으로 보여준 것은 전자가 아니었나 싶다. 많은 작가들이 감정을 여과하고 절제하려는 장치를 개입시키기보다 날것 그대로의 분노나 슬픔을 쏟아내는 편을 택했다. 거친 단어와 자의식이 넘쳐나는 서술을 따라 읽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듯 노골적인 감정은 가장 현실에 가깝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분노는 대상이 필요한 감정이다. 그들은 무엇에 분노하는가. 3포세대, IMF세대, n포세대 등 젊은 세대에게 쏟아지는 언어유희인지 분석인지 모를 규정들, 객관성을 내세운 폭력적인 규정들 속에서 꼼짝없이 분석대상이 되어 모멸감을 감내해야 하는 당사자들의 심정이 이러한 분노의 출발점이다. 이 분노는 책임을 숨기고 근엄한 표정으로 일관하는 기성세대를 향한다. 기성세대의 위선에 찬 표정이 젊은 세대에게는 현실의 가장 구체적인 형상이다. 이 경우 분노는 즉자적인 감정이 아니라 현실을 향한 시선 속에서 마련된 의식적인 형식이다.


젊은 작가군 중에서도 우리가 김엄지를 주목해야 한다면, 이는 무엇보다도 그녀가 보여주는 탁월한 분노 조절 방식 때문이 아닐까 한다. “축생(畜生)을 즐기고 있는 것”2)이라든가, “견딘다는 의식마저도 없는 채로 살아가는 ‘인간동물’들의 이야기”3)라는 평들이 보여주듯, 그녀의 소설은 뜨거운 분노도 차가운 이성도 아닌 바로 물질적인 육체의 차원에서 발화되는 언어다. 감정도 사유도 없이 다만 ‘있음’으로 존재하는 ‘살덩어리’가 만들어내는 섬뜩함과 역겨움이 그녀의 소설을 관통한다.


등단작인 「돼지우리」의 한 장면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시답지 않은 직장에 취업하느니 차라리 고깃집에 취직하기를 선택한 졸업반 여대생이 있다. 채용의 조건은 이상하게도 고기를 무조건 많이 먹는 것이다. 김엄지의 소설에서 줄거리라든가 개연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고기를 삼킬 때 성적인 희열을 느낀다며 폭식하는 여대생과, 인간의 탈을 썼지만 본질은 돼지인 사람을 변별하는 감식안을 가졌다는 고깃집 사장, 폭식하는 여대생을 보며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그녀의 친구 등 세 사람이 한 테이블에 둘러앉은 광경이 핵심이다. 소설의 화자, 즉 주인공의 친구는 사장에게 간곡히 묻는다.

 


사장님, 그럼 저는 어떤가요? 저는 어디가 돼지인가요? (…) 아니나 다를까, 사장은 어디 볼까, 하며 운을 떼었다. 볼따구도 퉁퉁하고, 좋아. 사장은 내 볼을 꼬집었다. 배따구도 탕탕하고, 좋아. 사장은 내 배를 꼬집었다. 다리통도 튼실하구먼, 좋아!…… 그런데 자네는…… 돼지가 아니야. 사장은 먼지를 털듯 내 어깨를 두드렸다. 뜻밖이었다. 백 퍼센트 돼지라는 대답하에, 나의 어느 부위가 돼지로 보이는가를 묻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람도 아니야, 이건 뭐…… 사장은 머리부터 꼬꾸라졌다. 괜히 물어봤다. (…) 나는 내 잔을 다시 채운다. 소주잔 속에 비친 내 코가 들렁 올라가 있다. 사장이 틀렸다. 잔을 드는 내 손가락들이 두개씩 붙어, 완벽한 돼지 족이다.4)

 


