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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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준 丁昌濬

1974년 울산 출생.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panana74@naver.com

 

 

 

Vincent Van Gogh 1

 

 

1.

쌩레미 병원에서 나오는 길이야. 병실은 너무 차고 건조해. 딱딱한 침대를 훑어내리며 슬금슬금 기어들어온 햇빛이 창 아래 잠시 고여 있기도 했지만, 이따금 깊숙한 병실 한가운데까지 넘쳐들곤 했지만, 그때마다 지루한 해바라기들이 뒷목을 젖히며 빨아들이던 샛노란 햇빛은, 끝내 몸속까지 스며들진 못했어. 짙게 깔린 냉기에 오후까지 발목이 시큰거렸어. 이젠 물감을 사러 가려 해. 아니 검은색 분필이 좋겠어. 길고 음울한 코를 가진 푸석한 얼굴의 여자를 그려야 하니까. 그런데 왜 그늘에서는 항상 덜 건조된 슬픔의 냄새가 나는 걸까.

 

2.

내게도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다. 해바라기처럼 노랗게 물든 얼굴로 벽난로 앞에 앉은 불안한 졸음, 그녀는 선천적으로 쓸쓸한 뒷모습을 지니고 태어났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녀가 견딜 수 없었던 건 내 불꽃 같은 머리카락과 앙상한 몸이 아니라 흉폭한 가난이었다는 걸, 내가 그려왔던 것들은 모두가 팔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3.

밤새 새들은 어두컴컴한 얼굴로 노래하고 그녀의 잘려진 파편들이 떠다녔다. 조각난 파편의 날카로운 면으로 귀를 천천히 잘라냈다. 귓바퀴처럼 고요한 소리의 그물을 찢고 이제는 적막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사랑이 어긋나도 될까 생각하는 사이 멀리서 새들이 제 추운 몸을 날개로 덮는 소리 들렸다. 어쩐지 삶과 닮은 모습의 둥근 귀를 닫고 문을 잠근다.

 

4.

테오에게. 구름의 길을 따라가보려 해. 그 끝에 한 며칠 묵을 수 있는 마을이 있었으면, 그곳이 석탄의 고장이었으면 좋겠어. 탄가루가 드문드문 박힌 눈길을 걸어 여윈 자작나무 숲을 만날 수 있다면 여장을 풀 수 있겠지. 그때쯤 아마 팔레트엔 물감들이 하찮은 기억처럼 굳은 채 엉켜 있을 것이다. 일하는 자들의 식탁만큼 누추한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그들의 창가에 미약한 희망의 불이 들어오면, 속으로 들어갈수록 뜨거운 감자가 가득 놓인 식탁에서, 아마도 나는 희망을 봉해서 너에게 이 편지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

 

 

 

Vincent Van Gogh 2

 

 

1.

내 삶이 누군가의 필사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밀밭 위를 날아오르는 까마귀의, 혹은 코발트빛으로 내려앉는 여름밤의 습기, 혹은 먼저 세상을 떠난 자의 그림자. 처음부터 모작(模作)을 꿈꾸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 인생이란 어차피 유행, 복고풍의 모습으로 돌고 도는 것 아니겠는가.

 

2.

우리들의 내력은 항상 일정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아버지의 뒷모습을 닮지 않기 위해 애써오면서. 그러나 정작 우리는 스스로의 뒷모습을 알지 못하며 알 필요도 없다. 어차피 다음 세대에 거부당할 모습이므로.

 

3.

더이상 새로운 것은 없었다. 이미 정해진 화폭에 삶을 옮겨놓는 것일 뿐, 유전이란 비슷한 얼굴뿐 아니라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살아야 하는 자리까지 물려주는 것. 화폭 위에 이미 그려진, 앞장의 낙서가 묻어난 뒷장 같은 모습을 한 우리의 표정을 지우는 것만이 현재의 몫일 뿐. 닮은 모습에 대한 배제의 감정 역시 유전이다.

 

4.

어쩐지 헐한 음식들에서는 모조리 어머니의 냄새가 났다. 먹다 남긴 음식들이 모여 흘러가는 강바닥 아래 작년과 닮은 꽃잎들이 떨어져 함께 흐르고 나는 왜 닮은 것들끼리, 죽은 것들끼리 함께 모이는지 궁금했다. 오래 전해진 육체는 자꾸만 캔버스를 팽팽하게 당기고 나는 족보에 나란히 인쇄된 항렬처럼 가지런한 내력을 함부로 덧칠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