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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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촛불의 눈으로 한국문학을 보다

 

촛불민주주의 시대의 문학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창작과비평』 편집주간. 평론집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가 있음. kiwookh@gmail.com

 

 

촛불민주주의의 새로움

 

촛불혁명 일주년을 맞는 지금도 지난겨울 광화문광장과 전국 도심거리를 가득 메웠던 시민들의 환한 얼굴과 열띤 함성이 생생하다. 수많은 촛불과 사람들의 열기가 합쳐져 거대한 공감의 물결을 이루는 경이로운 순간들이었다. 사람들이 모처럼 온전한 자신으로 돌아온 듯 생기 넘쳤고 세상의 주인인 듯 당당했다. 허나 이런 밝은 얼굴 이면에는 ‘헬조선’이라 불리는 암담하고 가혹한 삶이 있었으니, 사람들이 촛불광장에 나온 데는 온갖 갑질과 혐오로 점철된 세상을 바꿔보려는 열망이 담겨 있었다.

촛불이 열어놓은 새로운 빛으로 우리 문학의 현재를 조명해보려는 이 글에서 촛불혁명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펼칠 계제는 아니지만 그 특별한 성격은 짚을 필요가 있겠다. 이미 지적되었듯, 연인원 1700만의 시민들이 참여한 엄청난 규모, 현장을 통제·지휘하는 지도부가 부재한 가운데 시민들 스스로가 그때그때 적절한 요구와 주장을 수렴해낸 집단지성의 지혜, 평화적 시위와 합법적 절차의 준수 등 모두 종래의 혁명과는 달랐다. 혁명에 으레 수반되는 ‘창건적 폭력’(foundational violence)이 없었을뿐더러 혁명공간에서 표출되는 ‘공적 자유의 새로운 제도화’가 동반되지 않은 것도 기존 혁명론에 어긋난다. 이런 특이한 결여 때문에 김종엽은 “현재까지는 87년체제의 수호에 머무르고 있다”1는 진단을 내놓으면서도 “스스럼없이 촛불혁명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대중의 직관적 통찰”을 존중하여 촛불혁명을 “새로운 제도의 창설이 아니라 사회의 자기이해 그리고 혁명의 자기이해 갱신의 성취라는 면에서 살펴볼 것을 제안”한 바 있다.2

촛불이 ‘혁명’이라는 ‘대중의 직관적 통찰’에 공감하는 것은 촛불이—특히 정권교체 이래 변혁적 동력이 약화되기 전인 초기에—이명박·박근혜 정권이 훼손한 87년체제의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그 체제의 경계를 ‘돌파’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두 정권 이전의 87년체제로 돌아가는 것만으로는 촛불시민의 ‘차별 없는’ 민주주의의 요구, 세상을 바꿔보자는 대전환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촛불은 기층에서 이미 폭넓은 변혁적 요구가 생성되어 있음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87년체제 아래서 평등한 인권/시민권을 인정받지 못했거나 아예 배제당한 사람들(여성, 노동자, 장애인, 이주민, 성소수자, 청소년 등)의 생생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는데 이를 기존의 제도와 방식으로 수렴하는 일은 더이상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또 하나 의미심장한 변화는 이면헌법(裏面憲法)으로 통하는, 국가안보를 빌미로 시민의 헌법적 권리를 유린해온 반공반북 이데올로기의 약발이 먹히지 않게 된 것이다. 촛불시민들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주문처럼 되뇜으로써 국민이 유일한 주권자임을 천명했는데, 이는 대통령 탄핵에 나선 주권자들을 빨갱이나 종북좌파로 몰지 말라는 경고로 들리기도 했다. 물론 성조기를 든 세칭 태극기집회에서는 여전히 험악한 종북몰이가 난무했지만 촛불에 압도되어 시대착오적인 소극(笑劇)에 그쳤다. 요컨대 이면헌법이 한국전쟁 이래 휘둘러온 무소불위의 마법은 깨어진 것이다. 이런 뜻깊은 진전과 돌파를 바탕으로 ‘촛불민주주의’라 부름직한 새로운 민주주의 흐름이 형성되었다.

촛불민주주의의 지향성은 촛불의 배경이 된 사건들, 즉 가장 직접적인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과 가장 기원적인 세월호참사를 비롯하여 성주 사드 배치 반대투쟁, 이화여대 점거투쟁,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구의역 비정규직노동자 사망사건 등의 면면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 사건들은 한국사회를 구조화하는 여러겹의 ‘기울어진 운동장’—권위주의 국가와 국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미국과 한국, 남성과 여성,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의 너무 가팔라진 경사 때문에 일어났다. 촛불은 이런 기울어진 운동장들로 된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꿔보려는 염원을 담고 있다.

촛불혁명의 미래가 순탄하리라고만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에 바탕한 촛불혁명의 추동력이 약화된데다 새 정부의 비전과 실력이 변혁의 과제들을 홀로 감당하기 힘들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낡은 세상을 등지고 새세상으로 나왔고 낙관과 비관의 차원을 넘어 ‘돌아갈 수 없는 길’ 위에 있는 것이다.

촛불집회에서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자유발언대에 오른 사람들 저마다의 생생한 발언과 몸짓, 유연하고 개성적인 어법이었다. 중고등학생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노동운동가에서 비정규직·알바까지 실로 다양한 사람들이 자기 삶을 바탕으로 자기가 왜 이 자리에 나왔고 무엇을 바라는지를 열정적으로 들려주었다.3 경직된 어투로 준비된 투쟁구호를 외치는 전통적인 운동권 연사도 있었지만 그들보다 뜨거운 박수를 받은 사람들은 상투적인 틀에 매이지 않는 자기만의 어법으로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이었다.