돼지이길 원했던 화자가, 돼지도 사람도 아닌 그 무엇으로 남아버린 씁쓸함을 되씹는 장면에서 이 소설은 끝난다. 돼지가 못 되어서 아쉽다면서. 돼지, 벌레, 개 등 인간의 속물성을 나타내는 비유들은 많지만, 이 장면의 흥미로움은 비유법이 아니라 ‘나는 돼지가 되겠다’는 발화 방식이 지닌 낯섦에 있다. 주지하듯, ‘나는 돼지다’라는 정언명제는 자신의 속물성을 반성하는 데서 나온다. 그러나 ‘돼지가 되겠다’는 발화는 의지를 표명한다. 이 문맥에서 돼지가 반이성적 존재로 취급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반이성적 존재가 되려는 이성적 의지라는 모순이 생겨난다. 이 내부의 모순으로부터 김엄지의 소설세계를 읽어나가보자. 왜 하필 돼지가 되려는지 전후 맥락을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 이후에는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반이성적 존재가 되려는 이성적 의지 사이에 놓인 간극, 즉 불가능한 바람임을 알면서도 그러한 의지를 표명하는 간극에서 나타나는 형식과 그 의미에 대해서 말이다.


우선 김엄지의 소설이 왜 하필 동물적인 삶을 선택했는가를 묻자. 앞서 살폈듯이 동물적인 삶이란 처참하다. 이때 처참하다는 것은 ‘동물적인 삶’의 발상과 지향을 두루 의식한 표현이다. 진짜 돼지라 인정받으며 역설적인 의미에서 ‘신의 직장’에 취직한 「돼지우리」의 주인공은 여대생이다. 대학생이자 여성, 굳이 최근에 벌어졌던 온갖 사회적 추문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들이 대한민국을 잠식한 이른바 ‘갑질’의 횡포에 ‘육체적으로’ 가장 취약한 위치에 놓여 있음을 알아채기는 어렵지 않다. 도축업자이자 고기 판매자가 사장으로 등장하는 고깃집 ‘돼지우리’가 온갖 계층·계급 간 갈등과 폭력이 위험수위에 다다른 현 대한민국의 축도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돼지우리’로 걸어들어간 여학생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녀는 ‘누가 본래 돼지인지를 기가 막히게 알아본다’는 고깃집 사장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으며, 그의 안목을 입증하듯 끊임없이 고깃점을 삼킨다. 분명 이러한 일련의 장면들은 외설적이고, 보통의 주인공이라면 모멸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김엄지의 특수함은 이 대목에서 출현한다. 이 외설적인 장면에서 모멸감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정작 당사자는 외설적 장면을 즐긴다. 그리고 이 장면을 지켜보던 작중 화자는 화룡점정을 찍는다. 나는 차라리 그녀가 부럽다고 말이다.


지금 이 작가는 시위를 하는 중이다. 앞서 말한 ‘돼지가 되겠다’는 발화 방식의 흥미로움에 대해 좀더 부연해보자. 의지의 표명은 항상 청자를 염두에 둔다. 홀로 있으면 단식이 시위의 수단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지의 표명은 그에 반응하는 관객을 필요로 한다. 그녀가 무엇을 향해 시위를 벌이는지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다. 아니, 어쩌면 너무나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기계부품처럼 혹은 사육당하는 가축처럼 살아가기를 요구하는 제도에 대한 절망, 그러면서도 ‘제 살길은 제가 찾고, 제 몸도 제가 지켜야 한다’고 훈계하는 사회를 향한 시위인 것이다. 그러나 더 나쁜 것은, 시위의 주제와 분노의 대상을 너무나도 ‘쉽게’ 안다는 사태 자체에 있다. 모두 ‘안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 이 작가에게는 이성의 무력함이 곧 구체적 현실이다. 그러므로 이 작가에게는 분노 이후의 분노를 표현하는 형식이 필요하다. 동물적 육체의 형식, 모든 것을 포기한, 이른바 ‘개돼지’로 살아가는 삶의 재현이다.


