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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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제사 크리스핀 『죽은 숙녀들의 사회』, 창비 2018

정체성의 폭발, 불편하신가요?

 

 

정소영 鄭素永

영문학자, 번역가 syjung09@gmail.com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걸으면서 어쩌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하고 있었어요.”(135면)

 

179_461나를 규정하는 무수한 정체성과 관계와 의무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내가 행하는 많은 일들이, 나를 지칭하는 많은 이름들이, 나를 규정하는 많은 개념들이 나를 이룬다기보다 지운다는 생각이 들 때, 살아 있다는 느낌이 필요한데 길을 찾을 수 없을 때, 그러다 문득 자살까지 떠올리게 된다면 우리는 보통 도움을 청한다. 자살의 문턱에서 제사 크리스핀(Jessa Crispin)이 도움을 청한 상대는 특이하게도 “밤늦은 시각 내 곁을 지켜준” 죽은 사람들, “실을 끊어내고 방황한 영혼들”(13면)이었다.

『죽은 숙녀들의 사회: 유럽에서 만난 예술가들』(박다솜 옮김, 원제 The Dead Ladies Project)의 짧은 도입부에서 저자가 제공하는 길 안내는 거기까지이다. ‘실을 끊어내고 방황한 영혼들’, 그러니까 살던 터전을 떠나 낯선 곳을 배회했던 예술가들이라는 단서 외에 이 책에 실린 인물들 사이에 뚜렷한 공통점은 없다.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에서 시작해 제임스 조이스의 부인 노라 바너클(Nora Barnacle)과 프랑스 예술가 끌로드 까엉(Claude Cahun), 진 리스(Jean Rhys)와 리베카 웨스트(Rebecca West), 써머싯 몸(Somerset Maugham) 같은 작가들, 「봄의 제전」의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등의 흔적을 찾아 유럽 대륙을 누비는 그녀의 여정은 종잡을 수 없고 그들의 삶을 짚으며 쏟아내는 신랄한 비판은 종종 불편하다. 게다가 기혼남자와 불륜의 관계에 있는 ‘정부(情婦)’로서의 모습이 중간중간 양념처럼 끼어든다. 이건 뭐지? 이런 느낌에 당혹스러워지다가 어느 순간 이 책은 바로 그 당혹스러움을 겨냥한 것임을 깨닫는다. 독자를 뒤흔들고 불편하게 만드는 일.

자살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삶의 의지를 구할 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고대 그리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자유의지와 운명이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임을 통렬하게 보여주었고 그 이래로 아무리 인간의 능력이 증대되었더라도 자유의지가 운명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난 적은 없다. 이 책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칼뱅교는 통렬함이나 역설 같은 건 모두 제거된 근대의 운명론이었고, 현대에는 “망할 생물학”이 그것을 대체하여 우리는 “자율신경계의 노예”가 되었다(183면). 그래서 저자는 “내가 처음 자유의지로 행한 건 자유의지를 믿는 것이었다”(48면)라고 말한 제임스로 첫발을 뗀다.

칼뱅교는 우리에게서구인에게, 그리고 이제 서구화된 우리에게단지 운명론만을 안겨주지 않았다. 막스 베버가 정의한바 자본주의 정신과 결합하여 그것은 근현대적 규범과 규범적 관계를 만드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것을 통해 우리의 머리와 몸과 감정에 익은 규범을 우리는 당연시한다. 생산성에 단단히 매여 삶의 성취를 “달러와 센트로 환산”(160면)하고, “자기계발 문화에 물들어 연애가 ‘건강하고’ ‘솔직하고’ ‘충만한지’를 끊임없이 평가”(69면)하고, 법적인 일부일처제 외에는 모두 ‘비정상’으로 간주하고, “열정이나 영감이나 흥분보다” ‘정상’을 우선시하고(266면).