이들의 발언에 묻어나는 생생함은 어디서 왔을까? 아마 세상과 자기 삶을 바꿔보려는 열망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하지만 어쩌면 주눅들지 않는 발언의 순간 이미 우리는 새 삶과 새세상의 진면목을 흘끗 엿본 게 아닐까. 문학이 촛불혁명에 참여한다는 것은 문학이 새세상 만들기의 정치사회적 기획에 기여한다는 뜻만이 아니다. 가령 문단 내 성폭력과 블랙리스트 같은 적폐를 청산하는 일이 요긴하지만 이에 한정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참뜻은 무엇이 낡은 세상이고 무엇이 새로운 세상인지, 무엇이 살아 있는 삶이고 무엇이 죽어 있는 삶인지를 드러내는 문학적 실천 자체가 곧 새세상 만들기의 핵심적 일부라는 데 있다.

다음 절에서는 촛불민주주의의 새로움과 관련된 작품들을 다루되 앞서 지적한 낡은 세상과 새세상, 살아 있는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을 가르는 사유와 감각에 주목하고자 한다. 제한된 지면에서 선별적인 논의를 할 수밖에 없는데 촛불혁명 전후로 잇달아 출간된 최근의 페미니즘 소설 몇편과 10년 전에 나온 한강(韓江)의 『채식주의자』, 그리고 참사 이후의 삶을 천착한 김려령(金呂玲)의 몇몇 소설을 검토해보기로 한다.

 

 

최근 페미니즘 소설과 『채식주의자』

 

촛불혁명을 계기로 분출된 ‘차별 없는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 중에서도 여성차별과 여성혐오에 대한 반발과 저항이 특히 두드러졌고 지속적이었다. 이런 흐름에 발맞추어 래디컬 페미니즘 비평과 여성혐오 비판 담론 역시 활발하게 개진되었으며,4 페미니즘 소설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나온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 페미니즘문학의 역사도 짧지 않지만 촛불혁명과의 강한 연관 속에 등장한 소설들—조남주의 장편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 강화길의 소설집 『괜찮은 사람』(문학동네 2016)과 장편 『다른 사람』(한겨레출판 2017), 박민정의 소설집 『아내들의 학교』(문학동네 2017), 김혜진의 장편 『딸에 대하여』(민음사 2017)—의 분위기랄까 정동은 이전 소설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래디컬페미니즘의 득세와 레즈비언페미니즘의 대두에서 나타나듯 여성만의 독자적인 주체화가 두드러지기 때문인 듯싶다. 또 하나 차이를 유발하는 요인은 이 시대 젊은 여성들 대다수가 ‘프레카리아트’(precarious+proletariat)라 불리는 불안정한 노동자로 살아가는 데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하층 노동자이자 여성으로서의 이중적인 차별 체험에서 배어나는 질감이 이전 세대 페미니즘문학과 또다른 특징이라고 하겠다.

이 소설들 사이의 차이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남주의 장편은 주인공 김지영의 삶을 중심으로 적절한 상황 설정과 사건 배치를 통해 그 세대 여성들이 겪을 법한 여러 종류의 차별과 억압을 고루 제시하는 미덕이 있으나, 김지영이 한 개체로서 살아 있는 존재라기보다 차별받는 여성의 특성을 고루 조합해서 만든 평균적인 인물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런 미덕과 한계로 말미암아 『82년생 김지영』은 페미니즘을 안내하는 유용한 ‘계몽소설’처럼 읽힌다.5 강화길의 장편 『다른 사람』의 두드러진 강점은 페미니즘을 설득하기보다는 열정적으로 부르짖는 듯한 (인물보다 작가의) 목소리에 있다. 다만 그 열정이 앞서는 탓인지 성차별과 따돌림, 성폭행 등을 보여주기 위해 설정된 사건과 관계들이 너무 복잡해서 의도된 지향성을 잃고 혼란이 야기되는 아쉬움이 있다. 강렬한 목소리가 기존 형식을 파열케 하지만 새로운 형식을 찾아낸 것 같지는 않다. 이에 반해 박민정은 「행복의 과학」과 「A코에게 보낸 유서」(『아내들의 학교』)에서 보듯, 정교한 플롯 감각이 있고 프레카리아트 여성노동자의 삶과 국수주의 마초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으며, 독특한 여성 인물들을 제시하는 데도 성공한다. 다만 자유로운 발상만큼 설정이 작위적이고 멜로드라마틱한 점이 걸린다.6

김혜진의 『딸에 대하여』는 여러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우선 레즈비언인 딸이 아니라 그 어머니를 화자로 내세운 화법 덕분에 소설은 레즈비언페미니즘을 위한 계몽적인 저항서사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런 관점으로 말미암아 독자는 레즈비언 딸보다 ‘실은, 어머니에 대하여’(‘작품해설’ 제목이기도 하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뿐 아니라, 나이 든 이성애자 여성이 가질 법한 편견을 비평적인 거리를 두고 대하게 된다. 가령 한밤중 2층집의 심한 부부싸움 소리에 가정폭력 신고를 한 딸 커플에 대해 화자는 속으로 “저 애들은 부부가 되고 가족을 꾸리는 일의 고단함을 모른다. 그런 걸 모른다는 부끄러움도 없다.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도 생각하지 못한다”(50면)고 속으로 개탄하지만, 독자는 그 개탄에 동조하기보다 비판적으로 읽게 된다.