이렇듯 극단적인 체념 뒤에 깊은 분노를 억누르는 상처받은 영혼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최근 발표한 중편 「비오는 거리」(『창작과비평』 2016년 가을호, 이하 면수만 표기)의 설정을 살펴보자. 이 소설의 주인공은 실연한 이후에 계속해서 그 원인을 생각하느라 미치기 직전이거나 혹은 미쳤을지도 모르는 남자 ‘A’와 이혼 후의 상실감과 암담함을 다스리느라 애를 먹는 여자 ‘경선’ 두 사람이다. A는 “나는 무엇이라도 멈춰야 한다. 눈물보다 생각을 멈춰야 한다.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290면)며 초조해하고, 경선은 괜찮은 척 자신의 감정을 위장하는 일에 지친 나머지 “난 외롭다기보다 지겨워”(313면)라고 토로한다. 이 소설의 표제이기도 한 ‘비오는 거리’는, 이들이 경계하면서도 동시에 동경하는 어떤 장소로 등장한다. 분노, 광기, 고백 등 억눌린 것이라면 무엇이든 쏟아내도 좋은,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금기시하는 그 어떤 장소를 가리킨다. 답답한 심정을 쏟아낼 곳이 절실했던 나머지 ‘비오는 거리’로 가려는 경선에게 그녀의 선배는 냉정히 말한다.

 


경선아. 너 정신 차려. 네가 지금 비오는 거리 이야기할 때니? 비오는 거리는 십대 아이들이 노는 곳이야. 지나가는 세간의 가십이야. 너는 비오는 거리에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관심 가져서도 안 돼. 너 같은 사람이 진짜 있기는 하구나. 비오는 거리에 가자는 말 너한테 지금 처음 들었어. 다른 사람한테 비오는 거리 같이 가자고 하지 마.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343면)

 

세상에 대해 분노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광기, 그것은 ‘십대 아이들’의 주제이자 ‘세간의 가십’이라는 것. 이러한 충고가 선배가 속해 있을 ‘어른들의 세계’로부터 흘러나온다. 덕분에 이 소설은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감정과 생각의 누출을 막으려는 간절한 노력의 보고서가 된다. 한때의 방황을 인정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완강함, 이는 감정과 사고를 거세한 ‘동물이 되라’는 주문과 다를 바 없다. 감정을 소거하라 말하는 세계를 향한 거부감은 비단 김엄지의 소설에서만 감지되는 것은 아니다. 김금희(金錦姬)의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창비 2014)은, 그 표제에서 느껴지듯 ‘이제 그만할 때도 되었다’며 젊은 세대에게 쏟아지는 훈계를 대변하고 있지 않은가.


힘든 현실을 견디느니 차라리 ‘살덩어리’로, 그저 육체를 가진 동물로 사는 편이 낫겠다는 태도를 두고, 자포자기 혹은 손쉬운 투항이라 쉽게 비난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돼지가 되겠다’는 동물적 육체성의 형식에 내포된 모순, 반이성적 존재가 되려는 이성적 의지 사이 간극의 의미를 묻는 일이 긴요할 수도 있겠다. 이 질문은, 저러한 의지 표명의 방식에 대해 가치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그녀의 소설을 좀더 깊게 이해하는 통로를 열어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김엄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뜻 동일해 보이는 질문을 둘로 쪼갰다가 다시 합치는 수고를 해야 할 것 같다. ‘현실이 인간을 동물로 몰아갈 때’라는 전제하에 나올 수 있는 두가지 질문이 있다. 가장 인간답게 사는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혹은 가장 작가답게 사는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똑같은 질문이다. 인간다움과 작가다움이 어떻게 분리될 수 있느냐고 되묻는다면 이 질문은 헛것이 된다. 인간다움이란 곧 동물 같은 삶에 대한 저항이며 그 수행 방식으로서 글쓰기가 있다고 믿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작가의 시선이 인간과 동물의 겹침이라는 현실에 머무르려는 의지를 갖는다면 어떨까. ‘동물 되기’가 곧 동물 같은 삶에 대한 저항이며 그 드러냄의 방식으로서 글쓰기가 있을 수도 있다. 이로써 비속한 굴종은 숭고한 저항이 되고, 인간다움과 작가다움은 다시 만난다.