이러한 규범들에 저자가 내리치는 것은 비판의 칼날이라기보다 파괴의 망치에 가깝고 여기에서 불편함은 시작된다. 저자의 망치를 벗어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고 우리는 공격받는 것은 물론 정당한 비판조차도 지독히 싫어하니까. 노라 바너클이나 모드 곤(Maud Gonne)을 예술가의 뮤즈라는 잣대로 평가하고, 문학비평가이자 작가였던 리베카 웨스트를 아들을 버린 못된 엄마였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은 굳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성애 성향이었던 남편의 삶을 불행으로 몰아넣었던 써머싯 몸의 부인 씨리 몸을 동정적으로 묘사하는 여성 전기 작가를 비난하고, 헤밍웨이의 여자판인 진 리스의 ‘젠더 전시’“내 가방과 다른 가방과 내 온 인생을 들어주지 않을래요? 난 못하겠으니까”(295면)를 보며 보호를 얻어내기 위해 고통과 약함을 가장하는 여자들 전부에 대한 분노를 쏟아낼 때 ‘페미니스트’들은 왠지 불편해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제도를 비판해야지 제도의 산물인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성에 익숙하니까. ‘마녀와 신부(新婦)’라는 이분법에 그치지 않고 신부로 살아가는 실제 여자들까지 비난하는 건 왠지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적합하지 않아 보이니까. 하지만 과연 그런가? ‘마녀와 신부’나 가부장제는 비난하면서 직접적으로 가부장제를 공고히 하는 그러한 행위와 주체들은 비난할 수 없는 건가?

저자가 ‘정체성 정치’를 공격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 있다. ‘젠더, 인종, 성, 국적, 혈액형 등 각종 정체성의 징표에 따라 억압의 순위’를 매김으로써 그 공고한 정체성으로 정당성을 확보하고, 다른 한편 나치즘의 과거를 지닌 독일인이나 인종 간 분쟁에 시달리는 세르비아인들, 무슬림 등 외부인들을 다른 정체성으로 뭉뚱그려 일반화하는 일 말이다. 여자라고, 유색인이라고, 동성애자라고 모두가 자동으로 진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리가 없고, 남자라고, 백인이라고, 이성애자라고 모두가 자동으로 보수적인 자리에 놓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당연시하지만, 현실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그런 식의 정체성의 충돌이나 정체성을 명분 삼아 벌어지는 폭력은 너무나 비일비재하다.

프랑스 예술가, 사진가, 작가로서 연인이자 동료인 마르셀 무어와 함께 작업했던, 아주 생소한 인물인 끌로드 까엉이 이 책의 마지막을 차지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수많은 탑과 벽과 경계들. 요새와 성과 복잡한 입구들”(344면)을 지닌 저지섬에서 의붓자매와 연인관계로 살았던 여성. 모든 규정과 정의를 무색하게 만드는 사진 속의 모습으로만 존재하는 미스터리이자 괴짜. 학계에서 즐겨 정의하듯 새로운 정체성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정체성의 폭발이라는 점에서.

예술 작업 외에 까엉와 무어가 했던 놀라운 일은, 2차대전 당시 저지섬이 독일군의 수중에 들어갔을 때 독일어로 반역을 촉구하는 선전물을 써서 독일군들에게 돌린 일이다. 이 행동이 놀라운 이유는 그로써 독일군을 쫓아내서가 아니라 “나치 독일군을 연민할 수 있고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존재로 대우”(336면)했기 때문이다. 이는 노예제와 선주민 말살이라는 악행의 역사를 가진 나라 출신이면서 독일인들 전부를 “나치의 자식”이라고 혐오하는 한 미국인(110면)과 대조되면서, ‘신부’처럼 사는 여성들에게 극도의 분노를 보이는 일과 독일인이나 세르비아인 등을 일반화하지 않는 일이 어떻게 하나의 맥락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행이라기보다는 여러 곳에서의 짧은 거주라 할 긴 여정을 마친 후 저자는 어디에 있을까. 아니, 우리가 어디에 있기를 바랄까. 까엉의 삶을 보며 ‘정말 나 같네’라고 하기 힘든 것처럼, 이 책은 저자의 길을 따라가고 싶게 만드는 여행기는 아니다. 실제 여행이든 인생의 여정이든 말이다. 하지만 자신과 시간을 함께했던 과거의 인물들을 따라간 긴 시간의 끝자락에 저자 스스로 정의한 해법은 곧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에게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자기 경험과 생각을 담는 용기로 규정하지 않는 것” “자신의 경계를 격렬하게 밖으로 밀어내는 것”(356면). 흔히 말하듯 인생을 여행이라고 할 때 그것은 돌아갈 집이 있어서가 아니라 계속되는 길 위의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망치’가 아니어도 사실 파괴는 매 순간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모래성 같은 성곽을 고집스레 주위에 둘러치지 않는다면 말이다.

정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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