어머니의 ‘(혈연)가족’ 중심 사고방식은 기성세대에서는 정상으로 통하지만 소수자차별을 철폐하려는 촛불민주주의 시대에서는 그런 정상성이 회의되고 그런 만큼 어머니는 ‘믿을 수 없는 화자’가 된다. 그래서 어머니의 이야기는 이성애가족 중심의 선입견을 거꾸로 새겨듣는 재미를 줄지언정 더이상 바람직한 삶의 전형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딸에 대한 애정이 애틋한데다, 평생 노동자로 살아오면서 타자에 대한 배려와 공동체적 품성이 밴 덕분에 ‘믿을 수 있는 화자’일 가능성이 열린다. 가령 어머니는 자신이 돌보던 젠이 마지막으로 이송된 요양소로 찾아가 며칠만 집에서 모시고 싶다는 요청을 한다. 요양소 직원이 “가족이 아니면 절대 안 된다”고 하자 어머니는 “저분은 가족이 없어요. 피를 나눈 직계가족 같은 게 없다고요. 찾아올 사람이 세상천지에 하나도 없다고요. 가족이든 아니든 그게 도대체 뭐가 그렇게 중요해요”라고 항의한다.(176면) 혈연가족을 중시해왔던 어머니가 이 지점에서 자기도 모르게 그 경계를 돌파한 것인데, 덕분에 소설은 꽤나 아이러니한 효과를 획득한다. 요컨대 ‘믿을 수 없는 화자’와 ‘믿을 수 있는 화자’ 사이에 비평적 공간이 열리면서 발생하는 아이러니가 이 소설의 매력 포인트다.

적절한 화법 구사와 더불어 치매요양원 보호사로서의 돌봄노동과 거기서 만난 젠과의 관계, 나아가 딸 커플과의 관계까지 모두 사실적인 실감을 살려서 제시한 것도 평가할 만하다. 가령 딸이 어머니에게 막 대하는 데 반해 딸의 파트너는 깊은 배려심의 소유자로 형상화된 점도 그럴 법하다. 다만 이렇게 인물과 그 관계가 모두 적절하게 제시되다보니 작위적인 설정의 기미도 없지 않다. 어머니가 딸 커플에게 “내가 너희를 이해할 수 있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까. 때로 기적은 끔찍한 모습으로 오기도 하니까”(194면)라고 토로하듯 딸 커플의 관계를 인정하되 아직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설정도 설득력 있으나, 이마저 어딘지 ‘정답’ 같다. 성공작이지만 너무 모범적이랄까 너무 적절하달까. 이를테면 레즈비언페미니즘이라는 ‘진보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적정한 선을 넘지는 않는다.

네 작가들이 각각의 방식과 서사전략으로 페미니즘문학의 전선에서 분투하고 있음을 확인하면서도 촛불혁명에 걸맞은 문학적 돌파에까지 이른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1970~80년대 노동문학·민중문학의 경우처럼 아무리 선진적이고 혁명적인 사상이라도 보편주의적인 발상에 기대면 오히려 문학적 효력은 반감되는 현상이 아닐까 싶다. 이 지점에서 한강의 『채식주의자』(창비 2007)를 떠올린 것은 이 연작소설이 페미니즘이라는 보편주의적인 발상을 갖고 출발한 것은 아니되 어쩌면 그 때문에 페미니즘 관점에서도 비범한 서사로 읽히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모는 이 소설이 미학적이든 정치적이든 어떤 의제(agenda)를 정해놓고 나아가기보다 존재론적으로 미지의 영역을 탐구하는 ‘발견적’ 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이는 ‘존재’(Being)의 차원에서는 ‘하나의 세상을 생기게 하는 행위’7에 비견할 법하다. 물론 이때의 세상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사물과 인간의 총합으로서의 세계, 즉 공간적 개념으로서의 세계가 아니라 주체와 객체의 구분 이전의 세계, 시간성 속에서 언제나 새롭게 자기갱신을 해내야 할 세계이다.

『채식주의자』의 이런 탐구적·발견적 특성은 이 중편연작—「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의 복합적이고 정교한 서술구조에 반영되어 있다. 세 소설의 주요 서술자는 어느날 느닷없이 채식을 결단하는 주인공 영혜가 아니라 그녀의 수수께끼 같은 행동을 지켜보는 남편(「채식주의자」의 일인칭 화자), 형부(「몽고반점」의 삼인칭 초점화자), 언니 인혜(「나무 불꽃」의 삼인칭 초점화자)이다. 영혜의 삶은 몇몇 발언 및 이탤릭체의 내면 서술을 제하고는 이 세 인물의 관찰과 묘사를 통해서만 서술되기 때문에 이 연작은 영혜라는 불가해한 존재를 탐구하면서 동시에 우리 시대의 전형들인 서술자들의 속내와 삶의 방식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각각의 서술자가 나름의 방식으로 영혜를 해석하는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동시에 영혜를 재구성하게 만드는 서사 장치인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세 서술자의 이야기 신뢰도가 각기 상이하다는 점이다. 「채식주의자」의 영혜 남편은 완전히 ‘믿을 수 없는 화자’인 데 반해 비디오아티스트인 「몽고반점」의 형부와 「나무 불꽃」의 언니는 그보다 훨씬 신뢰할 만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영혜의 남편은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10면, 26면)로 여겨온 아내가 갑자기 육식을 거부하자 “저토록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었다니”(20면)라고 반감과 혐오감을 보인다. 그는 악하다기보다 보통의 속물적인 욕망과 통념을 지닌 직장인 남자인데, 그렇기에 아내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한편 중년남자의 일상에 찌든 형부는 예술가적 열망에 진정성도 있어서 아내인 인혜의 눈에 “그의 열정어린 작품들과, 수족관에 갇힌 물고기 같은 그의 일상 사이에는 결코 동일인이라고 부를 수 없을 간격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처럼”(162면) 보일 만큼 분열된 존재다. 예술가로서의 그는 신뢰할 수 있지만 중년남성으로서는 그렇지 않다. 인혜는 집안 생계를 책임지고 예술가 남편과 어린 자식을 뒷바라지하며 동생 영혜까지 챙기는 성실한 사람이지만, 그만큼 자기는 최선을 다했다는 소시민적인 허위의식에 잡혀 있다. 동생과 남편 간의 성행위 장면을 목격하고 그런 허위의식이 깨지면서 인혜는 조금씩 믿을 수 있는 서술자로 바뀐다. 그리하여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 “다만 견뎌왔을 뿐”이라는 느낌(197면)이라든지 문득 “자신이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201면) 깨닫는 자기성찰의 순간을 맞이한다. 요컨대 이 작품에는 순전한 진실을 담지한 화자/서술자도, 작가의 입장과 완전히 동일시할 수 있는 화자/서술자도 없는 것이다.