 


 

3. 유령적 육체의 아이러니: 감정의 폐허에서

 

최은영은 이제 막 첫 소설집 『쇼코의 미소』(문학동네 2016)를 펴낸 신인작가다. 그럼에도 이 작가가 문단에 불러일으킨 반향은 작지 않다. 데뷔작 「쇼코의 미소」(2013)는 이듬해 문학상을 받았고, 심사위원들로부터 고른 호평을 받았다. 물론 이 대목에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그녀의 수상경력보다 그녀의 소설을 환영하는 독자들의 태도이다. 최은영의 소설은 그간 독자들이 원했지만 채우지 못했던 어떤 빈자리를 가리킨다. 물론 그 빈자리는 최은영의 소설로 인해 새삼스럽게 드러난 공백이라고도 하겠다. 굳이 작가나 비평가 같은 전문가 집단이 아니더라도 최은영의 첫 소설집을 펴든 독자라면 곧 그녀의 소설이 지닌 미덕을 알아챌 것이다. 암호처럼 뒤엉킨 기호와 상징, 알 수 없는 말을 읊조리는 인물, 끝없이 이어지는 의식의 흐름 등 일상적 이야기를 좀더 특별하게 혹은 낯설게 만들기 위한 시도들이 그녀의 이야기에는 전혀 없다. 그 대신, 조손(祖孫)이 마주 앉은 남루한 자취방의 풍경, 분신인 양 의지했지만 영문도 모른 채 사이가 멀어졌던 친구의 마지막 모습 등이 등장한다. 꾸미지 않은 차림새로 일상적인 대화를 건네는 이야기를 읽다보면 독자 역시 무장해제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최은영의 소설은, 소설이란 본래 밑줄을 그어가며 읽는 것이 아니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준 셈이다.


그러므로 최은영 소설의 담백함은, 독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주 낯익은 것이다. 소설작법이라는 측면에서 이 ‘낯익음’을 설명하자면, 현실의 재현과 그를 통한 파토스(phathos, 감정)의 전달쯤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즉 묘사와 서술을 통해 독자들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움직인다는 의미다. 최은영의 소설에는 박완서(朴婉緖), 양귀자(貴子), 신경숙(申京淑) 등으로 이어지는, ‘힘을 뺀 서술’로 도리어 독자들의 감정을 흔들었던 작가들의 흔적이 분명 겹쳐져 있다. 「쇼코의 미소」에 등장하는 조부와 손녀의 대화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어려서부터 자신이 키우다시피 한 손녀와 마주 앉은 노인이 있다. 의사에게 장차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듣고 보니 손녀가 더 눈에 밟힌다. 그는 손녀가 거주하는 비좁은 고시원을 보고 할 말을 잃는다. 대학 졸업 후 영화 시나리오를 쓰겠다고 고집하며 자취생활을 해온 손녀는 갑작스런 조부의 방문에 당황한다. 실로 오랜만의 만남이지만 자꾸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기까지 한 말투가 튀어나온다. 이렇듯 서로 어긋나기만 하는 대화에 담긴 여러겹의 감정을 감지하지 못할 독자가 있을까. 걱정, 근심, 사랑, 염려, 고마움, 미안함 등. 물론 그 감정의 결을 확정하는 단계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전통적인 소설작법’의 맥락에서 최은영의 소설은 감정을 절제하면서 동시에 감정을 끌어내는 기본 원리를 충실히 따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최은영의 소설을 계기로 확인하게 된 우리 내부의 빈자리의 성격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모든 복고적인 현상이 그러하듯, 문제는 최은영의 소설이 전통적인 소설작법을 되풀이한다는 사실 자체에 있지 않다. 관건은 그녀의 소설이 어떤 종류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느냐는 것, 그리고 그 향수가 오늘날 우리의 정서와 어떻게 공명하느냐다. 최은영의 소설은 가공되지 않은 일상의 재현과 감정의 전달에 충실하다. 그녀의 소설은 ‘말하지 않아도 마음까지 헤아리는 관계’들, 상대에 대한 호의와 관심 속에 형성되는 감정의 공동체에 의존해 서사를 풀어나간다. 다시 말해,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행간과 침묵만으로도 대화할 수 있는 상대를 향한 발화, 즉 감정의 공동체를 상대로 한 발화인 것이다. 그리고 이 발화의 상대는 친구, 선배, 가족, 이웃, 사회 등으로 확장되어나간다.