세 서술자의 세계관적 차이를 요약하면 영혜의 남편은 이 세상을 적당히 살아가려 할 뿐 새세상을 바라지 않고, 형부는 이 세상에 묶여 있되 나비처럼 그 경계를 초월하기를 갈망하며, 언니는 이 세상살이에 최선을 다했으나 그냥 견뎌왔을 뿐 진정으로 산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에 이른다. 영혜는 이상증세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런 ‘비정상성’ 때문에, 이 세상의 경계를 넘어버린 사람이다. 이런 영혜와 통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술가로서의 형부, 그리고 자기 삶의 문제를 깨달은 이후의 언니뿐이다. 여기서 하나의 쟁점은 형부와 영혜의 성행위를 어떻게 보느냐이다. 그것은 사회적 도덕률의 관점에서는 불륜임에 틀림없지만, (남편이 영혜한테 한 것처럼) 강압에 의한 성폭력은 아니거니와 섹스 후에 나누는 둘의 대화에서 영혜가 모처럼 평온하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게 만든 끔찍한 꿈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이제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하지 않을 거예요”(143면)라고 다짐하듯 말한다. 금기의 성행위가 영혜에게 치유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영혜의 존재적 추구가 이 세상으로부터 탈출을 꿈꾸는 형부의 예술작업과 친화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8

영혜에게 가해진 다양한 폭력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세 장면을 주목하고자 한다. 하나는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의 주도하에 남동생이 조력하고 어머니가 어르면서 영혜에게 고기를 강제로 먹이는 장면이다. 인혜만이 아버지를 만류하지만 그게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뻔하다. 섬뜩한 가부장적 폭력, 그것도 집단폭력이 아닐까 싶다. 두번째는 동생과 남편의 섹스 장면을 비디오테이프로 보고 충격을 받은 인혜가 두 사람을 정신병원에 가두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조치가 심각한 폭력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있다. 우선 형부와 처제 간의 적나라한 섹스와 그것을 촬영하기까지 한 것은 포르노물의 작동방식과 흡사하고, 게다가 이로써 자신에게 최선을 다한 언니에게 깊은 상처를 입힌 것도 심각한 폭력이라면 폭력이다. 하지만 영혜의 존재적 추구와 형부의 예술적 행위 간의 친화성에 초점을 맞추면 이 조치는 치유의 기미를 보이던 영혜의 삶을 또다시 무참하게 파괴하는 처사였다. 그것이 영혜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인혜의 손으로 저질러진다는 사실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세번째는 정신병원에서 채식마저 거부하는 영혜에게 튜브를 통한 강제급식을 실시하는 장면이다. 단식에 의한 사망에 대처하는 이 조치는 죽음이란 무조건 피해야 할 것이라는 세상의 논리가 휘두르는 폭력이다. 인혜가 음식을 강제로 먹이려는 병원의 조치에 반발하는 동생에게 “네가! 죽을까봐 그러잖아!”(190면)라고 항변하자 영혜는 “……왜, 죽으면 안되는 거야?”(191면)라고 반문한다. 이 장면은 고기를 강제로 먹이는 첫번째 장면과 이어져, 음식을 거부함으로써 이 세상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영혜의 시도가 세상의 시스템에 의해 원천봉쇄당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영혜가 채식을 하고 나중에는 나무가 되기를 염원해서 음식을 거부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 소설에는 채식-꽃-나무로 이어지는 식물성의 모티프가 산재하고 의미심장한 울림이 적잖다. 하지만 영혜가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들에 대해 칼로 손목을 긋고 짐승처럼—“짐승 같은 비명”(51면), “흡사 짐승 같은 소리”(211면)—울부짖음으로써 결사적으로 저항한다는 점에서 식물적 주체성과는 거리가 멀다.9 또한 ‘나무-되기’의 열망이 경증 정신분열자인 영혜의 망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식물적 주체성의 코드로만 읽는 것은 텍스트에 박혀 있는 애매성(ambiguity)의 요소들을 무시하는 읽기가 될 수 있다. 영혜는 무엇보다 존재의 불가해성을 보여주지만10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를 암시하는 단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영혜를 괴롭히는 꿈과 그 때문에 시작되는 육식거부·단식은 존재의 마음과 몸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요소들이다. 근대적 합리성에 어긋나는 이 두 요소를 따라서 갈 데까지 가는 영혜의 존재적 움직임은 은유적인 차원에서는 가부장적 질서와 육식을 당연시하는 근대문명을 비판하는 울림을 담고 있다.

죽어가는 영혜를 싣고 서울로 오는 구급차에서 인혜가 영혜의 귀에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221면)이라고 속삭이는 마지막 대목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꿈에서 깨어난 현실인 걸까. 인혜와 영혜 각각에게 다른 형태로 나타났지만, 악몽 같은 현실인 이 세상이 오히려 꿈이요, 거기서 깨어나기만 하면 새 삶이 가능해진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하다. 영혜의 속내는 여전히 알 수 없으나, 인혜는 영혜를 처음으로 동정심도 미움도 없이 순수하게 껴안는다. 그렇기에 적어도 은유적인 차원에서는 지옥 같은 세상들을 통과한 자매가 삶의 끝에 이르러 진정한 ‘우리’가 되는 이 종결은 훌륭한 페미니즘서사로도 손색이 없다. 또한 여기서 인혜는 자신의 삶을 옥죄던 소시민의식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불가해한 존재인 영혜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개방함으로써 자기변혁을 이뤄낸 것이 아닐까.

 

 

참사 이후의 삶, 김려령의 소설들

 

세월호참사와 촛불혁명이 이 시대를 특징짓는 양대 사건인 까닭은 참사에 응축된 시대적인 문제점들이 촛불을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주체 외부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 시대 사람들 상당수가 규모와 양상은 달라도 저마다의 참사와 촛불을 경험한다. 참사를 죽음에 한정하지 않고 참담한 사건까지 포함한다면 참사의 바깥에서 이 시대를 살 수 있을까. 참사를 당하고도 촛불이 부재한 사람은 인혜의 경우처럼 삶을 산다기보다 ‘견디고’ 있는 것이다. 촛불 없이 새 삶은 시작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근년에 세월호참사와 촛불혁명과 관련된 다큐멘터리와 아울러, 참사와 그 이후의 삶을 천착하는 시와 소설이 다수 출간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김탁환의 『거짓말이다』(북스피어 2016)와 한강의 『소년이 온다』(창비 2014)가 역사적 참사 속에서 이 주제를 다뤘다면, 어느 한 개인이나 가족의 차원에서 이 주제를 탐구한 소설은 상당수다. 황정은의 『계속해보겠습니다』(창비 2014)와 중편 「웃는 남자」(창작과비평』 2016년 겨울호),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창비 2016), 조해진의 『빛의 호위』(창비 2017),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문학동네 2017) 등, 사실상 이 시기의 역작들 대부분과 겹친다. 흔히 ‘청소년문학’으로 분류되는 소설들 중에서도 이 명단에 오를 작품이 적잖다. 가령 『우아한 거짓말』(창비 2009)에서부터 이미 참사 이후의 삶을 천착해온 김려령의 소설집 『샹들리에』(창비 2016)와 손원평의 장편 『아몬드』(창비 2017)야말로 이 주제를 집중 탐구한 작품이다.11

김려령의 소설을 읽으면 작가의 대범하면서도 섬세한 감수성이 자주 실감된다. 그런데 그 대범함이 주류 소설들의 ‘미학화’ 경향에서 벗어나는 장점으로 작용하는가 하면 더러 통념적 정서나 상투어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약점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가 이른바 ‘본격문학’으로 시도한 『너를 봤어』(창비 2013)와 『트렁크』(창비 2015)가 남다른 미덕이 있음에도 평단과 독자로부터 큰 호응을 얻지 못한 데는 통속적인 요소를 너무 ‘대범하게’ 끌어들인 탓도 있다. 그러나 그 대범함이 비범한 예술적 효과를 발휘할 때가 있다. 바로 죽음을 대할 때이다.

대다수 소설과 달리 김려령의 소설은 참사일 수밖에 없는 죽음을 간단히 알리면서 시작된다. ‘사건의 중심으로’(in medias res) 바로 들어가는 것이다. 장편 『우아한 거짓말』에서는 소설 앞머리에 “내일을 준비하던 천지가, 오늘 죽었다”(7면)고 고지하고 중편 「이어폰」(샹들리에』)에서는 서두부터 불길한 대화(“정말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니?”/“네.”/“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165)가 제시된다. 몇면 뒤 “엄마 몸 위로 흰 천이 덮였다”(170면)라는 대목에서 참사가 일어났음이 분명해진다. 중일이 자기 방에서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면서 게임을 하느라고 주방에서 엄마가 쓰러져 죽어가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것이다.

첫 대목에서 바로 죽음을 등장시키는 이런 방식은 주요 인물의 죽음이 클라이맥스로 배치되는 통상적인 서사방식과 판이하다. 많은 소설에서 죽음은 삶의 끝이지만 김려령의 소설에서 죽음은 삶의 한복판에 놓인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죽음은 각별한 의미를 부여받는 대신 돌아다니면 곤란한 흉물처럼 한구석에 갇혀 있는 데 반해 그의 소설에서 죽음은 크게 떠벌려지지 않으면서도 전편에 걸쳐 존재감을 갖는다.

죽음 이전의 삶을 돌아보는 작업은 바로 죽음의 원인규명 과정이기도 하다. 「이어폰」에서 죽음의 원인은 공식적으로는 “부주의로 발생한 사고사”(202면)로 판정받지만, 죽음의 실제적인 원인규명은 이어폰의 의미에 집중된다. 중일에게 고급 이어폰은 친구들 사이에서 자랑거리일 뿐 아니라 학교-학원-집을 오가는 힘든 삶에서 빠져나와 자기만의 세계를 살 수 있게 해주는, 없어서는 안 될 장비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중일의 삶을 가족의 삶과 완전하게 차단하기도 한다. 중일 아빠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생활비를 감당하느라 쫓기고 “점점 잔소리가 늘어나는 아내와 이어폰 하나로 저 혼자 천국에 사는 아들놈”(200면)에게 ‘열받아서’ 낙을 붙인 것이 아들처럼 이어폰을 꽂고 게임을 하는 것이었다. 아빠가 쓰러진 엄마를 먼저 발견했지만, 엄마가 쓰러지는 순간 아빠도 이어폰을 꽂고 게임을 하고 있었음이 암시된다. 이쯤 되면 이어폰은 그냥 하나의 기기인 것만은 아니다. 피폐해지고 가혹해지는 삶의 압박을 피하는 통로인 동시에 그나마 잔존하는 가족적·공동체적 유대를 차단·해체하는 기제의 상징물인 것이다. 잘 듣기 위한 장치인 이어폰이 되레 소통을 단절한다는 아이러니를 통해 현대 기술문명의 역설적 성격이 드러나기도 한다.