감정의 공동체를 향한 향수, 이것은 최은영의 소설 역시 앞서 살핀 김엄지를 비롯한 젊은 작가들의 소설과 동일한 지점에서 결핍을 찾아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문단과 독자들의 관심은 그 결핍이 단지 젊은 작가들의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증거다. 최은영의 소설을 둘러싼 복고적인 향수의 의미를 이해했다면, 이제 우리는 비로소 그녀의 소설이 어떤 형식으로 현실을 드러내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겠다. ‘낯익음’이 새로운 문맥에 배치되었을 때 생겨나는 균열에 대해서, 그리고 그 균열이 가리키는 신경증에 대해 이야기할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다.


친구와 가족의 서사가 만들어낸 따뜻한 분위기에 가려져 있지만, 사실 『쇼코의 미소』에 실린 단편들은 대부분 누군가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사랑한다는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고 잊힌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나’와 쇼코의 우정으로 시작되었던 「쇼코의 미소」는 어느 사이엔가,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알게 된 쇼코와 할아버지 간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씬짜오, 씬짜오」에는 이국에서 만나 피붙이보다 친밀하게 맺어졌던 한국인과 베트남인 가족의 결별이, 그 때문에 단 하나뿐인 친구를 잃고 평생 외롭게 살다 죽음을 맞은 어머니의 에피소드가 있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에는 엄마와 친동기 같았던 순애 이모의 힘겨운 삶과 죽음이, 「먼 곳에서 온 노래」에는 대학 시절 의지했던 선배의 죽음이 등장한다. 「미카엘라」와 「비밀」은 세월호사건을 다루었다.


왜 하필 모두 죽음에 관한 이야기인가. 가슴 아픈 이별이나 죽음은 물론 언제나 문학의 중요한 주제였다. 그럼에도 최은영의 첫 소설집이 총 7편 중 6편에서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사실은 별스럽다. 죽음은 최은영의 소설세계에서 필수적인 요소라는 추측을 해봄직도 하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최은영 소설에 등장하는 ‘나’를 따라가보아야 한다. 그러다보면 누군가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나’는 정작 가장 소외된 존재로 밀려나 있다는 흥미로운 공통점을 깨닫게 된다. 쇼코와 할아버지의 우정을 쳐다보며 제3자의 자리에 서 있는 ‘나’라는 설정처럼 말이다. 이 말은, 거꾸로 뒤집으면 ‘나’가 빠져나간 빈자리를 대신해서 채우고 있는 존재들이 곧 죽어간 이들亡者이라는 의미도 된다. 즉 망자는 작가의 육체가 부재하는 자리를 대신 채우기 위해 의식적으로 소환된 존재들이다.


「한지와 영주」는 이 소설집에서 여러모로 예외적인 작품인데, 유일하게 죽음에 관한 사건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유일하게 ‘나’가 제3자가 아닌 주인공의 자리에서 제 이야기를 꺼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래서일까,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나’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최은영의 소설집에 ‘나’의 관점에서 서술된 이야기가 없는 현상이 우연만은 아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지와 영주」는 프랑스의 수도원에 자원봉사를 나간 한국인인 ‘나’(영주)와 케냐인 ‘한지’ 사이에 싹텄던 우정인지 사랑인지 모를 강력한 끌림에 대한 기록이다. 아래의 내용은, 한지 앞에서는 못할 이야기가 없었던 ‘나’에게 찾아온 어떤 곤혹스러운 순간에 대한 서술이다.