죽음/참사 이후의 삶은 치유의 과정인데, 촛불과 같은 삶을 밝히는 기운이 없으면 진정한 극복은 힘들 것이다. 「이어폰」의 경우 참사 이후의 어두운 시간을 밝혀주는 촛불은 할머니와 고모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대범한 성격과 공동체적 품성으로 자식과 손자를 포용하고 속 깊은 고모는 중일의 깊은 상처를 헤아려 정신과 상담을 받게 한다. 그때야 중일은 엄마의 죽음의 순간을, 제대로 상상하고 직시할 수 있게 된다. “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서는 엄마가 의자에서 떨어져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텅. 같이 와장창 깨진 접시들. 중일아……. 다른 한쪽에서는 중일 자신이 이어폰을 꽂고 춤을 추고 있었다. 좋아하는 가수의 신곡은 마침 좋아하는 리듬이었고, 축구 게임은 막 역전승을 거두는 순간이었다. 좋아! 뿜빠빠빠 뿜빠빠빠…… 의자에 앉은 채로 리듬을 탔다.”(240~41면) 이 소설은 ‘이어폰’이라는 실물이자 강력한 상징을 통해 현재 우리 사회의 가족이 어떻게 단절된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통찰하는 수작이지만, 할머니와 고모의 힘을 빌린 치유의 과정이 다소 순조롭게 진행된 감이 없지는 않다.

『샹들리에』의 다른 단편들 또한 어떤 특정한 유형에 얽매이지 않고 생동하는 인물을 만들어내는 김려령의 능력을 실감케 한다. 죽음과 삶의 리듬 사이를 오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작가 특유의 감각이 힘을 발휘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앞서 「이어폰」의 중일과 중일 아빠의 형상화도 뛰어나지만, 따옴표 없이 연속되는 대화말을 통해 청소년의 삶과 언어의 생생한 현장을 발 빠르게 비춰주는 「고드름」은 이 점에서 수작이다. 그런가 하면 「아는 사람」은 한 여고생이 과외그룹 동료와 선생의 성폭력 덫에 걸리는 과정을 섬뜩할 정도로 핍진하게 그려낸다. 인물의 형상화 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그녀」와 「미진이」 연작이다. 이 연작에서 신체적인 죽음과 삶뿐 아니라 ‘살아 있는 삶’과 그렇지 못한 삶에 대한 작가의 남다른 감각이 인물 형상화를 통해 유감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녀」의 일인칭 화자는 할아버지의 장례식을 준비하러 시골에 온 남자 중학생으로 그곳에 사는 ‘돼지 할머니’의 손녀인 ‘그녀’를 만난다. 그녀에 대한 화자의 첫인상은 ‘못됨’ 그 자체였다. “온몸에 못됨을 장전하고 있다가 신호만 떨어지면 곧장 못됨을 발사할 것만 같았”다.(40면) 그러니 둘 사이에 무슨 좋은 관계가 싹트겠느냐마는 소설은 그녀의 못됨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고 실은 ‘살아 있음’의 징표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런 낌새를 느끼게 해주는 데는 몇가지 요인이 작용한다.

우선 이 소설에 등장하는 시골마을이 소년 화자의 입장에서 실감있게 그려진 점이 중요하다. 가령 장례를 준비하는 과정과 큰집과 작은집 식구가 함께 일하면서 온 마을이 활기를 띠는 광경이 그러하다. 화자가 전해 들은 이 마을의 고약한 일면, 즉 마을 노인들이 모처럼 찾아온 젊은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하고 덕담이랍시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장면도 자못 생생하다. 가령 화자의 아버지가 본가(할아버지와 큰아버지 집)에 왔다가 돌아가려 할 때 한 할아버지로부터 듣는 잔소리(“느이 형하고 형수 용돈 좀 챙겨 줬나? 맨날 얻어만 먹으면 안 되지”, 56)가 그렇다. 그런데 ‘그녀’는 시골 어른들의 고약한 잔소리에도 전혀 기죽지 않을 만큼 “싸가지가 자유로운 영혼”(55면)인 것이다.

못된 성질의 그녀와 만만찮은 ‘중딩’ 화자가 어둠 속에서 한판 붙는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이자, 살아 있는 삶의 감각과 관련해서 의미심장한 울림을 준다. 그 대화의 절정에서 그녀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학교나 다니는 찌질한 새끼가……”라고 공격하자 “나갔다가 다시 오니까 니가 대단한 것 같냐? 너 좆나 찌질해 보여”라고 소년이 응수한다(45면). 두 사람이 이렇게 싸우는 장면에서는 「고드름」의 언어적 활력에서도 느껴진 오늘날 청소년들의 살아 있는 기운이 실감된다. 화자는 “못돼 처먹은 그녀”(44면) 때문에 성질을 내면서도 그녀의 못된 성질 속에 묻어나는 팽팽한 생기에 자꾸 끌린다.

「미진이」는 ‘그녀’가 어떤 연유로 도시의 삶을 포기하고 시골 할머니 집에서 살기로 ‘선택’하게 되는가의 전말을 이야기한다. 이 소설도 바로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서사방식을 취한다. 미진에게 일대 사건은 이제까지 뭐든 다 들어주던 엄마의 태도 돌변에서 시작된다. 미진이는 제멋대로 학원 대신 과외를 받기로 결정하고 엄마를 종전의 방식대로 구워삶으려고 하지만 엄마의 반응은 전혀 예기치 못한 것이다. 분위기를 조성해도 소용이 없자 미진이는 “나 과외 받을 거야”라고 떼쓰듯 불쑥 말한다. 그러자 엄마는 “통보니?”라고 마치 매서운 잽처럼 짧게 반문하고 순간적으로 충격을 먹은 미진에게 “대체 너는 무슨 근거로 그렇게 당당하니?”(67~68면)라고 한방을 더 날린다.

 

“내가 당당하지 못할 게 뭐가 있는데?”

“너는 너를 무엇으로 증명해 봤니?”

“뭐라고?”

“니가 뭔데 네 결정을 부모한테 함부로 통보해. 명령이야?”

“그래, 명령이야! 엄마가 마음대로 낳았으니까 당연히 책임도 져야지!”

“어떤 생명도 지가 승인하고 태어나지 않아. 니 말대로라면, 내 마음대로 낳았으니 니 생명권도 내가 쥔 거니? 죽여도 돼?”(68~69면)

 

늘 이겨왔던 엄마와의 언쟁에서 미진이는 “죽여도 돼?”라는 치명타를 맞고 처음으로 참담하게 무너진다. 게다가 엄마로부터 “(넌) 그냥 평범한 애거든. 너 전혀 특별한 사람 아니야. 명심해”(69면)라고 싸늘하기 그지없는 평가까지 받자 어떻게 할지 방향을 잃는다. 물론 ‘못돼 처먹은’ 미진이가 순순히 물러선 것은 아니다. 아빠에게 호소도 하고 일주일간 가출도 하고 급기야는 학교까지 자퇴하면서 저항하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다. 엄마는 심각한 우울증 때문에, 아빠는 그런 엄마를 돌보느라 딸의 저항에 대처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 미진이는 종전과 같은 방식의 삶을 지속할 수 없게 된다. 이 상황에서 미진이는 돼지 농사를 망친 할아버지의 자살로 홀로된 시골 할머니와 함께 살기로 ‘선택’한다. 왜 그랬을까?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유는 부모가 자신의 응석을 더이상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지만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존재적 차원에서 미진이의 서울에서의 삶이란 것이 본질적으로 공허하기 때문이다. 학교-학원(과외)-집을 전전하면서 바쁘게 돌아다녀도 헛소동에 불과한 그 삶은 그녀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쇼처럼 포즈로 살아가는 삶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엄마는 엄마대로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으로 자살충동에 빠지는 위기 상태였다. 미진이가 가출했을 때 아빠는 “아내는 집에서, 딸은 밖에서, 자살할 것만 같았다”(80면)고 털어놓는다. 요컨대 미진이의 선택은 궁여지책으로 보이지만 가족 전체가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허위의식의 삶에 지친 미진이의 직관적인 선택이랄 수 있다. 그 선택의 순간 미진이의 낡은 삶의 경계는 ‘돌파’된 것이다.

「그녀」에서 보듯 돼지 냄새보다 더 고약한 동네 사람들의 간섭 때문에 시골생활이 만만찮았으나 미진이는 그에 주눅들지 않고 ‘싸가지 없이’ 맞받아친다. “어이? 이 가시나, 니 인제 핵교 댕기나?”/“네.”/“할머니는 어짜고?”/“그럼 할머니를 학교에 데리고 가요?” 그런 다음 미진이는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정말 대단한 마을이었다. 그런데도 여기가 집보다는 나았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른다. 마주 보고 짜증 내는 것보다 떨어져서 그리워하는 게 차라리 나은 것 같았다.”(87면)

그런데 미진이 자신도 모르는 그 이유를 독자는 알 것 같게 하는 데 이 소설의 빼어남이 있다. 미진이가 시골 사람들의 간섭과 싸우면서 제 성질을 다 부릴 수 있을뿐더러 마을사람들로부터 그 못돼먹은 ‘승질’을 인정받기까지 하는 것이, 서울에서 멋져 보인다고 값비싼 과외를 받고 친구들을 의식해서 아이패드를 사고 엄마한테 뭔가를 얻어내려고 쇼를 하는 것보다 나은 삶임이 느껴지는 것이다. 살아 있는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의 차이를 알아채는 작가 특유의 감수성이 서울과 농촌 각각의 현실에 대한 사실주의적인 인식과 결합됨으로써 자칫 관념적일 수 있는 미진이의 ‘자기변혁’ 이야기를 생동하는 리얼리즘서사로 구현해놓았다.

우리 사회가 심각하게 중앙중심적이라든지 청소년세대의 전망이 매우 어둡다든지 하는 사실의 고정된 상에 집착했다면 이런 소설을 써내기 힘들 것이다. 김려령은 그런 상에 매이지 않고 한 구체적인 개인의 변모과정을—그 개체 내부에서 교차하는 삶의 리듬과 죽음의 리듬을 섬세하게 구분하면서—주밀하게 따라간다. 그 과정에서 청소년세대와 기성세대, 시골과 도시, 여러 가족형태를 가로지르는 폭넓은 소설적 탐구가 이뤄진다. 특히 자식세대의 눈으로 부모세대의 삶을 비판하고 부모세대의 눈으로 자식세대의 삶을 비판하는 상호비평적 공간을 만들어낸 것은 특기할 만하다. 한 엄마가 자식들에게 어떤 기대도 버린 듯한 최근작 「청소」(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 역시 그 연장이되 이제까지와는 또 딴판인 새로운 시도로 보인다.