 

그런데도 말문이 막히는 순간들이 있었다.


한지가 내가 사는 곳은 어떤 곳이냐고 물어볼 때라든지, 왜 그렇게 풍요로운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는지에 대해서 물어볼 때 그랬다. 나는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는 대답 대신 나의 할머니, 엄마, 옆집 아주머니가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차라리 그쪽이 한지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더 적합한 것 같아서였다.(144면)

 

이 서술은 최은영 소설에 등장하는 감정의 공동체가 어떤 순간에 출현하는지를 가리킨다. 그녀는 고백한다. ‘나 자신이 속한 시공간과 그곳의 현실에 대한 질문 앞에서는 유독 암담해진다고. 무엇이라 답할지 잘 모르겠고, 또 그런 나 자신이 부끄럽다고. 그래서 대답 대신 나의 할머니, 엄마, 옆집 아주머니가 살아온 이야기를 한다고.’ 두 사람의 대화는 ‘나’로부터 비롯된 시선이 아니라, 거꾸로 밖에서 ‘나’를 바라보는 우회적 시선이 생겨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가족이나 이웃에 관한 이야기는 현실의 형상이 모호할 때, 다시 말해 ‘나’가 속한 시공간에 대해 말하기가 궁색한 순간에 등장하는 알리바이라는 점을 알려주기도 한다.


최은영의 소설은 차라리 ‘감정의 폐허’로부터 태어난 산물이다. ‘나’는 따뜻한 공감과 위로가 가능한 감정의 공동체를 꿈꾸지만 그런 유토피아에 이르는 방법을,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할머니, 엄마, 옆집 아주머니 같은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는 분명 존재했던 것들의 이름”(157~58면)으로 현실을 채울 뿐, 정작 자신의 이름, 자신의 삶을 어떤 모습으로 두어야 할지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 현실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어디에 둘지 결정하지 못해서, 언제나 애매한 위상으로 설정하곤 한다. 왜 그녀가 자꾸 현실을 우회하는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현실은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녀가 외면하는 ‘지금이곳’에는 비좁은 고시원의 쪽방과 그 속에 갇힌 젊은 꿈이 있으며(「쇼코의 미소」), 민주주의를 외치면서도 어린 여자후배를 희롱하며 주정하는 대학선배가 있다(「먼 곳에서 온 노래」).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제 식구 밥벌이도 못하고 엄마를 혹사하면서도 밥상머리에 앉아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아빠가 있고, 그런 아빠를 보면서 “어쩌라는 건가. 아빠, 지금 이 집안을 빈곤 속으로 떨어뜨리는 주범은 세상도 자본도 아니고 아빠 자신이다”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있다(「미카엘라」 225면). 대체 공동체란 무엇이고, 나아가 공동체의 대의란 무엇이란 말인가.


최은영의 소설은 ‘타인’을 향한 따뜻한 시선의 강박에 사로잡혀 이른바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걸려버린, 그래서 정작 현실 속에서 위로를 받아야 할 대상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있는 우울한 세대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물론 최은영의 소설이 ‘나’를 벗어난 ‘타인’의 삶에 시선을 보내고 그로부터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바라보려 노력하는 것은 대단히 소중하다. 그러나 ‘세상에 없는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현실의 고통에 직면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빠져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일종의 역설에 가깝다. 또한 이로부터 우리는 최은영의 소설이 죽음이나 이별을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나’가 뒤로 물러나 있기 때문이며, 대신 친숙하고 비적대적인 사람들의 유령을 불러모아 공감과 위로의 공동체를 그리기 때문이다.