 

 

맺음말

 

촛불혁명에 걸맞은 문학이란 ‘차별 없는 민주주의’ 같은 진보적인 의제와 무관하지는 않되 그것을 반영하거나 주장한다고 해서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낡은 언어와 어법으로 말하는 순간 그 내용이 제아무리 진보적이고 혁명적이라도 소용없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학의 언어가 머리만의 언어가 아니라 몸의 언어이기도 하고, 그 어법이 달라지는 순간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얼핏 촛불혁명과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김려령의 소설들을 살펴본 것은 두 작가의 작품 속에서 ‘자기변혁’을 이룩한 인물들이 탐구되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그 과정을 제시하는 특별한 방식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개별 작품을 비평하면서 자유발언대에 오른 시민들의 생동하는 모습과 발언을 자주 떠올렸다. 변혁을 향한 열망과 분리될 수 없는 그 생동성이 촛불민주주의 시대의 문학에 길잡이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글에서 말하려고 한 바가 점차 또렷해졌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껏 살아왔던 방식대로 살지 않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되는 순간, 문학의 출현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무엇도 아닌 세상과 자신의 삶을 바꾸고자 하는 열기만으로 빛났던 촛불광장의 시민들 하나하나의 마음속에 수많은 시가 씌어질 수 있었다. 이 시대 시인과 소설가의 작업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쓴 시를 귀담아듣고 그 뜻을 헤아리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새세상으로 나아가는 모험을 감행하는 일이다. 시를 안고 사는 촛불독자의 역할은 그 용감한 작업의 진가를 알아보고 함께 역사의 열린 길을 나서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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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종엽 「촛불혁명의 새로운 단계를 향하여」, 『창작과비평』 2017년 여름호 3면.
  2. 김종엽 「촛불혁명에 대한 몇개의 단상」, 『분단체제와 87년체제』, 창비 2017, 469면. 처음부터 촛불이 혁명이며 어째서 그런가를 주장한 예로는 서재정 「시민이 하늘이다: 계속되어야 할 촛불혁명」, 창비주간논평 2017.6.21 참조.
  3. 자유발언대의 생생한 발언들은 황정아의 주장대로 “광장은 권력을 퇴진시키는 싸움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누구이며 누구이고자 하는지, 민주주의란 무엇이며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알고 또 이해하고자’ 하는 ‘열정적인 싸움’의 현장”임을 실감케 한다. 황정아 「민주주의는 어떤 ‘기분’인가: 김금희와 황정은의 최근 소설들」,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 55면.
  4. 젠더불평등과 여성혐오 비판 담론과 관련하여 다수의 논의들이 나왔다. 최근 논의의 흐름을 조리있게 정리한 글로는 백지연 「페미니즘 비평과 ‘혐오’를 읽는 방식」, 『창작과비평』 2017년 여름호 19~25면 참조.
  5. 이 작품에 대한 상세한 논의로는 신샛별 「프레카리아트 페미니스트: 조남주, 강화길 소설에 주목하여」, 문장 웹진 2017.7.1 참조.
  6. 박민정의 레즈비언 서사 「아내들의 학교」에 대한 논의는 차미령 「너머의 퀴어: 2010년 한국소설과 규범적 성의 문제」, 『창작과비평』 2017년 여름호 64~68면 참조.
  7. 하이데거의 ‘worlding’ 개념을 풀어쓴 것이다. 이 개념을 포함하여 하이데거의 시간성으로서의 세계 개념에 대해서는 Pheng Cheah, What Is a World?: On Postcolonial Literature as World Literature, Duke University Press 2016, 93~130면 참조. “I will discuss Heidegger’s argument that radically finite temporality is a “force” of worlding, a process that, in giving rise to existence, worlds a world”(97면) 참조.
  8. 이 점을 고려할 때 「몽고반점」의 핵심을 “형부에 의한 처제의 성적 착취”로 요약하는 최원식의 해석에 동의하기 힘들다. 최원식 「우리 시대 한국문학의 두 촉: 한강과 권여선」, 『창작과비평』 2016년 겨울호 83면. 이런 해석은 사건 당시 인혜의 견해와 통하는데, 자기성찰 후의 그녀는 그것이 진실이 아닐 수 있음을 감지한다. 문제의 장면에 대해 인혜는 “그것은 분명 충격적인 영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성적인 것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꽃과 잎사귀, 푸른 줄기 들로 뒤덮인 그들의 몸은 마치 더이상 사람이 아닌 듯 낯설었다. 그들의 몸짓은 흡사 사람에서 벗어나오려는 몸부림처럼 보였다”(218면)라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9. 신샛별 「식물적 주체성과 공동체적 상상력: 『채식주의자』에서 『소년이 온다』까지, 한강 소설의 궤적과 의의」, 『창작과비평』 2016년 여름호 참조.
  10. 존재의 불가해성과 ‘믿을 수 없는 화자’의 절묘한 구사를 포함해서 『채식주의자』는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Bartleby, the Scrivener, 1853)와 유사한 점이 적잖다. 가령 영혜 남편은 아내가 갑자기 육식을 끊은 것에 대해 마치 변호사가 바틀비의 갑작스런 필사 중단에 반응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즉 인내하고 체념하고 이해하려고 하지만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변호사가 바틀비에게 합리적인 설득이 통하지 않자 결국 바틀비의 감옥행을 방치하는 것과 인혜가 남편과 동생의 황당한 성행위를 대하고 두 사람을 정신병원에 집어넣는 조치를 취하는 것 사이에도 비슷한 점이 있다.
  11. 한국 평단은 이른바 ‘청소년문학’을 진지하게 평하지 않지만, 이런 관행은 재고되어야 마땅하다. 청소년의 삶이 ‘헬조선’ 바깥이기는커녕 한복판일뿐더러 그들의 삶과 가족의 삶이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에 청소년의 삶만 떼어낼 수도 없다. ‘청소년문학’을 하나의 장르문학이라고 본다면, 그중엔 이 장르에서는 성공작일지언정 당대 문학의 수준작에는 못 미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걸작도 있다. 김려령의 경우 『우아한 거짓말』이 후자에 속하며, 소설집 『샹들리에』에 수록된 소설들 대부분도 후자 쪽이다.

한기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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