김엄지의 소설이 자기파괴를 통해 현실을 드러내는 반면에 최은영의 소설은 자기보호를 통해 현실을 우회한다. 최은영 소설의 ‘낯익음’은, 그 ‘낯익음’이 투입된 오늘날의 문맥 속에서 읽어보자면 그 자체로 젊은 세대의 소설이 보여주는 하나의 증상이 된다. 공동체에 대한 감각을 구성하고 싶어도 마땅한 단서를 찾지 못하고, 이미 지상에서 사라진 존재들을 소환하여 자신이 속한 시공간의 성격을 설정하는 패턴이 그것이다. 이는 결국 육박하는 현실의 고통을 우회하는 방식, 그러니까 현실에 구속된 ‘나’의 육체를 빠져나온 상태에서만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는 증상을 보여주기에 문제적이다. 요컨대 최은영이 확보한 서사의 육체라든가 시선의 높이는, 자신의 육체를 비운 영혼의 시선, 그러니까 유령의 형식을 통해서만 확보된다.

 


 

4. 조각난 육체와 천개의 시선

 

김엄지와 최은영이 현실을 포착하는 스타일은 아주 대조적이다. 한 사람은 ‘살덩어리’로 살면서 최대한 자신이 놓인 시공간을 체화하려 든다. 현실을 닮겠다는 욕망이 강력한 나머지, 무기력한 살덩어리의 ‘의식’ 자체가 되려고 애를 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써낸 소설에는 알레고리나 상징 같은 가공된 표현이 많지만, 사실 가상의 장치들은 서사(이야기)를 의식한 것이 아니라 실재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려는 의도를 지닌다. 감정이 거세된 ‘둔중한 살덩어리’는 그 결과물이다. 가상을 통해서 가상을 소거하려 드는 모순이 그녀의 소설을 만든 셈이다. 다른 한 사람은 ‘유령’이 되어 최대한 자신이 놓인 시공간을 조감하려 든다. ‘나’보다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한 그녀에게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시선의 높이가 필요한 까닭이다. 그러나 하필 그 형식이 ‘육체성 없는 육체’가 되어버린 것은, 알 수 없는 것을 형상화해야 하는 리얼리티 본연의 모순 때문이다. 자신이 놓인 현실을 그리기 위해서는, 정작 자신을 속박하는 현실의 구속을 빠져나와야만 한다는 모순이 그녀의 소설을 성립시켰다.


이제 우리는 다시 글의 첫머리에서 보았던 「게르니까」의 세계로 돌아왔다. 하나의 온전한 형상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세계, 오로지 분절된 조각으로만 표현할 수 있었던 세계로 말이다. 「게르니까」의 작가는 그림 밖에 서 있었기에 조각난 육체의 파편들을 하나의 평면에 배치할 수 있었다. 만일 우리가 현실의 밖에 설 수 있다면, 아마도 현실의 파편들이 빚어내는 전체의 형상을, 아니면 조각나기 이전의 전체까지도 볼 수 있게 되리라. 땅에 드러누운 살덩어리의 파편이라든가, 현실의 허방을 배회하는 유령의 파편이 아닌 온전한 육체의 형상을.


그러나 불행히도 인간은 현실 밖에 서 있는 신이 아니다. 인간의 수준에서 현실의 최대치에 접근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가장 현실 같은 현실을 그려낼 수 있는 형식이나 시선은 어떤 것일까. 타인의 눈을 볼 수는 있어도 정작 자신의 눈은 볼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육체가 지닌 한계다. 그러니 타인의 눈을 내 눈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한국소설이 생산해내는 저 무수한 현실의 파편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저렇듯 무수히 조각난 육체에 담겼을 시선들의 연대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다시 말해, 조각난 파편으로 전체를 읽는 힘은 서로를 되비추는 시선의 교차와 조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수천개의 ‘나’의 눈에 되비치는 수천개의 당신의 모습들, 그 파편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불완전함의 최대치를 통해서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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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오르그 루카치 『영혼과 형식』, 반성완·심희섭 옮김, 심설당 1988, 292면.

2) 권희철 「선택국내 소설 단행본」, 『문학동네』 2016년 봄호 576면.

3) 김형중 추천사, 김엄지 『주말, 출근, 산책: 어두움과 비』, 민음사 2015.

4) 김엄지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문학과지성사 2015, 28~2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